소설리스트

116화 (116/192)

116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을 빠르게 걸으며 솔레아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딘가로 사라졌던 아무스가 어느새 그녀의 곁에 따라붙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집에 가야 돼. 냉장고에 술이 떨어지면 아빠가 화낸단 말이야.”

“……안 해도 돼.”

“아니야, 해야 돼. 돈 한 푼 못 벌어 오고 밥만 축내는데 제때 술 채워 놓는 것도 제대로 못 하면 어떡해. 슈퍼가 어느 방향이지?”

“……어린아이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어린가?”

솔레아는 제 몸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아무스를 바라봤다.

“난 다 컸는데. 아빠도 다 큰 년이 심부름도 하나 못 하냐고 했어.”

아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솔레아는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닌 듯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바삐 걸으며 출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나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빨리 나가야겠어. 아빠는 집에 왔을 때 내가 없으면 화내. 다녀오셨습니까, 라고 인사해야 되거든.”

마음이 급해졌는지 솔레아는 한참을 뛰다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여기가 어디야?”

“응?”

“출근해야 되는데.”

“……내가 데려다줄게.”

“아니야. 괜찮아. 남자랑 같이 가면 돈도 없다면서 연애는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거든, 사람들이.”

“……그럼 저 앞까지만 같이 가자.”

“응. 좋아.”

그러곤 또 한참을 걷던 솔레아가 이번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이제 쉬고 싶어.”

“그래.”

“아무것도 안 할래.”

“그래, 하지 마. 네가 싫은 건 안 해도 돼.”

“오빠들이랑 놀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오빠들 보고 싶어? 집으로 갈까?”

“……무슨 오빠들?”

맑은 보라색 눈을 말똥말똥 깜빡이며 아무스에게 질문한 솔레아는 이내 질문을 했단 것도 까먹었는지 자리에 드러누워 서서히 눈을 감았다.

“졸려.”

“그래, 자. 내가 옆에 있을게.”

“정말?”

“응. 정말.”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응.”

“나만 두고 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지도 않게 계속 옆에 있을 거야?”

“그럴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솔레아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곤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바라던 사람이 내가 아니어도 버리지 않을 거야? 실망하면 어떡해. 화낼 거잖아.”

“너는 너야. 난 널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렸고,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두고 떠나지 않아.”

“그래?”

“그래.”

“……응…….”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솔레아에게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스는 잠든 솔레아를 안아 들고 검은 공간 밖으로 빠져나왔다.

산들의 능선이 넘실대는 파도처럼 수평선을 가득 채우고, 하얀 구름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커다란 나무 아래를 둘러싼 곳만 아무런 풀도 자라지 않은 검은 흙바닥이었다.

아무스가 1,000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곳이었다.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솔레아를 내려놓은 아무스는 그녀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검은 날개를 꺼냈다.

혹여 햇빛에 깰까 싶어 그녀의 머리 위에 날개를 넓게 펼쳐 두었다.

잠들어 있던 시간은 대부분 지루했고, 조금씩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려웠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만약 또 1,000년을 혼자서 견뎌야 한대도, 솔레아를 만났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다만 아무스는 솔레아가 다시 행복한 얼굴로 활짝 웃기를 바랐다.

어떻게 해야 하지?

“……뱀일 때 꼬리를 흔들면 좋아했는데…….”

“뭐, 인마? 감히 누구한테 꼬리를 쳐?”

솔레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도 곤히 자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일어난 아무스는 자신이 날개를 움직이는 바람에 햇빛에 노출된 솔레아의 미간이 좁아지는 걸 보고 얼른 다시 날개를 펼쳤다.

나무 뒤편에서 정령들과 함께 디에르고 공작, 티온, 그레이, 헤이먼이 등장했다.

아무스는 왼손의 검지를 입 앞에 갖다 대고 오른손을 팔랑거리며 모두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급하게 뛰어오던 그레이가 잠든 솔레아를 보고 우뚝 멈춰 서더니 살금살금 걸어와 속닥였다.

‘솔레아는 자고 있는 거야?’

고개를 끄덕거린 아무스가 목소리를 더 낮추라는 의미로 오른손으로 아래를 가리키자 공작이 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픈 곳은 없나?’

‘없다. 하지만 당신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다른 이들도.’

이달론의 목을 가져왔던 솔레아의 모습을 보지 못한 티온은 아무스를 힘껏 노려보며 몸을 낮췄다.

‘왜 네가 막내와 있는 거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아무스가 아무런 말 없이 티온을 노려보자 티온의 눈빛 역시 사나워졌다.

‘신원도 불분명한 자에게 막내를 맡길 순 없어.’

티온이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스릉―

검날이 뽑히는 소리가 들리고,

“으음…….”

솔레아가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곧장 티온의 옆으로 간 그레이가 그의 팔뚝을 꼬집고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댄 채 온몸으로 팔딱거렸다.

‘형! 애 자는데 왜 깨워!’

‘아, 아니……. 쟤 이상한 사람 같아서…… 막내 데려오려고…….’

‘솔레아 깨잖아!’

디에르고 공작은 투닥거리는 두 사람 사이로 걸어 나왔다.

‘우리 집에서 지내지. 자네도 함께 가도 좋다.’

‘난 짝이 원한다면 갈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아.’

‘……아직 딸에게 사과도 못 했네.’

원활한 대화를 위해 아무스 쪽으로 다가가던 디에르고 공작은 실수로 나뭇가지를 밟았다.

빠각.

“아이씨…….”

솔레아의 짜증 섞인 한숨에 모두 서 있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디에르고 공작 또한 나뭇가지를 밟은 상태 그대로 멈춘 채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솔레아가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디에르고는 손짓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두 손으로 열심히 집 모양을 그린 뒤 손가락으로 화살표를 표시하고는 아무스와 솔레아를 함께 가리켰다.

‘집! 가자! 너도! 내 딸도!’

아무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손가락으로 솔레아를 가리킨 뒤, 두 손을 겹쳐서 얼굴 옆에 대며 자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내 짝! 자고 있어! 안 가!’

엉망진창 바디랭귀지에 그레이도 끼어들었다.

팔을 뱀처럼 휘휘 젓다가 아무스가 입고 있는 옷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곤 자신의 머리 위에 뿔을 그린 뒤 따라오라며 손을 까딱거렸다.

‘너 이 뱀 대가리 새끼야! 그거 내 옷이지! 옷 내놔! 따라와.’

‘치사하게 옷으로 그러다니!’

쪼잔한 그레이의 모습에 아무스가 입고 있는 옷을 벗으려 거칠게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대로 훅 벗어 땅에 내던질 작정이었는데 활짝 펼치고 있는 날개 에 옷이 걸려 버렸다. 아무스는 잠깐 당황했지만 이미 풀어 헤친 단추를 다시 채우는 건 멋져 보일 것 같지 않았다.

아무스는 온몸을 곧게 편 채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결국 셔츠 앞섶을 풀어 헤친 나른하고 섹시한 남자가 되어 버렸다.

다시 바람이 불자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벗다 만 셔츠 자락이 팔랑거렸다.

그레이가 이마를 짚고는 관자놀이를 가리킨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너 진짜 또라이냐?’

아무스는 분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큰 꼬리를 꺼내 보였다.

‘나는 용이다!’

‘아무튼, 집으로 오라고!’

‘짝이 안 간다면 나도 안 가!’

안 간다는 입 모양을 본 티온이 검을 다시 힘차게 꺼내려 했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긴 검을 반 정도 뽑아냈을 때, 솔레아가 발로 허공을 차며 짜증이 가득 담긴 말투로 한참 웅얼거리다가 말을 뱉었다.

“아씨, 주말인데 오라 가라…….”

헤이먼이 주먹으로 티온의 팔뚝을 소리 나지 않을 정도로 치며 혼을 냈다.

‘형! 지금 뭐 하는 거야! 솔레아 자는데! 쟤가 얼마나 피곤하겠어! 혼자 이달론 목도 땄는데!’

‘……아니, 난, 그냥 막내랑 같이 집 가고 싶어서…….’

‘그래도! 맨날 일한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던 애가 지금 얼마 만에 자는 건데! 조용히 좀 하자, 어?’

‘그래도……. 막내랑 같이 돌아가야지.’

시무룩한 티온의 목소리에 디에르고 공작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곤 속삭였다.

‘티온 폰 베르고.’

아버지가 자신을 풀 네임으로 부르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티온은 온몸에 힘을 주고 바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네. 아버지.’

‘조용히 해라. 애 자니까.’

‘……예.’

반쯤 꺼냈던 검을 다시 넣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뽑지도 못한 채로 티온은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파충류는 혹시라도 날개가 접혀 미풍이 불게 되어 솔레아가 깰까 봐 날개에 힘을 주고 있느라 쥐가 날 지경이었다.

사람이 아닌 정령들 역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삭막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날개만 파닥거렸다.

그때 바람이 멎었다.

정령들의 팔랑대는 날개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솔레아를 향했다.

솔레아 역시 들었는지 손으로 귀를 퍽퍽 쳐 댔다.

“모기…….”

하지만 이내 솔레아는 다시 잠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디에르고는 혹시 몰라 가져온 물건을 품속에서 꺼냈다.

붉은 표지의 책이었다.

「렘샤 부인의 은밀한 사정」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디에르고가 손짓으로 책과 솔레아를 번갈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거. 솔레아가 좋아하던 책인데. 혹시 몰라서 가져왔다. 좋아하던 책을 읽으면 기억이 날까 해서.’

뒤에 있던 정령들의 날갯짓이 빨라졌다.

“우리 그거 좋아해!”

“우리 다 좋아해!”

“나도! 지금 읽을래!”

갑자기 커진 정령들의 목소리에 다들 화들짝 놀라 솔레아와 정령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제풀에 놀란 정령들은 순식간에 날갯짓을 멈추곤 헤이먼의 머리, 어깨와 팔 위에 내려앉았다.

정령들이 다 앉기에는 자리가 모자라 나머지는 헤이먼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거나 옷을 붙잡은 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다시 아무스를 바라보자 그는 이미 용으로 변해 있었다.

이를 드러내긴 했지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용의 발 사이에서 하품 소리와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으으…… 잘 잤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들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솔레아는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났다.

이왕 일어난 김에, 라는 생각이 베르고 일가의 머릿속을 동시에 스쳤다.

“막내야! 다리 안 아파? 업어 줄까? 높이 던져 줄까?”

“솔레아! 집에 가자! 빌이랑 사라 영애를 불러서 놀자. 다 같이 시장 가자, 시장!”

“아가, 솔레아! 이 책 기억나니?”

“레아, 호수 보러 가자! 나 너 찾으려고 아빠한테 엉덩이도 맞았어! 제일 먼저 나랑 호수 가자!”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섞여서 들린 탓에 솔레아가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그레이가 펄쩍 뛰며 말했다.

“한 사람씩 말합시다! 일단 아빠부터 하세요!”

디에르고가 책을 든 채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레아, 아가. 이 책이…… 물론 나도 믿기 힘들긴 하다만 네가 가장 좋아하던 책이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들고 왔는데…… 혹시 기억나니?”

디에르고가 내민 책을 물끄러미 보던 솔레아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디에르고를 바라봤다.

낯선 것을 보듯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디에르고의 눈에 짙은 후회가 자리 잡았다.

“미안하다, 아가, 우리 딸……. 사과라도, 그저,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공작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는 걸 본 솔레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공작을 끌어안았다.

“레아?”

“저를 다른 분이랑 착각하신 것 같아요. 그래도 울지 마세요. 따님이 슬퍼하실 거예요.”

“……넌 딸인 척 나를 위로한 게 아니었는데, 원래 이렇게 다정한 아이였는데.”

디에르고는 손으로 눈가를 짓누르며 울었다.

솔레아는 소리를 죽이고 우는 디에르고 공작의 등을 토닥이며 아무스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 딸이 나랑 엄청 닮았나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