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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192)

115화

그리고, 그리고…….

긴 꿈에 갇혔어. 너무 길어서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꿈.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나중엔 내 목소리마저 가물가물해지고, 혼잣말에 혼자 대답하는 것조차 지쳐서 말하는 법도 잊었어.

잠든 솔레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아무스는 조심스럽게 손부채질을 해 준 뒤 그녀의 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찡그렸던 인상을 폈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꿈속에서 이달론을 만났는지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검이 우우웅 하며 떨리기 시작했다.

이달론이 만든 꿈은 너무 길어서 ‘아무스’라는 대답을 하고 나서도 완전히 눈을 뜨기까지 또 수십 년이 걸렸다.

물론 그녀가 지나온 몇백 년에 비하면 짧디짧은 시간이었지만.

솔레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잊은 채 눈을 떠 이달론을 마주했다.

“드디어 태어났구나. 날 위한, 내가 만든 신이.”

눈물까지 그렁그렁할 정도로 감격한 이달론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드디어 만들어 낸 거야!”

솔레아는 자신에게 뻗어 오는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 남자는 내가 보이나?’

남자는 히죽거리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많이 어지러워 보이는구나. 여기, 일단 앉으렴.”

남자의 긴 초록색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굽이쳤다. 솔레아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증오나 분노는 여전히 너무 멀게 느껴져 그저 가만히 남자가 잡아 이끄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옳지.”

그는 두 손을 맞부딪쳐 싹싹 비비며 솔레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남자는 들뜬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렸다.

“이름, 이름을 지어 줘야지. 신에게는 이름이 필요하니까. 뭐가 좋을까……. 음, 걱정하지 마라. 너는 인형처럼 앉아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용의 마력을 나눠 갖게 되었으니 영생을 살지도 모르거든. 물론 너의 주인인 나 역시 영생을 살게 되겠지. 다른 놈들의 마력을 뺏을 필요도 없어. 이제 너에게서 마력이 멈추지 않고 솟아날 테니까! 용, 용의 주인을 내가 가지다니. 하하! 이제 사람들은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될 거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용을 우리가 가졌으니까. 흐흐.”

솔레아는 남자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봤던 꿈속의 언덕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에 다시 오자.’

누가 그런 말을 했더라.

곰곰이 생각해 봐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솔레아는 지친 눈을 깜빡였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옆에 긴 흑발의 남자가 가만히 서 있었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솔레아의 곁에 서 있었다.

“손을 이리 주렴. 너와 연결된 용의 마력을 내게 줘. 그럼 내가 네 입을 빌려 용에게 명령하마. 어서, 어서!”

해초 머리 남자가 눈을 번들거리며 입을 벌리고 헤벌쭉 웃었다.

그러나 솔레아가 자신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자 남자는 답답했는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손, 손! 손을 달라고! 제기랄! 이년이 완전 멍청이가 되어 버렸군!”

년?

솔레아의 미간이 살짝 움찔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 더 이상 누구에게도 쌍욕을 들으며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후, 괜찮아. 이 편이 더 나으니까. 아가, 손을 이리.”

아가?

누가 나를 또 아가라 불렀지?

문득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아가라고 부르며 꽃을 선물해 주고, 찻잎을 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뚝뚝 잘린 기억들이 부표하는 쓰레기 조각처럼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썅! 귀가 먹었어?!”

그래도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이 새끼가 하는 욕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해초 머리 남자가 솔레아의 오른손을 빼앗듯 가져가 꾹 잡은 그때였다.

솔레아는 순식간에 왼손에서 검을 만들어 내 이달론의 손목을 베어 버렸다.

“아아아악! 이, 이 미친년이! 네가 누구 덕분에 마력을 가지게 됐는데! 네가 누구 덕에 용을 불렀는데!”

솔레아는 검을 오른손으로 고쳐 쥐곤 발악하는 이달론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검 끝으로 바닥에 주욱 선을 그었다.

카가가강.

바닥에 검이 갈리는 소리에 지저분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검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과 결투할 때, 마치 작은 연필을 든 것처럼 가볍게 움직이던 젓갈…….

젓갈? 왜 젓갈이지?

솔레아는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개구리마냥 펄쩍대며 길길이 날뛰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개같은 년. 분명 그 안에서 몇백 년은 있었을 텐데 아직도 성질머리가 더러워서는.”

솔레아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의 가슴 부근에서 검을 휘둘러 배를 갈랐다.

“으아아악!”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솔레아를 향해 폭죽처럼 쏟아졌다.

발버둥 치던 해초 대가리가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밖으로 흘러내리던 붉은 장기들이 도로 몸 안으로 들어가고, 상처까지 말끔하게 치료됐다.

이달론은 이를 악물고 솔레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이름을 지어 주마. 너의 새로운 이름은…….”

잠깐 고민하던 초록 머리의 입이 다시 열리기 전, 솔레아의 뒤에 서 있는 노란 눈의 남자가 솔레아를 끌어당기더니 품에 안고는 양손으로 귀를 막아 버렸다.

“뭐 하는 거야!”

“난 내 주인을 지킬 뿐이다.”

“네 주인은 이미 자아를 잃었다. 이제 곧 내가 하는 말만 따르게 될 거고.”

이달론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네 새로운 이름은 뷸라다, 뷸라. 고개를 들어 나를 봐라, 뷸라.”

솔레아는 아무스가 귀를 틀어막아 준 덕분에 아무것도 듣지 못해 그저 그의 품에서 눈만 깜빡깜빡하고 있었다.

전에도 이렇게 커다란 남자가 나를 안아 줬는데.

그 남자는 울면서도 기쁘다는 듯 울었는데. 나를 뭐라고 불렀지? 막대기? 막…… 막국수? 막걸리? 막사? 막상막하? 막…….

기억이 안 나. 그래도 누굴 안는 건 기분 좋아.

솔레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팔을 뻗어 자기를 안고 있는 남자를 마주 안았다.

“앗.”

흑발 남자가 당황했는지 그의 손의 힘이 잠깐 풀렸다.

그 순간 이달론이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새로운 이름은 뷸라다! 뷸라, 나를 봐라!”

솔레아는 아무스의 품에서 벗어나 천천히 이달론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 대답하렴. 고개만 끄덕여도 된다. 내가 널 태어나게 한 아버지란다. 아가, 이리…….”

이달론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솔레아는 검으로 다시 그의 몸을 베었다.

하지만 이달론은 순식간에 몸을 치료했다.

솔레아는 검의 크기를 더 키워서 그가 상처를 치료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를 미친 듯이 베기 시작했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넝마가 된 이달론이 바닥에 쓰러지자 피를 뒤집어쓴 솔레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눈을 바라봤다.

수많은 이들의 마력을 뺏어 먹고 산 덕분인지 이달론은 그 상태에서도 죽지 않고서 입을 나불거렸다.

“어떠, 어떻게……. 네 이름, 내가, 내가 불렀는데…….”

잠에서 깬 뒤 줄곧 멍하던 솔레아의 눈이 처음으로 말똥말똥 빛났다.

“이름 구려. 그리고 나 무신론자야. 신 안 믿어.”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솔레아는 검을 높이 쳐든 뒤 이달론의 목을 검으로 내려쳤다.

어찌나 피부가 질긴지 제대로 끊어지지가 않아 가을철에 벼를 타작하는 농부마냥 솔레아는 남자의 목을 몇 번이나 내려쳤다.

“이, 이년. 내가……. 반드시, 돌아와서……. 너를, 그리고 네 애비와 오빠들을…….”

솔레아는 검을 작게 만들어 이달론의 입에 쑤셔 넣은 뒤 그대로 발로 차 버렸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이달론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자 그제야 그의 징그럽던 말소리가 멈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솔레아는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가 이달론의 입에서 검을 빼냈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었지만 왜인지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솔레아는 검을 다시 크게 만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건방진 초록 머리와는 달리 검은 머리 남자는 좋았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거나 욕을 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력이 솔레아와 이어져 있는 탓에 그의 이름만은 각인되듯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아무스.”

“……응.”

“내 이름이 뭐야?”

“넌 곧 기억하게 될 거야.”

“응.”

“공작에게 돌아가야지.”

“공작?”

솔레아의 머리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공작…….”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솔레아가 앞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공작님의 딸은 죽었어요.”

“……그래, 하지만 넌 살아 있어. 지금 여기에. 가자. 돌아갈 수 있어.”

아무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솔레아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반짝거리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검을 휘두르며 난리를 친 통에 손목에서 빠진 시계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언뜻 봐도 제가 차기엔 큰 사이즈라 솔레아는 이달론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발로 차 구석으로 보내곤 시계를 주웠다.

피가 묻어서 시간이 보이지 않았다. 솔레아는 아무스에게 걸어가 피가 묻지 않은 그의 옷자락으로 시계를 벅벅 문질러 닦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네 거야?”

“아니. 네가 아끼던 사람이 너한테 준 거야.”

“나한테? ……왜?”

“너랑 헤어지는 게 아쉽고 슬퍼서 그랬을 거야. 인간들은 이별을 힘들어하니까.”

“이별…….”

아무스의 말을 작게 따라 하던 솔레아가 검으로 바닥을 갈랐다.

딱딱하던 바닥은 천이 찢어지는 것마냥 쉽게 갈라졌다.

솔레아는 어두워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 사이로 시계를 떨어뜨렸다.

“……어디로 던진 거야?”

아무스의 물음에 한동안 가만히 멈춰 서 있던 솔레아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단조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공작님한테. ……왜냐하면 공작님의 딸은 죽었으니까.”

그러고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이달론의 머리를 주워 들었다.

“……이거 보여 주면, 안심할 것 같은데. 이거 들고 가자.”

“어떤 사람들이 안심할 것 같은데?”

“……그냥, 다.”

대충 얼버무린 솔레아는 망설임 없이 검으로 공간을 완전히 찢어 버렸다.

한 줄기의 빛도 없는, 그저 암흑뿐인 공간이었지만 솔레아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무스 역시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찢어진 공간의 틈에서 아무스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본래 용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솔레아는 한참 동안 어둠 속을 걸었다.

우린 언덕에 가고, 파티를 즐기고, 물놀이를 하고, 시장도 가고, 다른 사람들이랑 피구도 하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무궁화는 우리나라 국화인데.

앗. 내 국적이 어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 천지라 솔레아는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갸웃 기울였다.

검은 공간을 다시 한번 찢자 파란 하늘과 초록색 잔디가 가득한 정원이 나타났다.

그곳에 발을 디디자 어떤 남자가 자신을 향해 울부짖었다.

“솔레아!”

‘솔레아라는 사람이 나랑 엄청 많이 닮았나 봐.’

마음속으로 아무스에게 말을 걸었지만 검은 공간 속에서 말상대를 해 주던 것과 달리 아무스는 답이 없었다.

아무스는 낯을 가리는구나.

솔레아는 은발의 남자를 향해 이달론의 머리를 던진 뒤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그대로 말했다.

“공작님의 딸은 죽었어요.”

아, 생각났다.

이 초록 머리가 우리 오빠를 괴롭혔지. 어쩐지, 기분이 나쁘더라.

그제야 이달론을 죽인 타당한 이유가 생각이 나서 그녀는 안심했다.

근데 오빠가 누구더라?

앗, 근데 여기 어디지?

솔레아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찢어 놓은 균열 속 검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가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왔지만 그녀는 마음이 급해 얼른 균열을 닫아 버렸다.

집으로 가야 했다.

아빠 술 사다 놔야 되는데. 안 그러면 혼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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