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솔레아를 찾느라 기사들을 이끌고 밤새도록 칼리바프 항구와 그 주변 지역까지 뒤진 티온은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문을 넘어서 정원으로 향하던 중 헤이먼의 비명이 들려왔다.
“악!”
“미안하다!”
“아악! 엄마악! 솔레아!”
“정말 미안하다, 헤이먼! 의술사를 불러 주마!”
“악! 그레이 새끼야! 아빠 좀 말려!”
“아빠 이제 그만하세요! 헤이먼 죽겠어요.”
“딱 한 번만 더 해 보자. 미안하다, 헤이먼!”
“아빠 진짜 싫어요. 아빠 너무 싫어요! 솔레아가 돌아와도 내가 나갈 거야. 가출할 거라고요! 아니, 독립할 거예요! 악!”
동생의 비명 소리에 놀란 티온이 고삐를 끌고 가던 말에 다시 올라타 저택 바로 앞까지 미친 듯 달려갔다.
“헤이먼!”
“티온, 왔니.”
“혀으어어으엉. 아빠 좀 말려 줘. 흐어엉.”
“……지금 무슨.”
티온의 두 눈동자가 마구 요동쳤다.
기사들은 뒷짐을 진 채 모두 뒤돌아서 있었고 그레이는 디에르고 공작의 어깨를 붙잡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티온을 발견하곤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그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웃통을 깐 아버지가 발버둥 치는 헤이먼의 허리를 왼팔로 단단히 잡은 채 그를 안고 있었다.
자세와 울음소리를 보건대 아마도 엉덩이를 때리고 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다 큰 아들의 엉덩이를 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으셨는데.
“혹시 헤이먼이 또 이달론에게 조종당하고 있, 있습니까?”
“아니, 그놈은 죽었다.”
티온은 공작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길게 널브러뜨린 어떤 이의 머리에 칼이 꽂혀 있었다.
“그, 그럼 왜…….”
“솔레아를 찾아야지. 사라진 정령들이라도 부르려면 이 수밖엔 없어 보였다. 자, 헤이먼. 정말 미안하다. 조금만 더 참으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든 걸 포기한 모습으로 솔레아의 장례식을 준비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알 순 없었지만 어쨌든 좋은 방향으로 바뀐 것 같긴 했다.
……좋은 방향인가?
잠깐 헷갈린 티온은 우선 헤이먼을 아버지에게서 떼어 내기로 했다.
“아버지, 일단 진정하세요. 헤이먼의 엉덩이를 때린다고 해서 솔레아를 바로 찾긴 힘들 겁니다.”
“하지만 정령들을 부를 순 있겠지. 그럼 솔레아가 있는 곳의 단서라도 알 수 있지 않겠니.”
티온의 적안이 잠깐 흔들렸다.
공작보다 훨씬 두툼한 티온의 주먹이 적을 앞에 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형! 형 미쳤어? 형이 때리면 헤이먼 진짜 죽어!”
그레이가 티온을 밀쳐 내며 소리쳤다.
엉덩이가 아프다 못해 터질 것 같았는지 헤이먼이 눈물을 터뜨렸다.
“나 나갈래, 집 나갈래. 흐어엉.”
그때였다.
어디선가 하얀빛이 뿅 하고 아니, 뿅뿅뿅뿅뿅뿅 하고 미친 듯이 나타나더니 정원을 가득 채웠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많은 수의 정령들이었다.
헤이먼의 무의식 속에 있던 기억을 모두 공유한 정령들은 분노에 가득 차 디에르고 공작을 밀쳐 냈다.
“저리 가!”
“아이고, 우리 분홍이!”
“분홍아아!”
“아아, 우리 분홍이를 두고 어디 가는 게 아니었는데!”
“누가 우리 분홍이 때렸어!”
“누가 우리 분홍이 괴롭혔어!”
“흐어엉. 너무 아파.”
정령들이 아끼는 헤이먼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안 그래도 곱게 생긴 놈이 눈가가 빨개지도록 흐어엉 하고 울자 정령들은 가슴이 미어지는지 눈초리가 살벌하게 올라갔다.
“분홍아! 이놈 할까! 저 아저씨 내가 이놈 할까?!”
“분홍이, 울지 마. 뚝! 내가 저 못된 아저씨 때찌 할게!”
헤이먼의 콩알만 하던 영혼을 키워 내서인지 정령들의 눈에는 그가 아직 애처럼 보이는 듯했다.
정령 하나가 허공을 열어 마구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망치는 망치인데 윗부분이 뾰족뾰족 튀어나온, 고기를 다질 때 쓰는 망치였다.
아무래도 인간을 다질 모양이었다.
정령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분홍이 눈물 뚝! 내가 아저씨 이놈 하고 때찌 해 줄게!”
“내, 내 상처부터 치료해 줘. 지금 너무 아파!”
헤이먼이 다급하게 정령들을 붙잡자 정령들이 우르르 헤이먼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호 할게!”
“호야 해 줄게!”
엉덩이를 불로 지지는 것 같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분홍이 이제 괜찮아?”
“이제 아야 안 해?”
“저 아저씨 이놈 할까?”
“때찌 해 줄까?”
정신없이 주변을 날아다니는 정령들의 말투는 누가 들어도 유아를 대하는 것이라 헤이먼은 빨개지는 볼을 감출 수 없었다.
“분홍이 얼굴이 왜 빨갛지?”
“저 난폭한 은발 젊은이 때문에 그렇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헤이먼이 말을 흐리며 슬쩍 디에르고의 눈치를 살폈다.
디에르고 공작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적진 한가운데에서 비밀 작전을 펼치는 스파이처럼 은밀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헤이먼은 이를 악물고 연기를 시작했다.
“솔, 솔레아가 너무 보고 싶어서!”
“……앗, 임시 주인 말이야?”
“임시 주인은 지금…… 자는데.”
“으응, 계속 자는데…….”
“깨우면 곤란할지도 모르는데.”
“기억도 잘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갯짓을 하며 분노를 표출하던 정령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정령들이 곤란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자 헤이먼은 아예 땅에 엎드려 우는소리를 냈다.
“흐어엉. 솔레아 너무 보고 싶어! 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너, 너무 보고 싶, 어! 어, 음, 다신 못 볼 바엔 차라리 죽을래!”
“아이고, 분홍아! 왜 그런 말을 해!”
“분홍이, 그런 말 하지 마!”
“못된 말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 분홍이 어디서 그런 말을 자꾸 배워 오는 거야!”
“당신이 애를 그따위로 키우는데 애가 뭘 보고 자라겠어!”
급발진한 정령이 디에르고의 앞까지 날아가 작은 손으로 그의 은발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우리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 지 자식만 귀한 줄 알고! 내 새끼 속 문드러지네!”
“아! 아, 저기! 정령. 그, 이것 좀 놓고!”
정령이 디에르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걸 본 헤이먼이 이번엔 아예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솔레아 보고 싶어! 으앙!”
“아이고! 분홍아! 떼쓰지 말고!”
“떽. 자꾸 그러면 혼나지요!”
“사람들 많은데 그렇게 떼쓰고 그러면 안 돼!”
“자꾸 울고 소리 지를 거면 분홍이는 여기 살아. 정령은 솔레아 만나러 갈게.”
징징거리던 헤이먼이 억지로 내던 울음소리를 뚝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인들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헤이먼의 어색하고도 앙큼한 미인계에 말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령들은 눈물을 그친 헤이먼을 대견해했다.
“우리 분홍이는 아까 다 컸는데, 너무 똑똑하네!”
“그럼, 누가 키웠는데.”
“애 너만 키웠어? 나도 같이 키웠지!”
“넌 그냥 기분만 냈지. 내가 노래를 몇 시간을 불렀는데!”
“이 자식이!”
정령들이 싸우기 시작하자 그레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집중의 박수를!”
“짝! 짝! 짝!”
파블로프의 개처럼 ‘집중의 박수를’ 소리가 나자마자 박수를 친 정령들이 일제히 그레이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이달론의 머리에 꽂혀 있던 아무스의 검을 뽑아 든 상태였다.
“자, 정령 여러분. 분홍이가 또 울고 떼쓰기 전에 솔레아 찾으러 갑시다.”
“아. 참!”
“맞아, 맞아.”
“까먹을 뻔했네!”
“인간들이 가기엔 추운 곳이니까 다들 옷 두툼하게 갈아입고 와!”
“분홍이 목도리도 하고, 발에 양말 두 겹 신어!”
“분홍이 모자도 쓰고 와!”
“은발 젊은이는 지금 그 상태로 가도 돼.”
“응. 눈발이 좀 날리긴 한데 괜찮아. 얼어 죽기 딱 좋아.”
“아무튼 다들 얼른 들어가서 옷 챙겨 입고 와!”
정령들이 정원에 있는 사람들의 등을 떠밀었지만, 티온은 혹시 몰라 정령들과 함께 남아 있기로 했다.
솔레아가 선물해 준 양모 망토가 있으니 안에 옷을 더 껴입을 필요가 없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간 베르고 일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디에르고 공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헤이먼. 엉덩이는 괜찮니? 정말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덕분에 정령들도 불렀고 솔레아도 찾으러 가게 됐잖아요.”
“그래……. 그, 저기.”
“네, 말씀하세요.”
“……미워서 때린 건 절대 아니고, 너보다 솔레아를 더 사랑한다는 것도 아니고…….”
“예, 알아요.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던 거니까.”
그때 조용히 계단을 오르던 그레이가 진지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분홍이 옷 혼자 갈아입을 수 있어? 내가 도와줄까?”
“꺼져.”
목에서부터 귀까지 빨개진 헤이먼이 그레이의 머리를 밀쳤다.
“분홍이 단추 채울 수 있어요?”
“좀! 하지 말라고! 꺼져! 가서 네 옷이나 입고 와!”
“분홍이 양말 두 개 신고 와라!”
“그레이. 장난 그만 치고 얼른 방에 가서 옷 입고 나오렴. 분홍이 너도, 아, 실수.”
“……아빠가 제일 나빠요.”
“방금 네 보호자인 정령들한테 고기처럼 다져질 뻔했으니 용서해 주렴.”
곧 솔레아를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공작은 몇 시간 전보다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베르고의 공작과 공자들이 옷을 두툼하게 입고 나타나자 아가 불곰의 손을 잡고 정원을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부르던 정령들이 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자, 가자!”
“분홍이 눈 꼭 감아. 어지러울 수도 있어!”
“아가 불곰도 눈 감아! 실명해!”
“처형도 눈 꼭 감고 있어야 돼!”
“은발. 눈 떠.”
“……아까 일은 반성하고 있으니까, 으아악!”
정령들은 디에르고 공작이 말을 마치는 것조차 기다려 주지 않고 한 번에 이동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디에르고는 이번 생에서 정령들에게 신임을 받긴 그른 듯했다.
정령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를 건드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 *
긴 잠을 자던 솔레아가 눈을 떴다.
여전히 높이 솟아 있는 산들의 능선이 먼 곳에 수묵화처럼 떠 있는 구름들 사이로 보였다.
그런데 분명 환한 낮인데 이상하게도 주변이 커튼을 친 것처럼 어두웠다.
몸을 돌려 누우니 햇빛을 가려 주고 있는 검은 날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깼어?”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솔레아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이 더 행복했다.
“괜찮아, 더 자도 돼.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남자가 등을 다독여 주며 말했다. 솔레아는 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솔레아는 얼굴이 지워진 어떤 남자들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
화려한 파티를 즐겼고, 거기서 작은 체구에 귀여운 를 만났다. 그녀의 오빠인 은 단순하지만 밝고 쾌활한 성격이라 같이 있으면 참 재밌었다.
함께 있을 때면 심장이 쫄깃해지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웃음이 나는,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고풍스러운 미인인 도 있었다.
그 여자는 자꾸 제게 곁에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친구 하자며 자기를 라고 불러 달라고 했었는데.
하녀인 은 아침에 머리를 손질해 줄 때마다 고심하며 머리 모양을 바꾸곤 했다.
이 많은 드레스를 두고 왜 자꾸 바지를 입냐며, 바지는 운동하실 때만 입어 달라고 하기에 솔레아는 하루 종일 정원을 걸으며 서류를 읽었다. 결국 하녀인 이 의자를 들고 정원으로 뛰쳐나와 자기가 잘못했으니 앉아서 일 보시라고 빌었다.
마침 지나가던 기사 가 ‘아가씨께서 밖에서 일을 보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큰오빠인 이 우리 막내는 그런 짓 안 한다며 불같이 화를 내더니 기사의 멱살을 잡아 몸을 들어 올리곤 그대로 사라졌다.
가끔 님과 같이 차를 마시곤 했는데 님은 오늘 하루가 어땠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자신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했다.
그러면 님은 배를 잡고 웃으며 네가 뭘 했든 잘한 거니 걱정 말라며 다정하게 말씀해 주시곤 했다.
재밌었어.
자고 있는 솔레아의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