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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3/192)

113화

디에르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굽혀 시계를 주워 들었다.

자신이 솔레아의 손목에 직접 채워 준 시계라는 걸 단번에 알아챈 그는 벌떡 일어서서 주변을 살폈다.

“솔레아?”

“아빠, 왜 그러세요?”

“솔레아가 근처에 있어.”

그레이의 어깨를 꾹 잡았다가 놓은 디에르고가 또다시 길거리를 헤매며 소리쳤다.

“솔레아! 솔레아, 아가!”

“왜 그러시는데요, 아빠! 이 시계가 뭔데요.”

“내가 그 아이를 원래의 세계로 보내기 전에 준 건데…….”

그레이에게 대답을 하면서도 디에르고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온 거야. 다시 여기로 온 거야. 그 아이가 왔어.”

온몸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디에르고의 자안에선 미묘한 광기를 띤 희망이 흘렀다.

그레이는 공작이 손에 꾹 말아 쥐고 있는 시계를 물끄러미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헤이먼과 아버지가 몸 안에 남아 있던 이달론의 마력을 모두 토해 낸 것도, 아무스가 사라진 것도, 이 시계가 다시 돌아온 것도…… 이달론이 더 이상 다른 힘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면요? 아무스와 솔레아를 통해 완전해져서…… 솔레아를 죽.”

“그레이.”

저택 밖으로 뛰쳐나온 뒤 처음으로 디에르고의 시선이 똑바로 그레이를 향했다.

“강한 아이니…… 그렇지 않을 거다.”

그레이의 머리 위를 짧게 쓰다듬은 공작의 두 눈에 금세 살기가 들어찼다.

“만약 그렇다면…… 내 딸의 시계를 내게 돌려보낸 걸 후회하게 해 줘야지.”

미동도 없이 부릅뜨고 있는 눈에서 맑은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디에르고의 잇새로 이를 악무는 아드득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시계의 유리가 깨졌는지 작은 파열음과 함께 디에르고의 주먹 사이로 흘러내린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내 손으로 딸을 사지로 보낸 대가는 그다음에 치르마.”

그때 말을 탄 기사들이 허겁지겁 몰려왔다.

“공작님! 지금 저택으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

“그게…… 저…….”

난처한 듯 말을 더듬으면서도 간절히 바라보는 기사의 다급한 눈빛에 디에르고와 그레이는 빠르게 말에 올라타 저택으로 돌아갔다.

디에르고는 손에 쥔 시계를 놓지 않은 채 한 손으로 말을 몰았다.

공작저의 커다란 대문을 넘자마자 공기가 무겁게 바뀌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것 같았다.

어디선가 그르릉 하는 짐승의 깊고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종이가 찢어지듯 균열이 생기며 그 사이로 피 냄새가 잔뜩 풍겨 왔다.

“……무슨.”

오른손에 커다란 검을 쥔 이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균열 사이로 걸어 나왔다.

온몸이 검붉은 피에 물들어 있었지만 그 사람은 솔레아가 확실했다.

디에르고와 그레이는 말에서 뛰어내려 그곳으로 달려갔다.

“솔레아!”

하지만 솔레아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짙은 보라색 눈동자로 청명한 하늘과 공작저의 넓은 정원을 둘러보던 솔레아가 왼손에 움켜쥐고 있던 동그란 구체를 디에르고 쪽으로 내던졌다.

툭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구체가 공작의 발치로 데구르르 굴러왔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무덤에서 캐 온 시체처럼 시커먼 낯빛에 얼굴 여기저기에 빈틈없이 주름이 자리한 머리에선 고름이 터진 것 같은 악취가 진동했다.

“윽!”

멀찍이 떨어져 있던 기사들마저 코를 감싸 쥔 채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칼로 여러 번을 내려쳤는지 목의 살점은 덜렁거렸고, 벌겋게 핏줄이 늘어진 두 눈에선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이의 것이었다.

하지만 곱슬거리는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적어도 그가 아는 사람 중엔 하나뿐이었다.

이달론.

공녀님이 위대한 마법사의 목을 베고 돌아오셨어.

기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디에르고의 눈은 오직 솔레아만을 향하고 있었다.

“……솔레아?”

디에르고의 부름에도 그녀는 온몸에서 피 냄새를 풍기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때, 찢어졌던 균열 사이에서 커다란 머리가 쑤욱 빠져나왔다. 매끄럽게 빛나는 검은색의 커다란 비늘들과 높이 솟아오른 뿔, 옆으로 찢어진 긴 주둥이, 샛노란 눈.

용이었다.

그르릉―

시커먼 용이 목을 진동시켜 울자 솔레아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균열로 향했다.

“솔레아? 솔레아!”

“솔레아! 야! 어디 가!”

디에르고와 그레이의 외침도 들리지 않는 듯 성큼성큼 걷던 그녀는 균열의 바로 앞에 다다라서야 뒤돌아섰다.

“공작님의 딸은 죽었어요.”

“뭐?”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솔레아는 다시 균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넓게 벌어져 있던 틈이 서서히 좁아져 갔다.

“기다, 기다려라! 솔레아! 솔레아, 어디 가는 거야!”

디에르고는 미친 듯이 달려 닫히기 일보 직전의 균열 안으로 오른팔을 집어넣었다.

손에 쥐고 있던 시계도 균열 속에 떨어뜨리곤 겨우 솔레아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균열은 닫혀 버렸다.

“끄, 아아아악!”

어깨 아래로 잘린 팔에서 피가 폭포처럼 흘렀다.

뒤에서 그레이와 다른 기사들이 소리치며 의사를 부르고, 상처를 감쌀 천을 가져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공작은 방금 전까지 균열이 있었던 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허공을 허우적대며큰 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솔레아! 아가! 솔레아, 아직 거기 있니! 몸은, 몸은 괜찮니?”

하지만 용과 함께 사라진 아이가 대답할 리 만무했다.

디에르고는 옷이 엉망이 되는 것도 아랑곳 않은 채 핏물이 고인 흙바닥을 기며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아가? 솔레아. 네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아가. 내가…… 아빠가 이기적이라서, 나 힘든 것만 보느라…… 네 이름 하나 물어보지도 않고. 아가야……. 아가.”

공작의 두 눈에서 솟아난 눈물이 몇 갈래로 나뉘어 뺨을 타고 줄줄 흘렀다.

“아가. 딸아. 솔레아와의 추억을 모른다고 해서 너에게 화내면 안 됐는데. 그냥 네게 물을걸. 여기 와서 어떤 음식이 제일 맛있었는지, 어떤 날 제일 행복했고, 또 어떨 때 서운했는지 물을걸. 아가. 아가야…….”

“아빠! 치료하셔야 돼요! 아빠!”

저택 안에서 헤이먼과 다른 하인들이 한꺼번에 달려 나와 피를 쏟아 내고 있는 디에르고를 붙잡았다.

“아버지를 붙잡아! 물! 물 가져오고! 천! 묶을 거!”

공작은 다친 몸으로도 다른 이들을 떨쳐 내곤 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첫 번째 딸은 죽은 줄도 모른 채로 살고, 두 번째 딸은 내 손으로 죽였구나. 하하, 하하하…….”

한숨 같은 웃음을 연신 뱉던 공작이 왼손으로 제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얼굴이 시뻘게지다 못해 입술이 터질 때까지 디에르고는 쉬지 않고 얼굴을 때렸다.

“아빠! 그만하세요!”

헤이먼과 그레이가 온몸으로 매달려 막자 공작은 그제야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하하! 하하하!

잔디밭에 누워서도 공작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무언가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사지로 몰아 죽였구나. 아가야.”

그레이가 온몸으로 공작을 눌러 압박했다.

“천, 천 빨리 가져와! 깨끗한 물이랑!”

똑바로 누운 채 바라본 하늘은 아주 맑고 쾌청했다.

보라색 눈동자에 비친 하얀 양털 구름을 바라보며 디에르고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이런 아빠는 없지. 그럼, 이런 아빠는 있어선 안 되지.”

공작은 왼손으로 그레이의 검집에 꽂혀 있던 아무스의 비늘로 만든 검을 뽑았다.

디에르고는 제 목을 노렸지만 팔이 하나뿐인 데다 온몸을 그레이에게 압박당하고 있어 찌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레이는 두 손으로 디에르고의 손목을 붙잡고 내리눌렀다.

“묶을 거! 묶을 거도 가져와! 아빠,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솔레아 살아 있잖아요! 찾으러 가면 되잖아요! 찾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는데! 아빠! 제발! 좀!”

그때 폭풍 같은 바람이 불어와 디에르고를 누르고 있던 그레이와 헤이먼을 날려 버렸다.

회오리바람 속에 갇힌 공작은 검으로 땅을 디딘 채 겨우 일어섰다.

검신이 길어 바깥쪽에서 안으로 단번에 베야 할 것 같았다.

디에르고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미안해, 에일린. 난 당신만큼 잘 안되네.”

그때 회오리바람 속에서 용이 나타났다.

정확히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아무스가 나타났다.

“젊은이.”

“……솔레아는?”

“짝은 잠들었어.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내 딸 앞에서도 옷을 벗고 다니나?”

아무스는 멋쩍은 듯 공작의 시선을 피했다.

급하게 인간으로 변신하느라 옷을 챙겨 입지 못했다.

“……그, 그것보다 일단 자네 팔부터 고쳐 주지. 그 검은 치워. 내가 만든 검에 젊은이의 피를 묻힐 생각은 없으니까.”

천천히 걸어온 아무스가 팔이 절단된 공작의 어깨에 대고 입김을 불자 시커먼 연기가 그 주변을 감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오른팔이 다시 생겨났고, 그가 부순 시계마저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시계를 내려다보던 공작이 곧장 떠나려 하는 아무스의 손목을 잡았다.

“솔레아가, 아이가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어도 사과라도 하고 싶다. 만나게 해 다오.”

아무스는 난처한 듯 눈썹을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난 짝이 이겨 낼 거라고 생각해. ……당신과 처형들이 짝이 강해지도록 만들어 줬잖아.”

그 말을 끝으로 아무스는 사라졌고, 동시에 회오리바람도 잦아들었다.

“아버……지, 팔이…….”

디에르고는 피에 젖은 땅과, 잠깐 찢어졌다가 흔적도 없이 다시 붙어 버린 허공과, 그리고 방금 전의 일들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땅을 구르고 있는 이달론의 머리를 하나씩 눈에 담았다.

“그레이, 네 말이 맞다.”

“네?”

“솔레아를 찾아서 미안하다고 말해야겠어.”

“……어, 예. 네, 그러셔야죠. 멀쩡히 살아 있는 애 장례를 치를 뻔했으니까. 아니, 물론 몸이 약했던 솔레아의 장례식은 우리끼리 하고요……. 건강……하다 못해 적의 목을 베고 용이랑 같이 다니는 솔레아 장례는 치르지 말고.”

당황했는지 횡설수설하는 그레이를 보던 공작이 근처에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방금 일어났던 일에 대한 얘기가 이 저택 밖으로 새어 나가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다.”

“예!”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도 모두 함구해라.”

“……예?”

디에르고 공작은 입고 있던 검은 셔츠를 순식간에 찢어발겼다.

그러곤 용의 검을 든 채 이달론의 머리 앞으로 걸어가 위에서 그대로 찍어 내렸다.

시체에서 검은 피가 튀어 공작의 하얀 얼굴에 점점이 흔적을 남겼다.

허리를 편 공작은 핏방울이 맺힌 얼굴로 헤이먼을 바라봤다.

“헤이먼.”

“예, 아버지.”

무겁고 진지한 공작의 목소리에 헤이먼 역시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디에르고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자 오랜 시간 조용히 잠들어 있던 근육들이 크게 움직였다.

“헤이먼, 엉덩이 대라.”

“예. ……네?”

당황한 헤이먼과 다른 이들이 일제히 공작을 바라봤지만 디에르고의 무뚝뚝하고 차가운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공간의 틈을 열고 다니니, 우리가 아무리 찾아도 절대 찾지 못할 거야. 그럼 오게 해야지.”

“근, 근데 왜 저를…….”

“그 변태는 솔레아가 1순위인 것 같지만 정령들은 널 아끼는 것 같더구나.”

“……아, 아버지. 어머니가 아이들은 때리면서 키우면 안 된다고 했는데요.”

“소리 크게 지르렴.”

“아버, 아빠. 아빠, 잠깐만요. 아빠. 솔레아가 때리는 거랑 아빠가 때리는 거랑 같아요?”

그레이가 다급하게 말리려고 했지만 디에르고의 눈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긴 다리를 쭉쭉 뻗어 금세 헤이먼의 앞에 도착한 디에르고는 헤이먼을 잡고 뒤로 돌려세웠다.

“싫, 싫어요. 아빠. 잠깐만요. 아니, 왜, 왜 저를, 엉덩이를 왜.”

“여기는 살이 많아 때려도 뼈가 안 부러진단다.”

“그딴 말 다정하게 하지 마세요. 지금 뼈를 부러뜨릴 각오로 제 엉덩이를 때리시겠단 말씀이세요?”

“미안하다, 헤이먼. 이 악물 거라.”

디에르고는 아무스가 붙여 준 오른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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