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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2/192)

112화

가끔 대문이 열리면 커다란 마차가 저택을 드나들었고, 때로는 아는 얼굴들이 그 앞을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중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의 코앞까지 다가간 적도 있지만 기사들 또한 그녀가 아닌 저 멀리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기사들도 모두 바뀌고, 낡아 버린 공작가 마차의 바퀴가 빠져서 갈아 끼우는 걸 구경한 적도 몇 번이던가.

공작가의 하얗던 대문엔 이제 녹이 슬어 버렸다. 그녀의 머리도 시들듯이 잿빛을 띤 흰색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렇게 된 후로도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

오랜 시간 동안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던 탓에 등이 굽었다. 볼품없이 엉킨 하얀 머리카락 사이에선 어떤 공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존재였다.

노파는 굽은 등을 애써 세우고 무릎을 부여잡은 채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곤 걷기 시작했다.

익숙하던 골목의 상점들은 모두 사라져 길을 알아보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계속 걸었다.

거울에도 모습이 비치지 않아서 자세히 살필 순 없었지만 흐린 시야로 보이는 몸은 삐쩍 곯아서, 이젠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은 그녀조차도 스스로를 기억하기 힘들었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닐까.

내가 누구지.

‘나’는 뭐였더라.

그리움도 원망도 모두 사라진 자리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기본적인 욕구가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이젠 그것조차도 모두 사라졌다.

칼로 찌르듯 배를 쑤셔 오던 굶주림도, 차라리 목구멍을 갈라 버리고 싶을 만큼 일던 갈증도, 손가락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가며 혼잣말을 하던 긴 외로움도 잊혔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텅 빈 상태가 되고도 달라지는 것이 없어 그녀는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걸음을 옮기고 있음에도 감각이 무뎌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언덕에 올라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음이 편안했다.

노파는 천천히 바닥에 누운 뒤 몸을 옹송그려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잔디의 느낌이야 당연히 느끼지 못한다 해도, 내 피부의 감촉만은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젠 그 감각마저 희미했다.

사라지는 거구나.

노파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 읽을 수 있겠니?”

노파는 아이처럼 몸을 동그랗게 만 채로 빙긋이 웃었다.

“이걸 읽을 수 있겠니?”

이젠 눈도 잘 안 보여서 모르겠어요.

노파는 속으로만 답했다. 말하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다.

다만 뭔가 알 수 없는 불쾌감에 노파는 도리질을 치며 다시 눈을 떴다.

다행이다.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여전히 그 언덕이었다. 그녀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노파는 다시 긴 낮잠에 빠졌다.

왜 이곳이 이렇게 좋을까.

오랫동안 멈춰 있던 노파의 머릿속이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이곳에선…… 다시…… 있거든. 뭐, 꾸며 낸 이야기지만…… 경치가 아름다우니까…….’

다정한 목소리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또 불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젠장, 아직도 멀었나?”

노파는 간만에 들려온 ‘소리’에도 둔감했다. 그저 조금 짜증스러웠다.

노파의 잠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노쇠한 몸뚱이는 잠자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것처럼 계속 잠만 잤다.

불어오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으니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우주에 있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자다가 눈을 뜨니 밤이었다. 바람이 부는지 잔디들이 흔들렸고 반딧불이들이 별처럼 날아오르자 은하수가 흐르는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듯…….

어?

노파의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든 것이 사라진 머리 한구석에서 몇 개의 얼굴들이 떠오르더니 일제히 입을 열었다.

‘다음에 다시 오자.’

누구야?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여기가 어디야? 나는 누구지?

때마침 남자가 다시 물었다.

“이걸 읽을 수 있겠니?”

노파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스.”

그 순간 노파의 세상이 무너졌다. 아름답던 밤하늘과 동그란 언덕도.

“잘했다. 넌 내가 만들어 낸 가장 완벽한 신이야.”

만족스럽다는 듯 남자는 크게 웃었고, 붉은 머리 여자는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 속에 갇힌 채 멀뚱히 서 있었다.

* * *

솔레아가 사라진 지 3주째였다.

그 아이가 말한 대로 솔레아가 사라진 뒤 이달론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솔레아를 살려 주겠다는 약속 또한 지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인지 불같은 분노는 일지 않았다.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 솔레아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젠 그 아이마저 떠났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두 번째라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세 번째일 수도 있겠구나.

디에르고는 바람구멍이 생긴 것처럼 시린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시신도 없는 딸의 장례식을 준비했다.

아들들은 레아의 장례를 치르는 것을 반대했지만 어쨌든 진짜 솔레아가 죽은 것은 사실이고, 그다음에 찾아와 준 아이도 원래 세상으로 보내 주었으니 이젠 정말 장례를 치러야 할 성싶었다.

디에르고가 검은 옷을 입던 중 헤이먼이 노크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니.”

“오늘 장례식을 치르면, 나중에 솔레아 돌아왔을 때 뭐라고 하실 건데요.”

“그 아이는 갔어.”

“인사도 없이 갈 애가 아니라고요! 이달론이 빼돌린 거예요! 아버지한테 솔레아를 살려 주겠다고 주둥이를 놀려 놓고는 마법진으로 솔레아를 없앤 뒤에 그 새끼도 사라졌다면서요! 게다가 아버지도 갑자기 항구에 나타나셨고요!”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건 그 아이를 집에 돌려보내는 거였으니 괜찮다.”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꺄악! 여기 웬 남자가 빨간 목줄을 찬 채 헐벗고 있어요!”

“신입! 소리 지르지 마! 그레이 도련님이 키우시는 남자야!”

헤이먼이 분을 이기지 못한 얼굴로 다시 공작을 노려봤다.

“저 뱀은 어떻게 설명하실 건데요? 걔가 진짜로 돌아갔으면 쟤도 우리 집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진작 사라졌어야 되는 거잖아요. 정령들도 아직 그대로 있다고요!”

“아끼는 이를 잃은 건 알겠지만 헤이먼, 가 버린 사람은 결코 돌아오지 않아. 붙잡고 있으면 너만 힘들어진다.”

“……아버지는 어머니랑 솔레아를 잃은 충격 때문에, 아버지 곁에 찾아온 다른 딸을 버리신 거예요.”

“헤이먼!”

공작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크게 외쳤지만 헤이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공작의 잇새로 아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답지 않구나, 헤이먼.”

“이제야 저다워진 거예요. 아버지가 보내 버린 그 솔레아 덕분에요.”

헤이먼은 더 이상 공작과 대화하기 싫다는 듯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 버렸다.

티온과 그레이, 헤이먼은 칼리바프 항구뿐 아니라 베르고 영지 전체를 이 잡듯 찾아다녔지만 솔레아도, 이달론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저택 안의 다른 사람들 역시 갑자기 공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솔레아의 전담 하녀였던 앤은 충격에 일까지 그만뒀다.

앤은 저택을 떠나던 날, 눈물에 젖은 얼굴로 공작을 찾아왔다.

‘아가씨가 좋아하시던 책인데, 이걸 드려도 되나 싶었지만……. 그래도 공작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게, 흑, 맞는 것 같아요.’

‘……그래. 두고 가렴.’

그 아이의 물건이라 보는 것조차 힘겨워 받자마자 서랍 안에 넣어 두고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다.

공작은 홀로 방 안을 서성였다.

또다시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헤이먼. 다시 말하지만.”

“나다. 젊은이.”

“……젊은이라고 부르지 마라.”

옷을 말끔히 차려입고 온 검은 머리 남자는 태연하게 방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나는 오늘 장례식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인간도 아닌 것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으니 원래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젊은이는 가족이 뭐라고 생각해?”

“……하.”

공작은 짜증 섞인 얼굴로 남자를 돌아봤다.

“내가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든! 그게 뭐가 중요해! 이미 가족을 잃었는데! 남은 자식들은 내가 걔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고!”

남자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조금은 징그럽게 느껴졌다.

아무스는 공작에게로 걸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젊은이. 나는 계속 기다릴 거다. 짝이 끼어들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음, 자네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무슨 소리야?”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아무스가 공작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짝을 버리지 않았어. 짝은 제 발로 갔으니까.”

“뭐라고?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그 아이를 불렀고……. 이달론에게 부탁해서 보냈으니까……. 잠깐만. 그 아이가 가기로 선택한 거라고? 알고 있었다고?”

“걱정 마. 짝은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 당신이 자길 그자한테 넘길 거란 걸 알면서도.”

“……무슨, 무슨 말이야. 넘기다니? 넘기다니!”

그 순간 아무스가 사라졌다.

평소처럼 대화 도중에 뱀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 버렸다.

“이봐, 이봐!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아이가 알고 있었다니!”

디에르고는 허공을 향해 외치다가 갑자기 치미는 욕지기에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손수건을 꺼낼 새도 없이 디에르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구토를 시작했다.

그런데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은 음식물이 아니라 초록색의 진득한 점액질이었다.

헤이먼이 이달론에게 조종당했을 때 뿜어냈던 초록색 마력과 같은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던 머릿속이 멀끔해졌다.

오늘만 세 번째로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레이가 헤이먼을 등에 짊어지다시피 한 채 들어왔다.

“아버지! 형이 솔레아한테 맞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초록색 토를 해요. 건강에 문제 있는 거 같은데! 의사 불러야 되는 거 아닌, 어, 아버지까지…….”

“내려 줘, 나 이제 멀쩡하니까.”

헤이먼은 그레이의 등에서 내려와 공작을 바라봤다.

“전 조금 전보다 개운해졌는데, 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디에르고는 멍하니 제가 토해 낸 흔적과 방을 둘러본 뒤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입은 검은 셔츠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못한 채 시선을 들어 올렸다.

“……솔레아. 솔레아를 찾아야 한다.”

디에르고는 미친 사람처럼 문을 가로막고 서 있던 아이들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지. 그땐 충분히 납득이 갔던 감정들이라서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제정신이라면 절대로 그자를 믿었을 리 없는데.

내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흠칫 놀라던 아이를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낼 생각을 하다니.

아빠라고 부르는 걸 유독 힘겨워하던 아이였는데.

디에르고는 말을 탈 생각조차 못 하고 정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솔레아! 솔레아, 어디 있니!”

디에르고는 넓은 정원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아가! 솔레아!”

자신을 말리는 기사들을 모두 뿌리치고 대문 밖으로 뛰쳐나간 디에르고는 한참 동안 길 위를 달렸다.

“솔레아! 레아! 아가, 제발!”

저택 근처를 벗어난 디에르고 공작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언제나 단정하던 디에르고 공작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버지!”

말을 타고 빠르게 쫓아온 그레이가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디에르고의 팔을 붙잡은 그레이가 그를 다시 저택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디에르고가 힘껏 뿌리치는 바람에 몸이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디에르고는 다시 앞으로 뛰어가 주변을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솔레아, 미안하다. 너를 버린 게 아니야. 아가. 솔레아!”

디에르고는 곁을 스쳐 가는 사람들 모두를 밀치다시피 하며 계속 나아갔다.

그중 덩치 큰 남자가 디에르고와 부딪쳐 뒤로 밀려났다.

온몸이 땀에 전 거지꼴을 하고 있으니, 베르고 공작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남자의 입에서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아씨, 뭐야!”

디에르고는 멍하니 눈을 크게 뜨고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마구 중얼거렸다.

“딸이, 내 딸이 사라졌다. 머리카락은 새빨갛고, 눈은 날 닮아서 보라색이야. 그, 그리고 피부가 희다. 키는 이만하고, 웃을 때 왼쪽 눈꼬리보다 오른쪽 눈꼬리가 더 높이 올라간다. 그건, 바뀌기 전엔 안 그랬는데 바뀌고 나서부터 그랬다. 그래, 맞아. 그랬지. 다른 사람이었어. ……그 딸이 없어졌어. 솔레아가……. 그 애가 날 보고 웃었는데, 나를 아빠라고 불렀는데……. 내가, 내가 그 아이를 다시 보냈어. 내가.”

미친 사람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는 디에르고를 본 덩치는 질겁하며 그를 뿌리치고 도망치듯 멀어졌다.

“아빠! 정신 차리세요!”

뒤따라온 그레이가 디에르고를 다시 붙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레이, 아이가 사라졌어. 내가 보냈다. 내가 보낸 거야. 솔레아를 잃은 게 슬퍼서, 그거 때문에 정신이 없는 바람에, 그 아이도 보내 버렸다. 잘못도 없는 애를. 겁이 많은 아이였는데. 아빠를 무서워했는데. 내가 그 곁으로 보낸 거야. 내가…… 내 이 손으로 그 아이를 떠민 거야.”

그때 누군가의 발에 채었는지 작은 금속 물체가 디에르고의 앞으로 굴러 왔다.

공작이 솔레아에게 채워 준 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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