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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1/192)

111화

단시간에 연달아 두 번이나 이동을 해서 그런지 구역질이 치밀었다.

솔레아는 한참을 휘청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아 속에 있는 것들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먹은 게 많지 않아 나오는 것도 없었다.

“우, 우웨엑! 으, 허억, 허억.”

사방을 뒤흔들던 진동이 멎은 후에야 솔레아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한 장소였다.

떠나온 지 오래됐지만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는 곳.

집이었다.

엄마가 떠나곤 다신 돌아오지 않았던.

아빠와 단둘이서 살던.

술에 취해 소주병을 들고 달려들던 아빠를 밀치고 도망쳐 나온.

그 집이었다.

사람 하나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작은 현관의 오래된 나무 신발장. 그 옆의 다 떨어져 나간 시트지가 달랑달랑 붙어 있는 체리색 싱크대.

헐거워진 노즐 때문인지, 걸핏하면 싱크대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내가 그냥 콱 죽을까! 어?!’ 하고 위협하던 아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싱크대 수도꼭지에선 여전히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빠가 집어 던진 뒤로 늘 다리가 빠지는 접이식 나무 좌탁도 그대로였다. 그 위에 줄지어 놓여 있는 초록색 소주병도.

그녀는 얼른 제 손과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희고 곱던 솔레아의 손은 어디로 갔는지, 습진에 걸린 그녀의 손 곳곳엔 붉은 반점이 퍼져 있고, 약지는 어디에 잘못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벌겋게 부어 있었다.

손등과 손가락 마디마디에 자잘한 흉터가 가득했다. 오래되어 검게 변색된 것도 있고, 아직 딱지가 앉아 있는 것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시야에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진짜로 돌아온 거야?”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로 다가가려는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퍼 마셔 댄 탓에 숨을 내쉴 때마다 입에서 쓴 내음이 풀풀 퍼졌다.

“……뭐야. 언제 온 거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집 안 가득한 습기로 인해 꿉꿉해진 장판에 발을 디디는 소리가 들렸다.

“이년이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어깨를 잡은 두꺼운 손에 저절로 몸이 움찔 떨려 왔다. 매서운 손길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또 밀까?

또 벽으로 밀치고 밖으로 도망칠까?

눈 질끈 감고 전처럼 아빠를 밀치고 나가면 되는데. 그러면……. 그러고 나면.

어깻죽지를 잡은 힘에 의해 몸이 돌려지자마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시야에 초록색 소주병이 들어왔다. 아빠가 들고 있는 소주병 안에는 3분의 1 정도 남은 투명한 액체가 가증스럽게도 찰랑거렸다.

그녀는 아버지를 밀치려다 말고 말했다.

“저 다신 여기로 안 돌아올 거예요.”

“뭐야?!”

“저 지금 집 나갈 거고, 다신 여기로 안 와요. 오늘이 아빠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에요.”

아버지가 소주병을 높이 들어 올리며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이년이! 아빠 앞에서 건방지게!”

“그만 좀 하세요! 이제, 제발 좀! 이렇게 소리 질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요……. 남들 다 하는 거, 그 많은 것 중에 하나만이라도 저랑 해 주실 수 있었잖아요!”

아버지의 손에서 소주병을 뺏어 든 그녀는 남아 있던 소주를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술 줄이세요. 저 가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여기선 나가야 했다.

그대로 불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몇 년 만에 제대로 보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덤벼들진 않았다.

간이 많이 상했는지 낯빛은 전보다 더 시커메졌고, 본래 흰색이었을 눈은 이젠 그저 누렇기만 했다.

작은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돌린 그녀는 문을 마저 열었다.

몸이 완전히 문밖으로 나가기 전,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게 아닌가?”

“……뭐?”

뒤돌아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굽은 등으로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던 아버지가 허리를 곧게 편 채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분명 똑같은데 말이야.”

“……누, 누구. 아니 뭐 하는 짓이야.”

현관으로 다시 들어선 그녀가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자 문이 힘없이 툭 닫혔다.

아버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싱크대로 걸어가 빈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아니면 이건가?”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금세 다시 아버지의 것으로 돌아왔다.

“이 건방진 년이! 아빠가 말하는데 어디 가!”

소주병을 들고 달려드는 아버지의 번들거리는 광기 어린 눈은 그녀에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는 신발도 벗지 못하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막아섰다.

“뭐? 다신 안 봐? 오늘이 마지막? 애비 밀치고 도망친 년이! 너 살인 미수야! 근데 뭐라고?”

아버지의 벌어진 입 새로 끔찍한 말들이 새어 나왔다.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역겨운 술 냄새를 풍기며 허연 침을 마구 튀기면서 말하는 모습이 과거 아버지가 화낼 때와 똑같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있는 힘껏 밀쳐 냈다.

“악! 이년이 또 날 밀치네! 야아악! 딸이 아빠 죽인다! 죽인다아아! 딸년이 애비 죽인다!”

거실에 나동그라진 아버지가 온몸을 뒤틀며 발버둥을 쳐 댔다.

미친 사람처럼 펄떡대는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손끝, 발끝에서까지 심장이 뛰는 것처럼 온몸이 쿵쿵 울려 댔다.

그녀는 아버지가 놓친 소주병을 주워 들곤 그걸로 싱크대를 힘껏 내려쳤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몸 위에 올라타 왼손으로 멱살을 잡은 뒤 오른손에 쥐고 있는 깨진 소주병을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우리 아빤 그딴 말 안 해. 나랑 우리 엄마가 살려 달라고 꿱꿱 소리 지를 때도 이 동네 사람들은 잠잠했거든. 그걸 알고 때리던 사람이 그딴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분을 이기지 못해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가 갑자기 괴성을 멈췄다.

거칠게 들썩이던 아버지의 가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남자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아, 그래? 몰랐네.”

진한 갈색이던 아버지의 눈이 게슴츠레 감기더니 씨익 반으로 접히며 눈꼬리가 올라갔다.

“공녀님께서 이런 걸 무서워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뭐라고?”

남자의 눈동자가 제 앞에 들이밀어진 예리한 소주병 조각으로 향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벽으로 날아갔다.

쿵,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친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

“공녀님이 이리 멀쩡하시면 내가 너무 곤란해요.”

“으, 으윽…….”

어떻게든 일어서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는데 하필 그곳에 박살 난 소주병이 있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걸 안 무서워할 줄은 몰랐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땐, 넌 이 공간, 이 사람, 이날들을 가장 무서워했는데 말이야.”

“이달론…….”

아버지의 얼굴을 한 남자가 몸을 숙이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남자의 입이 열리고 디에르고 공작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흑흑.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렴. 술 취한 애비가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흑흑. 네가 곁에 있어 준 덕분에 행복했다. 잘 가렴!”

억지로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고 울상을 지은 남자가 잔뜩 과장하며 디에르고 공작이 했던 말에 욕설을 섞어 따라 했다.

“……이 새끼가.”

“네 말이 맞아. 난 너를 집으로 돌려보내 줄 수도 없고, 그 딸년을 살릴 수도 없어. 하지만 이렇게 네 집을 똑같이 만들어 줬잖니. 네가 사랑하는 공작님이 원하던 대로 너를 네 가족의 곁으로 돌려보내 준 거야.”

그녀는 오른손으로 깨진 소주병 조각을 쥐고 곧장 남자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남자는 급히 얼굴을 피했지만 왼쪽 뺨에 얇고 붉은 선이 생겨났다.

“우리 딸이 싸가지가 없네. 아빠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지랄하지 말고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지나 말해.”

“지금은 안 돼. 네가 모든 기억을 다 잊고, 가진 모든 걸 다 잃고 나면.”

“뭐라고?”

“다시는 못 돌아가게 해 주마. 마력이 없는 네 몸은 내 차지가 되는 거다. 그러면 그 어마어마한 용이 가진 마력도 내가 가질 수 있겠지.”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이달론은 그녀의 머리채를 쥐곤 벽을 향해 밀쳤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니 아주 공을 들일 거야. 그다음엔 자랑스러운 내 딸이 되어 주렴.”

미처 욕을 내뱉기도 전에 몸이 갈가리 찢기는 감각에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시야가 좁아지며 눈에 보이는 세상이 흑과 백으로 나뉘더니 한순간 퓨즈가 나가듯 온통 컴컴해졌다.

눈을 뜨자 작은 시장의 뒷골목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과 머리색을 보아 하니 한국이 아니라 베르고로 돌아온 것 같았다.

돌아오다니, 웃기기도 하지.

원래 여기가 집이었던 사람도 아닌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달론이 한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가 뭔가 이상한 걸 꾸미고 있단 걸 알았으니 막아야 했다.

공작님께 이달론을 어디서 어떻게 찾았는지 여쭤보고, 본거지로 쳐들어가야지.

“저기, 베르고 공작가가 어느 쪽이에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지만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한 채 지나갔다.

몇 번을 물어도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이었다.

빈곤가에서나 볼 법한 거지꼴을 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무시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향했다. 이제야 익숙한 길이 나타났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 공작가의 대문 앞에 도착했다.

“어기, 페이온! 문 좀 열어 줘요.”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은 묵묵히 서 있을 뿐 그녀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겠지만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공작님께 이달론을 만났다고 전해 줘요.”

기사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제발!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요! 난 돈이나 구걸하러 온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지난 몇 달간 같이 지냈던 솔레아라고 하면 공작님이 아실 거예요. 말만 전해 줘요. 어기! 페이온!”

어기도, 페이온도 가만히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페이온!”

목에 힘을 주고 소리치며 페이온의 팔을 붙잡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그녀는 기사들을 지나 대문까지 걸어갔다.

그녀가 부랑자의 모습이라 무시했던 거라면 앞을 가로막았을 텐데 기사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녀는 어기의 뒤로 가서 그의 검을 잡았다.

손이 검 손잡이를 통과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검이 뽑히지도 않았다.

영혼만 남은 것 같았다.

“……솔, 솔레아의 몸은 어떻게 된 거야? 내 영혼만 여기 남았어? 그럼 솔레아는?”

다시 대문으로 향한 그녀는 양손으로 하얀 대문을 쥐고 열심히 뒤흔들었다. 하지만 대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람만도 못한 존재였다.

커다란 대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작님! 티온! 헤이먼! 그레이! 아무스! 얘들아! 정령들아! 앤!”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껍데기는 없이 영혼만 베르고로 돌아온 그녀는 공작가 대문 앞에서 며칠을 지새웠다.

가끔 마차가 드나들었지만 그녀는 달리는 마차를 세울 수도 없었다.

대문이 열린 틈을 타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대문 너머로 들어갈 수 없어 그녀는 공작가 앞에서 여러 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서 근처 식당에 들어갔지만 음식을 집어 올릴 수가 없었다. 빵 한 조각조차 씹지 못했다.

그녀는 굶주린 채로 많은 날을 보냈다.

바닥에 글씨조차 쓸 수 없어 그녀는 공작가의 대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조용히 소리 내어 아는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잊지 않으려고.

“디에르고 공작님, 티온, 헤이먼, 그레이, 아무스, 앤, 라트엘, 이안, 돈, 사라, 빌, 카라샤펠 전하, 마리에, 맬다, 휴, 에이본, 칼, 올리브, 데론, 어기, 페이온, 사일린, 조쉬, 론…….”

이름을 수만 번 외우는 동안, 낮과 밤이 수천 번 반복됐다.

그녀의 검던 머리카락은 그사이 희게 세어 버렸다. 흉 많은 손가락 마디마다 주름이 지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몸은 시체처럼 앙상해졌다. 손을 몸 위에 올리면 손바닥 아래로 몸속의 뼈들이 선명하게 만져졌다.

그래도 그녀는 죽지 못했다.

다만 더 이상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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