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아무스는 뒤에서 누가 쫓아오든 말든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한 팔로 솔레아의 등을 감싸고, 다른 한 팔로는 솔레아의 다리를 안았다.
“짝. 나를 안아. 그래야 안 떨어지지.”
“……잠, 잠깐만. 너무 높은데. 흐, 으아아악!”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오를 때마다 눈앞이 캄캄해져 솔레아는 아무스의(정확히는 그레이의) 코트 깃을 꼭 말아 쥐었다.
놀이공원 한 번 간 적이 없어서 이렇게 높은 공중에 몸을 띄운 건 처음이었다.
“야, 야! 좀, 낮, 낮게 가!”
“너는 무섭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짝은 훨씬 담대하고 멋진 사람이니 마음을 차분히,”
“지랄 말고 천천히 가라고!”
솔레아가 코트를 잡고 있던 손을 겨우 놓고 아무스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
“땅으로 가고 싶다고!”
“짝, 그렇게 잡으면 아파.”
“땅! 땅으로! 땅! 새끼야, 땅!”
아무스는 솔레아의 애원에도 아랑곳 않고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다시 공중으로 단숨에 날아올랐다.
“꺄아아악!”
솔레아의 비명 뒤로 군대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쫓아왔다.
“막내야!”
“이 뱀 대가리 새끼!”
“레아!”
“아갓쒸!!”
“고흥녀어어니이임!!”
아무스는 머리채가 뜯기는 와중에도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여유롭게 말했다.
“짝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대단한 사람이야.”
“내려 달라고오옥!”
“목소리도 커. 멋져.”
“이 새끼 뱀이라서 사람 말을 못 하나?! 내가 내리라고 몇 번을, 아아악! 너 죽여 버릴 거야!!”
근 한 시간 가까이 말없이 달리던 아무스는 칼리바프 항구에 도착해서야 솔레아를 땅에 내려놓았다.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용이야.”
솔레아의 탐스럽던 붉은 머리칼은 바람에 휘날려 봉두난발이 되었고, 그녀의 손에는 뽑아 놓은 아무스의 검은 머리카락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솔레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용 같은 소리 하네. 좆같은…….”
그 말에 상처받았는지 아무스가 어깨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나 진짜 용인데……. 마력만 온전히 되찾으면 내가 짝의 힘이 돼 줄 수 있는데. 본모습 보여 주고 싶은데…….”
“다리나 오므려.”
“인간 모습은 오랜만인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악! 좀!”
아무스가 활기차게 제 허리에 손을 올렸고 솔레아는 눈을 감고 주먹을 내질렀다.
미간을 직격으로 맞은 아무스가 뒤로 쓰러졌고, 솔레아는 그 틈을 타 옆구리에 차고 있던 정령들의 회초리를 꺼냈다.
“이 새끼! 내가! 걸어가자고! 차라리 말을 타자고! 천천히 가자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옷은 또 왜 코트만 훔치고! 이왕 훔칠 거면 바지까지 입든가!”
“아! 아프, 그건 나한테 아픈 건데! 내가 바지를 훔치면 처형은 바지 없는데. 아야, 짝! 짝!”
“짝, 짝 같은 소리 하네. 짝, 짝 소리 나게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 짝, 아니. 솔레아, 이, 이보게! 제발! 아야!”
“이놈 시키! 뱀 시키!”
“나 용이야! 짝. 아니, 그게 아니고, 임자!”
“임자? 이이임자아아? 너 몇 살이야!”
“악! 이제 진짜 아파!”
인적이 드문 뒷골목이었지만 아무스의 고통 섞인 비명에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저게 뭐여, 세상에.”
알몸에 코트만 걸친 남자를 두들겨 패고 있는 여자를 보곤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엄마! 저 사람 아무것도 안 입고 있어요!”
“아니야, 저, 저거, 어른들의 눈에만 보이는 옷을 입은 거란다.”
아이의 눈을 가린 젊은 여자는 얼른 집으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한참 후에야 솔레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회초리를 다시 옆구리에 매달았다.
“야, 다른 사람들 어디 있어?”
아무스가 너무 빨리 온 탓인지 아직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고 있어, 우리가 너무 빨리 와서……. 근데 짝은 왜 그렇게 힘이 세?”
“집에 가려고 매일 두세 시간씩 근력 운동을 했으니까 그렇지. 너 잠깐 여기서 기다려. 그 꼴로 돌아다닐 순 없으니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낸 솔레아는 골목을 빠져나와 근처의 상점에서 아무스가 입을 셔츠와 바지를 구매했다.
칼리바프 항구의 부랑자들은 솔레아의 비싼 옷가지에 눈독을 들였지만 아무도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대장, 저 사람 비싼 옷 입은 거 보니까 귀족인 거 같은데, 뺏자!”
“저거도 뺏어 입은 옷일걸? 아까 저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 옷 다 뺏고 미친 듯이 패는 걸 네가 못 봐서 그래. 조용히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솔레아는 차분히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여긴 치안이 정말 좋네.’라는 생각이나 하며.
아무스는 솔레아가 기다리라고 했던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다소 시무룩한 얼굴로 그는 정령들에게 얘기했다.
“얘들아……. 짝이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
“주인! 너무 낙심하지 마!”
“내가 그렇게 싫은가? 높이 날면 기분 좋아지니까 그렇게 한 건데…….”
“주인이 아직 매력을 보여 준 적이 없잖아! 주인이 왕 크고 멋진 용인 걸 알면 임시 주인도 반할 거야!”
“……용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 자꾸 뱀이라고 부르고……. 나는 짝 만나서 너무 좋은데. 계속 기다렸는데.”
아무스는 손에 쥔 짧은 나뭇가지로 흙바닥을 콕콕 찌르며 긴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정령들은 당황했는지 아무스의 어깨 위로 날아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때 곰곰이 생각하던 정령이 손바닥을 짝 맞부딪치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회초리로 때린 건 좋은 신호야!”
“……왜?”
“임시 주인은 사람을 길들이는 걸 좋아하거든!”
“……정말?”
“응! 우리가 임시 주인하고 꽤 오래 같이 지냈잖아!”
아무스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정령들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정말이야! 임시 주인은 황녀도 길들이고, 노예도 길들였어! 그, 그리고 분홍이도 욕하면서 길들였고! 또, 또 누가 있지?”
“기사들을 회초리로 때렸잖아! 그때 기사들이 다 엄청 순종적이었잖아! 그건 임시 주인이 회초리로 길들여서 그래!”
“아무튼 진짜야!”
아무스가 그제야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행이다, 날 싫어하는 건 아니었구나.”
그때 솔레아가 옷을 들고 걸어왔다.
“짝!”
아무스는 큰 눈을 접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갔다 왔어?”
“네 옷 사러. 옷 입어. 자.”
“응!”
짝이 날 위해 옷을 사 왔네!
아무스는 빠르게 코트를 벗어 던졌고 솔레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 내가 졌다. 눈 감고 있을 테니까 옷 빨리 입어.”
솔레아가 사 온 옷을 입으며 아무스는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짝은 안 져. 한 번도 진 적 없어.”
“조용히 해, 옷이나 빨리 입고. 넌 뱀일 때가 훨씬 낫다. 조용하고, 귀엽고.”
“……난 뱀일 때도 용일 때도 사람일 때도 짝이 제일 좋아.”
옷을 다 입은 아무스는 아직도 눈을 꼭 감고 있는 솔레아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짝, 뽀뽀하고 싶어. 해도 돼?”
“너 힘 되찾으면, 헤이먼이 이달론이랑 맺은 계약도 없앨 수 있어?”
“나 뽀뽀해도 되냐고 물었는데.”
솔레아는 감았던 눈을 뜨고 아무스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헤이먼을 그자에게서 완전히 떨어뜨려 놓을 수 있냐고. 정령들이 마력을 키워서 살려 두긴 했지만 아직 이름의 계약이 있잖아.”
“계약자가 사라지면 계약은 무효가 되지. 어차피 그자는 자연의 이치보다 훨씬 오래 살아온 인간이니까 죽여도 상관없어.”
솔레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아무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럼 너 내가 부르기 전까진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
“응, 나 기다리는 거 잘해.”
“공작님이 나를 이달론에게 넘기더라도.”
“……그건 왜?”
“우리 오빠들 다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지. 다들 어깨에 많은 짐을 짊어진 인생이었잖아.”
“그걸 왜 짝이 해……?”
앞서 걷던 솔레아가 뒤돌아보며 말끔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걸 위해서 여기 온 거 같거든.”
그 순간 솔레아가 땅 밑으로 훅 꺼지듯 사라졌다.
“솔레아?”
허공에 뻗은 아무스의 손은 굳어 버렸고, 골목은 정적에 휩싸였다.
이윽고 도착한 베르고 형제들은 아무스에게 솔레아가 어디로 갔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럼 아버지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지만 이젠 디에르고 공작의 기척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네가 데려갔으면! 네가 책임을 졌어야지, 이 쓰레기 새끼야!”
흥분한 그레이가 아무스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쳤다.
“그만해, 그레이. 지금은 아버지와 솔레아를 찾는 게 먼저야.”
헤이먼이 그레이를 아무스에게서 떼어 놓은 뒤 정령들에게 공작님과 솔레아의 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티온 역시 항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향했다.
“지금부터 이 지역을 샅샅이 뒤져서 공작님과 공녀님을 찾아라. 머리카락 한 올도 놓치지 마.”
“예!”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들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 * *
천천히 눈을 뜨자 눈이 부실 정도의 새하얀 방 안, 커다란 마법진 위였다.
갑자기 바뀐 풍경에도 솔레아는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바닥뿐 아니라 벽까지 가득 채운 붉은색 마법진에선 마력 때문에 번쩍이는 광채가 흘렀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수척한 얼굴의 공작이 들어왔다.
지난 며칠 동안 혼자서 이달론을 찾아 헤매고 다녔는지 늘 윤기가 흐르던 공작의 은발은 빛을 잃고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공작님!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밥은 안 드셨어요?”
“내 걱정은 말고…….”
말끝을 흐린 공작은 솔레아의 얼굴을 그리운 듯 가만히 보다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이달론을 만났다.”
솔레아의 손을 맞잡은 공작은 그녀의 작고 마른 손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너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솔레아의 몸이 비어서,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하더구나.”
“공작님. 저는…… 어딜 가든 괜찮아요. 하지만, 솔레아는…….”
“그래, 죽었지. 나도 안다. 하지만, 하지만 방법이 있다면 해 봐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설령 솔레아가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공작은 고개를 들어 애써 웃어 보였다. 그는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돌덩이를 뱉어 내듯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아랫입술을 벌벌 떨다가 겨우 말했다.
“너는 돌아가야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에게서 널 뺏어올 수 있겠니. 나 좋자고 남의 자식을 붙잡아 놓을 순 없지. 너도 누군가에게 귀한 딸일 텐데…….”
공작은 손목시계를 끌러 솔레아의 얇은 손목에 채워 주었다.
시곗줄을 아무리 줄여도 헐렁거리자 공작은 눈물 젖은 얼굴로 멋쩍게 웃었다.
“급히 나오느라 이것밖에 줄 게 없구나.”
솔레아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공작의 눈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피했다.
이달론은 솔레아를 결코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마력이 없는 이 몸을 갖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실험을 해 왔는지 알고 있으니까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달론을 만나 아무스의 힘을 되찾아 주고, 헤이먼과 맺은 계약을 끊어 내야만 했다.
솔레아는 공작이 채워 준 시계만 묵묵히 바라봤다.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렴. 다들 널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다.”
가족이 없다거나, 공작님과 함께했던 베르고에서의 날들이 제 평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공작은 이번엔 두르고 있던 넥웨어를 풀더니 솔레아의 목에 둘러 주었다.
“날이 쌀쌀해졌는데 좀 따듯하게 입고 오지 않고.”
딸의 몸을 차지한 망할 년이라고 욕을 했다면 마음이 좀 편했을 텐데.
이 미련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다정했다.
“……너도 편지 한 통 쓸 수 없는 곳으로 가는구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지만 공작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흐트러진 솔레아의 머리를 정리했다.
“아가, 내 걱정은 말고…… 이젠 네 걱정만 하면서, 그리 살렴.”
공작은 솔레아를 꼭 안고 등을 다독이며 속삭였다.
“네가 곁에 있어 준 덕분에…… 행복했다. 잘 가렴, 아가.”
곧이어 기묘한 감각이 솔레아의 몸을 휘감았다.
그때 다른 이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게 해 달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적어도 공작님께 대답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솔레아는 아주 오래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