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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109/192)

109화

쪽지를 읽은 헤이먼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해 버렸다.

“이딴 걸 믿었어?”

손에 쥔 쪽지가 구겨질 정도로 주먹을 말아 쥔 헤이먼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생판 남인 우리한테도 그렇게 다정하셨던 아버지가 진짜 이런 걸 남기셨다고 믿는 거냐고!”

흥분한 헤이먼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외쳤다.

“이달론 짓이야! 이번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달론이 아버지한테 무슨 짓을 한 거라고. 빨리 그자를 찾아서……. 아니, 아버지 먼저 찾아서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

“헤이먼!”

그레이가 헤이먼의 말을 끊고 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달론이 네 몸에 들어가서 아버지께 직접 말했어. 솔레아를 살릴 수 있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신 거야.”

“거봐, 이달론이 아버지를 밖으로 빼낸 거잖아! 그자가 아버지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거야! 이딴 쪽지를 믿었어?”

헤이먼이 그레이의 멱살을 잡고 소리 질렀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근데 왜 나가시는 아버지를 못 막았어! 왜! 바로 아버지를 찾지 않은 거냐고!”

“네가 쓰러져 있었잖아, 이 새끼야!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고! 그대로 두면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너부터 살려야 될 거 아냐!”

“내가 뭐가 중요해! 아버지가, 아버지가 이 베르고인데! 난 원래부터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악!”

어디서 꺼낸 회초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령 중 하나가 회초리를 들고 헤이먼을 후려쳤다.

손바닥만 한 정령이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헤이먼을 노려봤다.

“우리가 널 어떻게 살렸는데! 무슨 마음으로 네가 살아나길 기도했는데! 그런 못된 말 하지 마!”

“뭐?!”

헤이먼이 거칠게 되묻자 정령이 놀란 얼굴로 그를 보다가 바닥으로 포르르 날아가 주저앉았다.

다른 정령들도 그 옆으로 날아가 다 함께 훌쩍이기 시작했다.

“에구, 자식새끼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키워 준 정령 앞에서 죽는다는 소리나 하고…….”

“우리가 너무 오래 살았어, 너무 오래 살았다구.”

“머리 분홍색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아이고, 풍진세상아. 이제 이 한 몸 가야지, 가야지.”

외양이 젊다 못해 어릴 정도인 정령들이 다 같이 모여 그런 소릴 하고 있으니 이상했지만, 더 이상한 건 콕콕 찔려 오는 헤이먼의 양심이었다.

“……미안해.”

바닥에 쪼그려 앉은 헤이먼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하자 정령들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다신 그런 말 하면 안 돼, 분홍아.”

“으, 응.”

헤이먼의 대답을 들은 정령들은 대견하다는 듯 그의 머리 높이까지 날아 올라와 분홍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소중한 분홍이. 나쁜 말 하면 혼나.”

“……응.”

그 순간 정령 하나가 날개를 빠르게 움직이더니 솔레아 앞으로 날아갔다.

“임시 주인! 찾았어!”

“잘했어.”

영문 모를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솔레아가 대답했다.

“정령들이 헤이먼의 머리에서 나오자마자 내가 공작님을 찾아 달라고 했거든. 이달론은 힘들어도 공작님의 흔적을 찾는 건 쉬우니까.”

“응! 우린 그런 거 잘 찾아!”

“응! 우린 인간 잘 찾아!”

“그럼!”

“맞아!”

“임시 주인이 대신 책 마음껏 읽으라고 해 줬어!”

“무슨 내용이냐면, 읍!”

“애기 앞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설레발치는 정령의 입을 틀어막은 다른 정령들이 일제히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모두 헤이먼을 바라봤다.

“애기는 아직 이런 거 몰라도 돼!”

티온이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애기?”

그레이 역시 팔짱을 낀 채 머리를 기울였다.

“……헤이먼이 애기…….”

말은 못 하지만 아무스도 머리를 기울였다.

쉬익……?

볼이 빨개진 헤이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빨리 아버지 찾으러 가야지, 뭐 해!”

“분홍아! 같이 가!”

“……응, 가자.”

“아가 불곰, 우리도 어깨에 태워 줘!”

티온이 검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고, 정령들 역시 그를 따라 나갔다.

그레이는 바닥에 질질 끌리는 아무스의 목줄을 쥐었다.

아무스는 솔레아와 함께 가겠다는 듯 온몸으로 솔레아의 다리를 휘감았다.

“아, 좀! 따라오라고! 너 왜 남의 동생 다리를 자꾸 잡냐고!”

“그레이, 그거 동물 학대야.”

헤이먼이 정색하고 말했지만 그레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 새끼 짐승이야.”

“어, 그래. 짐승이니까 동물 학대라고.”

“아니! 얘가 자꾸 솔레아 침대 위로 올라가서 잔다고! 자꾸 솔레아 방에 들어가고!”

“뱀이 그럴 수도 있지! 난 왜 네가 뱀을 데리고 다니는지가 더 이해 안 가는데!”

“나중에 설명해 줄게! 아무튼 야, 빨리 안 놔?”

쉬익! 쉬익!

씩씩거리며 솔레아의 다리를 기어 올라가던 아무스는 결국 그레이에게 머리를 잡힌 채 들려 나갔다.

모두가 나간 뒤에야 솔레아는 헤이먼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넌 안 가도 돼, 헤이먼.”

“왜?”

“그 사람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을 거잖아. ……무섭고, 징그럽고, 끔찍한 기억이니까.”

헤이먼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솔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겁을 먹어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솔레아는 어색하게 팔을 뻗어 헤이먼을 안아 주었다.

“……내가 네 동생이 아니어도, 그때 했던 말은 그대로야. 난 널 지킬 거고, 절대 다치게 하지 않아. 그러니까 헤이먼, 넌 무섭고 싫은 거 굳이 안 봐도 돼.”

헤이먼은 느리게 두 팔을 올려 솔레아를 어깨를 잡고 품에서 떨어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곤 솔레아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처럼 마구 헝클어뜨렸다.

“무, 무슨!”

솔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헤이먼을 올려다봤다.

그는 전에 없이 활짝 웃고 있었다. 분명 계속 누워 있었는데 헤이먼의 얼굴에선 빛이 날 정도로 생기가 넘쳐흘렀다.

“나보다도 작은 게 내 앞에서 멋진 척하네. 걱정 마, 나 안 무서워.”

“아니, 그래도…….”

“괜찮아. 그 사람이 노리는 건 너라며.”

“뭐? 넌 이제 괜찮으니까 안 무섭다, 상관없다 그 소리야?”

“왜 도끼눈을 뜨고 봐, 그 뜻이 아니라.”

헤이먼은 맑은 분홍색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짓고는 솔레아를 당겨 안았다.

“이제 내가 널 지키겠다는 뜻이지.”

“……안 무서워? 이달론을 끔찍하게 싫어했잖아.”

“음…… 누가 그랬는데, 어떤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못하지만 다른 행복한 기억으로 그걸 덮을 순 있대.”

헤이먼은 멍하니 굳어 있는 솔레아를 떼어 내곤 다시 외투를 걸쳤다.

그러고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물잔을 들어 벌컥벌컥 물을 마시곤 호기롭게 말했다.

“네가 만들어 준 행복한 기억이 있는데 고작 이달론한테 굴할 순 없지.”

빈속인 헤이먼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었는지 주방에서 감자를 들고 온 정령들이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아이고, 내 새끼! 다 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우리 강아지, 이제 장가가도 되겠다.”

“콩알만 하던 게 총각이 다 됐네! 아이고, 세월 빠르다.”

“……너, 너흰 대체 왜 자꾸 그런 소릴 하는 거야.”

헤이먼은 벌게진 얼굴로 감자를 받아 들고는 솔레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무튼 가자, 솔레아.”

솔레아는 제 손을 잡고 앞서 걷는 헤이먼의 등을 멀뚱멀뚱 보며 따라 걸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자 벌써 말을 끌고 정원 끄트머리까지 간 티온과 그레이가 옥신각신 싸우고 있었다.

“형 솔레아 태우고 전속력으로 달려 봤냐고!”

“응!”

“이럴 때만 목소리 크게 하네! 스테파니가 솔레아를 좋아해서 그래. 그냥 내가 태우고 갈게!”

“아니!”

“아, 좀! 형! 형은 덩치가 크잖아! 말 죽는다니까!”

“괜찮아!”

“악! 그렇게 괜찮으면 형은 헤이먼 태워!”

“아니!”

“왜! 내가 솔레아 데리고 간다니까!”

“막내가 겁이 많아서 혼자 말 못 타.”

“그러니까 내가 데려간다니까! 헤이먼도 말 잘 못 타!”

“나이가 몇인데 못 타!”

티온의 말을 들은 헤이먼은 시무룩한 얼굴로 솔레아의 손목을 놓았다.

힝.

정령들이 헤이먼의 옆으로 날아와 그를 다독였다.

“우리 분홍이는 말 못 타는 거 아닌데!”

“자주 안 타서 안 익숙한 건데!”

정신없는 와중에 기사들까지 말을 끌고 나타났다.

이달론이 마력을 쓰면 속수무책이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몇 명을 데리고 갈 모양이었다.

맬다가 선뜻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솔레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녀님이 이 말을 타고 가시면 제가 앞에서 뛰면서 고삐를 끌겠습니다!”

“아니, 급해서 그럴 시간은 없고…….”

당황한 솔레아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그동안 자주 피구를 하며 친해진 에이본이 솔레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 타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의 말에 그레이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야! 솔레아!”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아버지가, 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기사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 전력인데! 네가 거길 타면 어떡해! 이리 와, 내가 태워 줄게! 나랑 같이 타자!”

평소에 솔레아와 자주 농담을 주고받던 기사 휴가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오더니 말에서 뛰어내렸다.

“아가씨! 그럼 제 말을 타고 가실래요? 그레이 도련님이 저보다 강하시니까 도련님 말을 타는 것보다 저랑 가시는 게…….”

휴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티온이 사람을 찢을 것처럼 새빨간 눈을 빛내며 솔레아의 뒤에 서 있었다.

휴의 귓가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는 사람을 검으로 베지만∼ 불곰은 사람을 맨손으로 찢지요∼’

흠칫 놀란 휴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노래를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신인가?

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닙니다. 저는 너무 소중해서 저는 그냥, 예. 그냥, 혼자 탈래요. 저, 저 누구랑 같이 못 타요. 사람 알레르기가 있어요.”

그때 누군가가 솔레아의 허리를 팔로 둘러 안았다.

“짝, 나와 함께 가지.”

말을 마친 남자는 높이 뛰어올랐다.

“악! 저 남자 바지 안 입고 있어!”

“맨몸에 코트만 걸치고 있잖아!”

“목줄도 차고 있어!”

“공녀님이 변태한테 잡혀갔다!”

기사들이 기함을 하며 소리쳤다.

노란 눈의 남자는 솔레아를 안아 든 채로 도저히 인간의 움직임이라곤 볼 수 없는 높이와 거리로 뛰어올랐다.

그레이와 티온은 곧장 말에 올라탔다.

정령들이 그들의 귓가로 날아가 속삭였다.

“주인님이 그러는데 공작은 지금 칼리바프 항구에 있고, 임시 주인이랑 같이 가시겠.”

“죽인다.”

정령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용히 읊조린 티온이 검을 뽑아 든 채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레이 역시 검을 앞으로 빼 들고 당장이라도 아무스의 목을 벨 것처럼 달려 나갔다.

“한눈판 사이에 내 코트를 훔쳐 입어?! 가만 안 둬! 뱀 대가리 새끼!”

헤이먼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아까 봤던 그 ‘뱀’이라고 짐작했다.

똑같은 빨간 목줄에 검은 머리카락,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진 노란 눈. 정령도 봤는데 뱀이라고 사람이 못 될 게 뭔가.

하지만 눈치가 빠르다고 해서 분노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감히 누굴 안아!”

헤이먼은 휴의 말을 뺏어 타고는 미친 듯이 아무스를 쫓았다.

정령들이 다급하게 세 사람을 말렸다.

“얘들아! 저 사람 우리 주인인 거 알지?”

“까먹은 거 아니지?! 임시 주인을 나쁜 곳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란 말이야!”

“너희 다 아는 거지?”

셋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솔레아!”

마치 전쟁에 참전하는 듯 세 형제의 뒤로 기사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갔다. 본래 계획했던 수보다 훨씬 많았다.

공녀가 변태한테 잡혀갔다는 소리를 들은 다른 기사들마저 훈련을 하다 말고 말을 끌고 와 뒤를 쫓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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