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서서히 눈을 뜬 헤이먼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손수건과 얼굴에 큰 흉터가 난 험상궂은 고동색 피부의 남자였다.
“으, 아아악!”
“힉!”
티온이었다.
“……형?”
“헤이먼, 정신이 들어?”
“형! 깜짝 놀랐잖아. 그 손수건은 뭐야!”
“너 입술이 말라서……. 물을 먹여 줄 수가 없으니까,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술을 축여 주면 좋다고 해서…….”
티온은 멋쩍은 얼굴로 웃었고 헤이먼은 마음 깊이 반성했다.
십몇 년을 같이 산 형인데 얼굴을 보고 놀라다니.
“고마워, 형.”
“아니야. 몸은 괜찮아?”
커다란 손으로 저를 일으켜 주는 티온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나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눈가에 진한 다크서클이 있었고 얼굴이 전보다 많이 수척해 보였다.
“형, 근데 내가 쓰러졌어? 왜 기억이 안 나지? 며칠이나 지났어?”
“열흘.”
“……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가 먼저 말해. 어쩌다가 쓰러진 건지.”
“반쯤 잠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어……. 그것 말고는, 잘 모르겠어.”
“이달론이 한 짓이야.”
헤이먼의 눈이 커졌다.
이달론이 제 몸을 직접 조종한 적은 여태 없었다. 더군다나 티온이 이달론의 이름을 대놓고 거론하며 그가 한 행동을 ‘짓’이라고 표현할 줄은 몰랐다.
헤이먼은 떨리는 눈으로 티온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형, 어디, 어디까지 알고 있어?”
티온은 특유의 무심한 눈으로 헤이먼을 내려다봤다.
새빨간 눈동자에 비친 그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티온은 가만히 헤이먼을 보다가 커다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도 너한테 화낸 적 없어. 겁먹지 마.”
“어?”
그때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레이와 솔레아였다.
“형 너는 무슨 잠을 그렇게 자냐.”
“헤이먼, 괜찮아?”
티온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 헤드에 겨우 몸을 기대앉은 헤이먼은 믿기 힘들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뿌옇게 번지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너 왜 울어? 오랜만에 일어나서 배고파서 울어? 오빠, 가서 죽 좀 가져와.”
“죽이 뭔데?”
“수프! 수프! 묽은 수프!”
“넌 꼭 지가 못 알아들을 말 해 놓고 나한테 못 알아듣는다고 성질내더라.”
“막내는 착해. 성질 안 내.”
“형은 얘 방금 성질낸 거 보고도 그런 말을 해? 형 눈은 뒀다가 뭐해. 귀는 왜 달린 거야?”
“큰오빠한테 말 그따위로 하지 마! 헤이먼 왜 우는데, 응? 내가 사람들한테 네 얘기 말해서 그래? 그게…… 사정이 있었어. 나도 너한테 말할 것도 있고.”
“거 뭐, 큰일이라고.”
“그레인마! 넌 심각성이란 게 없어?”
“너 왜 자꾸 남의 이름을 교묘하게 욕으로 바꾸냐? 너야말로 아까 뱀이 네 다리 위에서 똬리 틀고 있는데 왜 화 안 냈냐?”
“그거야말로 뭔 큰일이라고! 그냥 뱀이잖아!”
“이게 어떻게 뱀이야! 사람이지!”
“그레이, 막내한테 소리 지르지 마. 그리고 헤이먼도 방금 눈 떠서 정신없을 거야. 조용히 해.”
“형은 왜 나한테만 그래?”
왁자지껄한 와중에도 헤이먼은 열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마른 몸으로 눈물만 뚝뚝 흘렸다.
“거봐! 헤이먼도 우네! 야, 큰형이 얼마나 ‘막내, 막내’ 하는지. 아, 징그러워죽겠어.”
“내가…….”
“어, 뭐라고?”
울먹이는 헤이먼의 작은 목소리에 그레이가 허리를 굽혀 귀를 기울였다.
“크게 말해. 형.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작아.”
“내가 이달론의…… 심부름이나 하고, 그 사람의 마력을 받아서 다른 이들을……. 그랬는데도 괜찮아? 너희 다 괜찮은 거야?”
그레이가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야, 당연히 안 괜찮지.”
솔레아가 다리를 들어 그레이의 허벅지 뒤쪽을 힘껏 걷어찼다.
헤이먼의 침대 위에 쓰러진 그레이가 두 팔로 침대를 짚고 겨우 다시 일어서서 솔레아를 향해 소리 질렀다.
“넌 오빠를 발로 차니! 티온! 형! 왜 솔레아는 안 혼내?!”
“……막내가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넘어져.”
“아 진짜 서럽네. 그레이 눈물 난다.”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시늉을 하던 그레이가 침대 모서리에 앉아 헤이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형 얘기는 솔레아한테 대충 들었고, 정령들도 너 눈 뜨기 전에 우리한테 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대략 말해 줬어. 어린애를 협박해서 몇 년씩이나 그딴 일을 시키다니. 이달론 찢어 죽이자.”
“그런, 그런 뜻이 아니라…….”
당황한 헤이먼이 말을 더듬자 그레이가 헤이먼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는 또 우는 시늉을 했다.
“만약 정상 참작 안 돼서 너 감옥 가면, 흑흑. 그레이가 형아 옥바라지해 줄게. 흑흑.”
“내 말은, 이런 나도 괜찮냐고 묻는 거야.”
“하나도 안 괜찮다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하면 괜찮다고 해 줄게.”
평소 같은 그레이의 모습에 헤이먼은 오히려 당황해 버렸다.
“그레이, 장난 좀 치지 마!”
그레이의 옷깃을 잡고 뒤로 끌어낸 솔레아가 그레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헤이먼. 너 지금 이달론의 마력으로 정신 차린 거 아니야.”
“어?”
“정령들이 네 무의식으로 들어가서 아주 조금 남아 있는 네 마력을 깨우고, 키웠어. 기분은 좀 어때? 평소랑 많이 달라?”
어쩐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항상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피로감이 사라진 것 같았고, 평소에도 늘 잔잔하게 감돌던 짜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긴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하기만 했다.
“좀, 달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헤이먼을 보며 솔레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헤이먼, 정말 다행이야.”
가만히 지켜보던 티온이 몸을 숙이고는 헤이먼의 겨드랑이 밑을 잡은 뒤 침대 밖으로 빼내더니 그를 위로 들어 올렸다.
“어, 잠, 잠깐만. 형?”
티온의 키가 헤이먼보다 큰 탓에 헤이먼은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헤이먼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지만 티온은 그저 활짝 웃다가 그를 꼭 안아 주었다.
“고생했어.”
가만히 지켜보던 솔레아가 침대를 넘어오더니 헤이먼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잘했어, 우리 헤이먼!”
“왜 그래,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을 걸었지만 그레이까지 다가와 두 팔을 양껏 벌리더니 헤이먼을 꼭 끌어안았다.
티온이 헤이먼을 바닥에 내려놓는가 싶더니 셋을 한꺼번에 안아서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미친 듯이 돌리기 시작했다.
“아! 하지 마! 오빠악!”
“티온 이 미친 큰형 새끼야악!”
“혀, 형, 잠깐만. 나 빈속이라 조금……. 티온. 아, 형. 제발.”
난장판이 벌어진 가운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목줄을 찬 뱀과 정령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아이고, 정령들 왔네.”
“정령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맨정신으론 정령들을 한 번도 본 적 없던 헤이먼이 티온의 너른 가슴팍에서 겨우 머리를 떼 내 사방을 둘러봤다.
그때 티온이 세 사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겨우 바닥을 디디나 했더니 이번엔 정령들이 헤이먼 주변을 날아다니며 소리를 질러 댔다.
“우리 분홍이!”
“깨어났구나, 우리 분홍이!”
“분홍이!”
“분홍이, 오래 기다렸어!”
“분홍아! 걱정했어!”
“우리 예쁜 분홍이!”
“우리가 나오고도 하루가 지나서야 깨어나다니!”
“그거야 자기 힘으로 일어나는 게 오랜만이니까 그렇지!”
“그래도 고생했어!”
“잘했어!”
“우리 분홍이는 천재야!”
“내가 가슴으로 낳은 아들!”
“내가 노래로 낳은 내 아들!”
“얘가 왜 너네 아들이야?!”
“너네 잤냐?”
“너 돌았냐?”
“우리가 다 같이 키운 거지!”
시끄럽게 주변을 날아다니는 걸로도 모자라 정령들은 저들끼리 싸우기까지 했다.
정령들이 하는 말들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헤이먼은 왜인지 반가운 기분이 들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
“아이고오오! 내 새끼! 어릴 때랑 똑같네!”
정령들이 왜 자신의 엄마처럼 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헤이먼은 그것마저 재밌었다.
“하하.”
“아이고, 우리 강아지. 이제 ‘히히’가 아니라 ‘하하’ 하고 웃네!”
“인상도 달라졌네!”
“우리 강아지 눈이 이렇게 동그랗고! 눈꼬리도 살짝 처지고! 얼마나 귀여운데!”
“누가 우리 분홍 꽃 강아지 사납게 생겼대! 엉덩이를 차 버릴라!”
“아이고, 내 새끼. 흐어엉.”
이제 눈물까지 흘릴 지경이라 그레이가 잠자리를 잡듯 정령의 날개를 잡아 올렸다.
“자, 다들 그만. 솔레아 얘기도 해 줘야지. 헤이먼은 모르니까.”
정령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헤이먼은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왜 뱀한테 목줄을 채웠는지, 그 전에 저택에 왜 저렇게 커다란 검은 뱀이 돌아다니는지.
그리고 정령들이 왜 저를 반가워하는지, ……이게 자기 눈에만 보이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어쩌다 이리됐는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어색하게 웃으며 제게서 한 걸음 멀어지는 솔레아의 이야기가 제일 궁금했다.
헤이먼은 손을 뻗어 솔레아를 붙잡았다.
“레아, 왜 그래?”
“……헤이먼, 일단 끝까지 들어 줘. 그리고 내가 하는 말 믿어야 돼.”
솔레아는 차마 헤이먼을 보지 못한 채 얘기를 끝까지 풀어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헤이먼은 멍한 얼굴로 솔레아를 보다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레이가 인상을 찌푸리고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티온이 그의 손목을 잡고서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레이는 눈을 부라리며 헤이먼을 노려봤지만 헤이먼의 시선은 솔레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럼, 진짜 솔레아는…….”
“죽었어.”
믿기 힘들다는 듯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 헤이먼이 아랫입술을 덜덜 떨며 이어 물었다.
“이달론이야? 그자가 너한테도 시킨 거야? 솔레아의 몸으로 들어가라고?”
“……나도 내가 왜 이 세계로 왔는지 몰라. 하지만 이달론이 내게 뭔가를 시킨 적은 없어.”
“기, 기억을 잃었다거나 끔찍한 일을 당하진 않았어?”
“헤이먼, 난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거울을 보는 것처럼 익숙했다.
처음 실험실을 나와 마주한 세상이 얼마나 낯설고 두려웠는지.
헤이먼은 제 앞에 선 여자가 꼭 그때의 저 같았다.
그는 솔레아의 얼굴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섭고 힘들었겠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그레이가 힘주어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티온 역시 헤이먼이 흥분하면 튀어 나가려고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헤이먼은 솔레아를 안고 어깨를 다독이다가 몸을 떼어 냈다.
티온과 그레이가 별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선 제가 제일 늦게 알아차린 것 같았다.
“다들 알고 있었어?”
“아니. 우리도 며칠 전에 알았어. 네가 이달론한테 조종당하던 때.”
티온이 묵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아버지고.”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앓아도 전전긍긍하며 하루에 몇 번씩 헤이먼의 방을 찾아오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열흘씩이나 의식을 잃고 있던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는다니.
헤이먼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질문을 뱉자마자 티온의 입 속에서 으드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솔레아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라지셨어.”
“뭐?!”
깜짝 놀란 헤이먼은 몸을 굳히고 그녀를 바라봤다가 얼른 방구석에 놓인 옷장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를 찾으러 가야 될 거 아냐! 조종당해서 그래, 내가 알아! 아버지가 지금 얼마나……!”
옷장 문을 열어 코트를 꺼내 입는 헤이먼을 말린 건 그레이였다.
“직접 쪽지를 쓰고 나가셨어. 지난 열흘 동안 이 저택엔 이달론은커녕 그의 마력 한 줄기조차 없었어.”
“쪽지라니?”
그레이가 품에서 꺼내 내민 쪽지엔 진짜 아버지의 글씨체가 남아 있었다.
‘진짜 솔레아를 찾아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