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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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체스 우란은 초조한 마음으로 직접 상단 행렬에 올랐다.
얼마 전 릴홉 신문사에서 되지도 않는 갑질 논란을 일으키며 마력석에 찍힌 영상을 공개하는 바람에 그간 주변이 조금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래 봐야 조무래기 신문사고, 우매한 인간들은 금방 잊게 될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돈 없는 것들은 짱짱한 우란 상단에 어떻게든 제 물건 한번 대 보려고 발악을 할 것이고, 멍청한 귀족들은 물건만 좋으면 가격을 얼마가 됐든 구매할 것이다.
“……나한테 받은 광고비로 겨우 직원들 월급이나 주는 주제에 마력석이라니. 가만, 그놈이 마력석 살 돈이 어디 있어서?”
산체스는 초조함에 마차 안에서 손톱을 아그작아그작 물어뜯었다.
누가 릴홉 그 새끼를 돕고 있나? 나를 주저앉히려고? ……누구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선뜻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규모인 뤼블러스 상단과는 주요 상품이 달라서 부딪칠 일이 없는데.
산체스에게 적대감을 가질 이들은 많았지만, 그중 마력석을 구매할 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눈에 걸리적거리는 인간들은 모두 알거지로 만들었으니.
수수료를 더 높일 순 없다며 강짜를 놓는 제작자의 제품에 일부러 하자를 만들어 위약금을 물게 한 뒤 그의 가족들까지 몽땅 노예로 만든 적도 있었다.
아니, 그 비슷한 일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한때 거래처 점주였던 놈들의 손에 밧줄을 묶어 줄줄이 노예상에게 직접 팔아 치우기도 했으니까.
“당장 밥 한 끼 사 먹을 돈 한 푼 없는 것들이 마력석을 샀을 리는 없고, ……릴홉도 그만한 돈은 가지고 있지 않고.”
산체스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앞에 앉은 어린 시동이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누가 버린 마력석을 주운 게 아닐까요?”
“헛소리 말고 닥쳐.”
옆에 있던 방석으로 머리를 후려치자 아이는 몸을 웅크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 멍청한 새끼는 늘 저랬다.
맞아도 하하, 밟아도 하하, 발로 차도 하하.
“하여간 멍청한 새끼. 처웃는 거 말곤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게. 넌 나 덕분에 입에 빵 쪼가리라도 처넣는 줄 알아.”
“헤헤, 네. 알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우란 님.”
“그나저나 게르투만은 왜 이렇게 씨발, 먼 거야!”
“여기 협곡 지나면 곧 국경이에요. 물이라도 한잔 드릴까요?”
“됐어.”
신경질적으로 답한 우란은 마차 벽에 기댄 채 잠에 빠져들었다.
게르투만의 양모는 역시 질이 좋았다. 성공적으로 거래를 마쳤다.
양모가 잘 팔리고 있으니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샀고, 가격도 더 저렴한 값에 흥정했다.
“평소보다 양모 원단을 싸게, 많이 구매했으니 염색 양모 가격도 저렴해지겠네요! 찾는 분도 많은데 잘됐어요!”
우란은 픽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베르고 계집한테는 당연히 원가의 두 배를 받아야지. 내가 직접 갔다 왔는데 수고비는 톡톡히 쳐야지 않겠어?”
산체스는 제르노아로 들어서는 국경을 넘기 전 이상한 탄내를 맡았다.
“야, 이상한 냄새 안 나?”
“어라, 그러게요. 탄 냄새가 나요.”
우란은 마차 창문의 커튼을 젖혀 밖을 살폈다.
국경 주변의 부랑자 놈들이 뭔가를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야. 세워. 그리고 저것들 끌고 와.”
“무, 무슨 명목으로 저 사람들을 데려와요?”
우란은 답답하다는 듯 시동 아이의 멱살을 잡고는 마차 문을 열어 밖으로 내던졌다.
“멍청한 새끼야! 꼭 하나하나 말로 해야 알아들어?!”
“하, 하지만 우란 님…….”
“네가 돈주머니만 들고 가도 졸졸 따라올 똥개 새끼들이 뭐가 무서워!”
물론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로 돈주머니를 주진 않았다.
강탈당하면 끝이니까. 설령 저놈이 인질로 붙잡힌다면 그냥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
최근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 와서 피곤했는데 잘됐지, 뭐.
산체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는 그때, 부랑자들에게 향하던 시동이 놀란 눈을 하고선 허겁지겁 다시 돌아왔다.
뭐 하는 짓이냐고 윽박을 지르려는데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도망 노예들이에요! 도망 노예들이 화약을 만들고 있어요!”
“뭐야?!”
우란은 활짝 핀 얼굴로 반색하며 용병들에게 소리쳤다.
“저것들 모조리 잡아 와! 얼른! 다 돈이니까 얼른! 빨리!”
국경을 넘을 땐 혹시 위험할 지 몰라 매번 용병들을 고용하는데 마침 잘된 일이었다.
우란은 하나둘씩 잡혀 오는 놈들의 머리가 다 돈주머니로 보여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크크큭. 하하! 크하하하!”
노예들은 모여서 폭동을 일으킬 계획이라도 짜고 있던 건지 그 수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검을 빼 든 채 쫓아와 포위하는 용병들 때문에 도망도 못 간 듯 보였다.
“묶어! 여자들은 여기! 아이는 이쪽! 남자들은 이쪽!”
“여보!”
“아아악!”
“살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우란은 시동이 가져온 화약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꽤 제대로 된 걸 만들었는데. 이걸 만들어서 어쩌려고 했어? 반란이라도 일으킬 작정이었나 보지?”
우란은 히죽거리며 노예들을 위협했다.
“반란은 사형이야. 그럴 바에야 다시 노예로 사는 게 낫겠지?”
두 손을 내밀어 싹싹 빌던 노예들은 우란의 사악한 미소를 보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상단 행렬의 제일 뒤에서 따라 걸으며 도망쳐 온 제르노아로 다시 돌아갔다.
공돈 만질 생각에 들뜬 우란은 노예들이 왜 하필 그 장소에 보란 듯이 있었는지, 왜 화약을 들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국경을 넘고, 웬프론 협곡을 지날 무렵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려왔다.
우란이 탄 마차까지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폭발이었다.
“뭐야!”
놀란 우란이 급히 창문을 열었지만 마차 뒤에 직선으로 쭉 늘어서 있는 행렬 때문에 저 멀리 뒤쪽에서 퍼지는 검은 연기가 어디쯤에서 발생한 건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뭐냐고! 무슨 일이야! 알아보고 와!”
우란은 다시 시동을 발로 차 마차 밖으로 내쫓았다.
어린 소년은 허겁지겁 행렬의 뒤로 뛰어갔다.
아이가 노예들이 있는 곳에 다다랐을 무렵, 다시 폭발물이 터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큰 폭발이었다.
쾅!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양모를 실은 우란의 짐마차 중 하나가 폭죽처럼 터지며 뒤집혔다.
“안 돼!”
마차에 묶여 있던 말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히힝!
히이잉!
앞발을 높이 쳐들고 발버둥을 치던 말들 중 한 마리의 고삐가 풀려 버렸다.
그 말을 시작으로 마차에 묶여 있던 말들의 고삐가 차례로 풀렸고, 말들은 미친 듯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안 돼! 안 된다고!”
마차에서 뛰쳐나온 우란은 양모를 실은 짐마차를 향해 뛰어가려 했지만 계속해서 폭발이 이어지는 탓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화약? 화약 때문인가? 노예들한테 뺏은 걸 어디다 실은 거야! 이 멍청아! 핀!”
시중을 드는 아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화약이 연달아 두어 번 더 터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나무로 된 마차에 불이 붙어 순식간에 짐마차들 주변이 시커먼 연기로 가득 찼다.
“안 돼! 내 양모! 내 돈! 으아아악!”
발버둥을 치며 양모를 구하러 가려 했지만 불길에 뛰어들 용기는 없었다.
“용병들! 노예 새끼들아! 양모부터 구해! 양모! 야, 이 새끼들아!”
하지만 용병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멍청한 새끼들, 도대체 어딜 간 거야!”
회색 재가 사방 천지에 날리고,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협곡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우란은 뒤늦게 깨달았다.
첫 폭탄이 터지자마자 모두 도망쳤다는 걸.
돈에 눈이 멀어 폭발물이 터진 이곳에 남아 있는 진짜 멍청한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것을.
그때, 어딘가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살, 살려 주세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타오르는 불길과 검은 연기 때문에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우란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조금씩 앞으로 걸어갔다.
“거기 누, 누구야.”
“우, 우란 님? 콜록, 저 여기, 여기 양모에 깔렸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꺼내, 콜록! 꺼내 주세요…….”
핀이 폭발 때문에 뒤집힌 마차 아래에 깔려 있었다.
산체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노예들도 용병들과 함께 도망쳤는지 보이질 않았고, 아무리 살펴봐도 근처에 사람이라곤 자기밖에 없었다.
우란은 시커먼 연기와 핀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우란 님! 제발, 가지 마세요! 우란 님!”
우란은 핀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계속해서 달렸다.
“썅, 남은 화약까지 터지면 개죽음인데. 같이 죽자는 거야, 뭐야. 하여간 끝까지 멍청한 새끼.”
우란은 고삐를 미처 풀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말 옆으로 다가가 겨우 말 등에 올라탔다.
“이랴!”
“우란 님! 우란……! 우란. 콜록! 우란 님!”
시중을 들 놈은 새로 구하면 된다. 양모도 다시 사면 돼.
사업이 망한 건 아니니까.
꽤나 큰돈을 잃어 가슴은 아프지만, 충분히 재기할 수 있었다.
우란은 그렇게 믿으며 웬프론 협곡에서 벗어났다.
우란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순식간에 불길이 잦아들었다.
도망친 줄 알았던 노예들과 용병들 역시 허공에서 나타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아이고, 얘야. 몸은 괜찮아? 아프진 않고?”
“네! 마력으로 마차를 공중에 살짝 띄워 놓아서 하나도 안 아팠어요!”
“어쩜, 밝기도 해라.”
중년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핀은 활짝 웃으며 몸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었다.
“아유, 어떻게 이 작은 애를 두고 갈 수가 있어.”
“괜찮아요, 그 새낀 원래 쓰레기인걸요! 기대도 안 했어요!”
용병들은 갑옷과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에이, 무거워!”
갑옷으로 가려져 있던 그들의 목뒤에는 도망 노예라는 걸 알리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들의 앞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모두 이리로 와서 자유인 증명서랑 생활 보조금 받아 가세요.”
노예들은 남자에게서 자유인 증명서와 돈을 받아 든 뒤 서로를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눴다.
한참을 울며 기뻐하던 이들이 뒤늦게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저희를 사서 이런 일을 시키신 건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냥 이렇게만 하라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돈을 주실 줄은 몰랐어요.”
“끝까지 비밀을 지키라는 뜻이겠지요.”
자유인이 된 노예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 일이 밝혀지면 저희 인생도 끝장나요. 무덤까지 안고 가겠습니다.”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걱정됐는지 노예들은 우란이 향한 지평선 방향이 아닌 협곡을 넘었다.
웬프론 협곡을 가로질러 그 옆의 작은 강을 건너면 고즈넉한 마을이 있다고 하니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될 터였다.
사람들은 부푼 마음을 안고 먼 길을 떠났다.
남자와 단둘이 남은 핀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저…….”
“왜 그러니?”
“마법사님. 짐들이 여기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우란이 다시 와 볼지도 모르는데요…….”
“그건 걱정 마. 넌 이제 어머니께 가 봐야지. 이리 와.”
“저, 저를 병원까지 보내 주실 거예요?”
“그럼.”
“저, 저 준비됐어요!”
핀이 두 눈을 질끈 감자마자 그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이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뒤, 남자는 살짝 미소 지었다.
“잘했어, 얘들아.”
‘우리보고는 분홍 머리한테 가지 말고 남으라더니, 이거 시키려고 그랬구나!’
‘그래도 우린 잘했어!’
‘맞아, 우리 잘했어!’
“그래, 너희 아주 잘했어.”
작게 웃는 남자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지더니 마치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그의 발밑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몇 초 뒤 검은 연기가 사라진 자리엔 커다란 검은 뱀을 어깨에 두른 새빨간 머리카락의 여자가 우뚝 서 있었다.
그녀의 뒤에서 작고 투명한 빛들이 별처럼 점점이 반짝였다.
“자, 이제 정리하고 돌아가자.”
‘응!’
밝게 대답하던 정령들이 갑자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솔레아에게 말했다.
‘정령들이 분홍 머리한테서 빠져나왔어!’
“뭐?”
‘느껴져! 분홍 머리가 곧 눈을 뜰 거야!’
솔레아는 황급히 우란에게서 빼돌린 양모를 공장으로 보낸 뒤 아무스와 정령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