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정령들은 새로운 고착 상태에 빠졌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분홍이를 어떻게 키우지?
“분홍이, 자라나라 쑥쑥!”
“그런다고 자라면 얘가 여태 왜 못 자랐겠냐고!”
“안아 줄까? 아까도 안아 주니까 눈, 코, 입 생겼는데!”
“그럴까?”
“그러자!”
“그래, 그러자!”
정령들이 분홍이에게 다가갔다.
“분홍아!”
작은 영혼은 제 발치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몸을 움츠러뜨리며 팔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마치 거북이 같은 자세였다.
“야, 애 놀라게 왜 소리를 질러.”
“난 그냥 밝게 인사하려고 한 건데. 아니, 그러면 어떡해…….”
“다들 몸 낮춰, 낮춰!”
정령들은 쪼그려 앉다 못해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조심스럽게 분홍이에게 다가갔다.
“분홍아∼ 예쁜 분홍이∼ 우린 나쁜 정령 아니에용∼”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분홍이가 마치 거미들처럼 제게 다가오는 정령들을 보곤 사색이 되었다.
바짝 굳은 두 눈에 말간 물기가 차올랐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닫아 버린 분홍이는 경련하듯 몸을 떨다가 벽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엥, 어디 갔어?”
“도망갔잖아!”
“왜?”
“몸을 낮췄는데!”
“맞아, 몸을 낮췄는데!”
멀찍이서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이달론의 마력을 청소하고 있던 정령이 욕을 퍼부었다.
“멍청이들아! 너희들이 다 몸을, 어? 막 이렇게, 거미들마냥 사지를 구부린 채 다가가는데! 저 겁 많은 애가! 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확실하게 모시겠슴다!’라고 하겠다!”
“넌 왜 소리를 질러! 여기 분홍이 무의식 안이라서 뭔 말을 해도 애가 다 듣는 거 몰라!”
“인간 나이로 치면 다 큰 어른한테 왜 자꾸 애라고 하는 거야, 넌!”
“자기 생명력이 하나도 못 컸잖아! 그럼 애지!”
“우리 그만 싸우자! 이러다가 다신 분홍이 털끝도 못 보겠어!”
소리친 정령 덕분에 모두들 다시 조용해졌다.
“어떻게 할까?”
“음…….”
“으음…….”
“흠…….”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보통 이럴 땐 주인이 뭔가 하라고 말을 했는데.”
“아니면 임시 주인이 이것저것 시켰는데.”
“우린 그냥 즐겁게 놀고, 즐겁게 일이나 했는데.”
“응……. 아무리 청소해도 다른 사람 머릿속은 재미없어.”
“맞아. 바람도 안 불고. 시원한 파도도 없고.”
“응, 차르륵차르륵 흔들리는 풀잎도, 커다란 나무도, 아무것도 없어.”
장난치는 것 말고는 뭔가를 주도해서 해 본 적이 없어서인지 정령들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헤이먼에 대한 연민과는 별개로 그들은 무언가를 키워 낸 경험이 없었다.
하필 이런 때에 이달론 마력 청소도 난관에 봉착했다.
“이거 안 떨어져!”
“뭐가, 뭐가?”
“어떤 게?”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진득한 초록색 덩어리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자연의 힘을 쏘아 대도 떨어질 줄을 모르고 독하게 붙어 있었다.
“그럼 다 같이 하면 되지!”
“그래! 같이 해 보자!”
“그럼 될 거야!”
안 됐다.
이달론의 마력은 굳건하게 붙어 있었다.
정령들은 망연자실한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다른 곳은 다 치웠는데…….”
“저기만 남아 있네…….”
“분홍이도 안 보이고…….”
“하루 또 지난 거 같은데…….”
“꼬마 호랑이가 책 읽어 준 만큼은 일한 거 같은데 돌아갈까…….”
힘이 빠진 상태라 의욕이 나지 않았다.
모두들 눈만 끔뻑거리고 있을 때, 한 정령이 벌떡 일어섰다.
“난 여기서 포기 못 해! 분홍이 꼭 키울 거야!”
“넌 인간 영혼을 무슨 반려동물 얘기하듯이 하니.”
동료의 핀잔에도 정령은 아랑곳 않고 구석으로 갔다.
“너 뭐 해?”
“나무가 없으니까 심심해서 의욕이 안 생기는 거야!”
나뭇가지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는 정령은 헤이먼의 무의식 속에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만들어 냈다.
“왜 허락도 안 맡고 남의 무의식에 그런 걸 심어!”
“다른 인간 무의식은 다 자기들 마음대로 꾸며져 있는데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둘러보라고!”
나무 정령의 말대로였다.
장난기가 많은 정령들은 무의식까지는 아니어도 인간들의 꿈속에 간간이 들어가곤 했는데 이렇게 삭막한 곳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여긴 저 창살 감옥이랑 시뻘건 복도, 그리고 사방에 퍼진 초록색 연기뿐이잖아!”
“맞아……. 이렇게 그냥 나갈 순 없어.”
대부분 인간들의 무의식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이 반복되고 있거나, 아니면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사악한 범죄자라도 좋은 기억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말도 안 돼. 분홍이가 힘들게 살긴 했지만 임시 주인이랑 사이도 좋았는데. 무의식엔 임시 주인이 욕하면서 지켜 주겠다고 하는 목소리밖에 안 남아 있다니.”
“맞아, 이상해. 공작 부인도 좋아했으면서 없어.”
“아가 불곰도 없고.”
“꼬마 호랑이도 없어.”
“공작을 존경하고 있으면서. 무의식엔 없어.”
“흥, 내가 어떻게든 여길 초록초록하게 만들 거야!”
나무 정령이 나무를 키우려는 순간, 허리 높이만큼 오던 나무가 순식간에 시들어 버렸다.
초록색인 상태 그대로 악취를 내뿜으며 썩어 들어가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나무 정령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무의식 꼭대기에 달린 이달론의 마력 덩어리에게 욕을 퍼부었다.
“호로 쌍놈 새끼! 내 나무! 내 나무우우우!”
“……화내지 마. 너 임시 주인 같아.”
“다 같이 나무 만들자. 이번엔 마력에 당하지 않게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나무를 키우자!”
“응응, 나도 저기서 햇빛을 쏴 줄게.”
“난 바람이 흔들리는 소리를 낼게. 화내지 말자.”
이성을 잃은 나무 정령을 달래기 위해 나머지 정령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간의 무의식에 분탕을 치면 안 된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을 까먹은 건 아니지만, 뭐가 됐든 감옥보단 낫겠지 싶었다.
분홍이는 본 적도 없는 나무가 무의식의 기억 속에서 자라겠지만 눈도 뜨지 못하고 있는 지금 상황보다야 훨씬 좋지.
정령들은 애써 합리화를 하며 이번엔 무의식의 가운데에 방금 전보다 큰 나무를 심었다.
이달론의 마력이 닿지 못하게 나무 바로 위에 보호막을 씌우듯 정령의 햇빛을 쏴 주었다.
산들산들 바람까지 불게 만들자 정령들은 방금 전까지 낙심하고 화를 냈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무야, 나무야, 얼룩 나무야∼”
“……그런 노래가 있어?”
“미안. 다른 거랑 헷갈렸나 봐.”
정령은 흠, 크흠! 하며 헛기침을 하더니 다른 노래를 시작했다.
“사랑이 뭐라고, 그게 다 뭐라고, 찢기는 마음마저도 소중하게 해∼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잊혀진단다∼”
“그건 나무 노래가 아니라 나뮤 노래잖아!”
“아이고, 실수했네! 임시 주인이 혼자 샤워할 때 부르길래!”
“이 노래 좋은데!”
“지금은 나무를 키워야 된다고!”
“미안해, 미안해!”
결국 정령들은 평소대로 아무렇게나 가사를 지어 음을 붙여 불렀다.
“나무야, 쑥쑥 자라라∼ 우리 분홍이도 어서 자라라∼ 나무야, 나무야, 아프지 말고∼ 뿌리도 쑥쑥, 잎도 쑥쑥!”
“구황 작물은 잎이 시든 후에 거두세요∼ 그래야 뿌리가 통통하니 맛있어용∼”
“노래 가운데에 이상한 거 끼워 넣지 마!”
“이씨! 맨날 나한테만 화내고!”
정령들은 아웅다웅하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는 흥이 나서 저들끼리 손을 잡은 채, 늘 그랬듯 엉덩이를 흔들어 대고 어깨춤을 추며 까르르 웃어 댔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분홍색의 작은 영혼이 물끄러미 그들을 보다가 슬쩍 다가왔다.
정령들은 노래에 정신이 팔려 분홍이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 예쁜 분홍이도∼ 노래를 할 줄 알았다면∼”
“임시 주인이∼ 욕을 조금만 덜 했다면∼”
“꼬마 호랑이가 렘샤 부인이 에라스토의 형까지 꼬시는 부분까지 읽어 줬다면∼”
“저 새끼가 애 머릿속에서 그딴 말은 하지 않았으면∼”
“그러는 지도 욕은 하지 않았으면∼”
“똑같은 것들끼리 노래하다가 싸우지 않았으면∼”
“사실 나도 형 부분이 궁금한데∼ 동생보다 크다는 부분이 너무 궁금한데∼”
“노래하고 있는데 에라스토 형 거시기 얘기가 왜 나오는지를 모르겠네∼”
“그건 바로 꼬마 호랑이가∼ 도저히 못 읽겠다며 책을 덮었기 때문이지∼”
“남의 머릿속에서 대체 뭔 노래들을 씨부리는 건지 모르겠네, 요 새끼들이∼”
“히히.”
노래 중간에 들려온 웃음소리에 정령들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언제 끼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홍이가 정령들과 손을 잡은 채 나무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볼을 발갛게 분홍색으로 물들인 영혼은 여전히 크기가 작았지만 완연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선명한 눈, 코, 입에 찰랑이는 분홍색 머리카락, 그리고 눈꽃처럼 새하얀 피부까지.
남루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아이는 꽃잎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처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미소를 잔뜩 머금은 아이는 정령들의 손을 잡은 채 눈이 녹듯 사르르 웃었다.
방실방실 웃던 아이는 정령들이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자기만 빤히 바라보자 금세 웃음을 거뒀다.
그러고는 겁에 질린 눈으로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령들이 얼른 노래를 다시 시작했다.
“우리 아기, 착한 아기∼”
“니네 아기 아니지요∼ 에일린 공작 부인이 키운 아기지요∼”
“너도 틀렸지요∼ 디에르고 공작이 키웠지요.”
“그게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네∼ 분홍이는 지금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데∼”
분홍이의 손을 잡고 돌던 정령이 분홍이를 번쩍 들어 올리고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아이는 아까까진 제 키만 했던 나무가 어느새 훌쩍 자라 나뭇잎에 제 손이 닿지 않는 게 신기한지 작은 손을 쭉 뻗어 보았다.
여전히 나뭇잎에 손이 닿지 않았지만 바람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훑듯이 기분 좋게 스쳐 갔다.
“히히히.”
아이가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웃자 정령들은 더욱 큰 소리로 노래했다.
“분홍이가 웃으면 우리는 행복해요∼”
“분홍이와 함께 놀면, 우리는 즐거워요∼”
정령들은 아이를 땅에 내려놓지 않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안아 올리며 활짝 웃었다.
아이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어두컴컴하고 악취가 풍기던 무의식에는 이제 햇빛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와 아이의 긴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투명한 분홍색 구슬 같은 아이의 눈은 한 번도 상처 입은 적 없는 것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무의식의 가운데에 자리한 커다란 나무는 끝없이 자라났다.
“분홍이 머리카락은 어쩜 이렇게 예쁜 분홍색일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잎만 모았나 봐∼”
“나비가 앉았다가 그대로 꽃이 되었나 봐∼”
“봄을 깨우는 분홍색이네∼”
“가을을 맞이하는 갈대가 빛을 잔뜩 머금고서 빛날 때의 분홍색이네∼”
끝없이 이어지는 칭찬에 제 머리카락을 감싸 쥔 아이는 부끄러워 볼을 붉혔다.
그 모습에 정령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나무는 높은 곳에 자리한 이달론의 마력을 모두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자라났다.
나무는 더 이상 시들지 않았다. 나무의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핀 진한 분홍색 꽃이 무의식을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뿐 아니라 바닥 여기저기에서 자라난 풀에서도 연한 분홍색의 꽃들이 톡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통통한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정령들은 그제야 노래를 멈추고 분홍이에게 얘기했다.
“분홍아, 어떤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지만 다른 행복한 기억으로 그걸 덮어씌우고 살아가면 돼.”
“우리 분홍이는 이제 한 번 해 봤으니까 앞으로 잘해 낼 거야!”
“분홍이 할 수 있지?”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선 남자는 나무줄기를 제 손으로 짚은 채로 가만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이젠 제 종아리 높이밖에 오지 않는 정령들을 내려다보며 밝게 웃었다.
“응.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