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정령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헤이먼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기억 속에 가만히 서 있었다.
분홍색 영혼은 제 몸에 튄 피를 보고 기겁했지만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몸은 손가락 하나 쉬이 까딱할 수 없었다.
‘61번.’
초록 눈은 태연하고도 부드럽게 창살 안에 갇힌 실험체를 불렀다.
‘나는 이 실험을 위해 1번부터 60번까지를 죽였단다.’
분홍색 영혼은 구석에서 몸을 떨며 초록 눈의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넌 다르겠지. 조금 더 할 수 있겠니?’
창살 안에 갇힌 어린 영혼은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제 몸에 묻은 피를 닦아 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아주 작게,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얇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98.’
아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다시 펑 소리가 들려왔다.
‘97.’
펑.
‘96.’
펑.
‘95.’
차분하게 숫자를 세는 남자의 얼굴은 매우 평온했다.
어린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무의식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지옥에 갇힌 것처럼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데도 초록 눈의 남자는 마치 자장가를 부르는 듯 계속해서 숫자를 세어 나갔다.
‘……81. 80. 79. 78. 77.’
‘살려 주세요!’
‘도와, 도와주! 커헉!’
‘……70.’
70까지 센 남자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분홍색 영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우리는 함께 이뤄 낼 수 있단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지만 이 공간을 가득 메웠던 울음소리와 배가 고프다는 말소리를 매일같이 들어왔었다.
그 목소리들이 매초마다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펑, 펑, 펑.
‘69. 68. 67. ……살려 줄까?’
분홍색 영혼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겨 낼 수 있겠니?’
영혼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오렴.’
어린 영혼은 무릎걸음으로 바닥을 기어 초록 눈의 남자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여태 말을 하지 않던 영혼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남은, 남은 애들이라도…….’
남자는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영혼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고 축축한 체온 때문에 마치 시체에 볼을 가져다 댄 것 같았다.
남자는 긴 엄지로 아이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이겨 낸다면 살려 볼 수도 있지 않겠니?’
그 순간 남자가 엄지로 아이의 왼쪽 눈을 찔렀다.
‘아아악!’
곧장 뒤로 물러난 아이는 눈을 감싸 쥔 채 감옥 안을 뒹굴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운동 한 번 한 적이 없는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우렁찬 비명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원래 크게 운단다.’
남자는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이를 바라봤다.
‘으아아악! 악, 흐, 아악!’
아이의 눈에서부터 흐른 핏물이 온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눈은 마음의 창이지. 그래서 마력도 그곳을 통해 빠져나온단다. 자, 어서. 네게 주입한 약의 양이라면 마력이 진작 다 나왔어야 했어. 날 실망시키지 말아 다오, 61번.’
실험의 결과가 제 기대에 못 미치자 남자가 물리적으로 마력이 빠져나올 구멍을 뚫어 버린 것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역겨운 쇠 비린내도, 차갑고 딱딱한 바닥도, 축축하고 끈적한 이끼의 냄새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괴롭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온몸이 터져 나갈 듯 지르는 비명 소리가 제 입에서 나오는 건지도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61번의 타고난 마력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텅 빈 몸이 되어야 한다, 61번.’
그래도 효과가 없자 초록 눈의 남자가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66.’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남자의 낮고 징그럽게 다정한 목소리만은 선명했다.
‘65.’
내 차례가 오고 있어.
‘64.’
좀 있으면 내가 죽게 될 거야.
‘63.’
죽음을 목전에 둔 분홍색 어린 영혼이 발버둥을 멈췄다.
눈은 여전히 인두로 지진 것처럼 뜨거웠다. 남은 오른쪽 눈을 겨우 떠 앞을 바라봤다.
초록색 눈의 남자는 자애롭게 미소를 짓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펑 소리가 나고.
‘62.’
그때 아이가 바닥을 더듬거려 깨진 주사 파편을 주운 뒤 스스로 제 오른쪽 눈을 찔렀다.
‘아아악!’
아이의 비명이 창살을 넘어, 긴 복도, 두꺼운 철문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지상까지 닿진 못했다.
그제야 피범벅이 된 아이의 두 눈에서 피가 아닌 마력이 꿀렁이며 흘러나왔다.
맑고 고운 분홍색이었다.
한참 마력을 쏟아 낸 아이가 바닥에 축 늘어지자 남자는 다시 한번 손을 창살 사이로 내밀었다.
그의 몸속에서부터 뻗어 나온 마력이 길게 늘어지더니 61번의 눈을 통해 쏟아지듯 들어갔다.
몇 분 뒤 아이는 기침을 뱉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분홍색의 두 눈동자는 다친 흔적조차 없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마력을 넣긴 했지만 네 몸은 비어 있단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거야, 아주 잘해 냈다.’
남자는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어렵지 않게 부수고, 61번을 밖으로 빼냈다.
‘대견하구나.’
아이는 감정이 사라진 얼굴로 멍하니 복도를 살폈다.
처음으로 밟아 본 복도는 눈이 부실 정도로 붉어서 원래의 복도가 어떤 색이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마력을 가지게 됐는데, 하고 싶은 일이 있니?’
다정하게 묻는 남자와 함께 두꺼운 철문을 밀고 밖으로 나간 아이는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이 지나간 길마다 남자의 신발 자국과, 아이의 작은 발자국이 붉게 남았다.
겨우 지상으로 올라온 아이는 폐건물 사이로 난 창문을 통해 처음으로 맑은 하늘을 보았고, 상쾌한 공기를 폐부 가득히 들이마셨다.
아이는 조금 늦게 남자에게 답했다.
‘……기억을 없애고 싶어요.’
남자는 곤란한 듯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아이의 고운 분홍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잊어도 상관없지. 앞으로 네가 내 말에 거역하지만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이름을 새로 지어 주마.’
고심하듯 두 눈을 감은 남자가 바람을 느끼듯 흥얼거리다가 살며시 눈을 떴다.
‘헤이먼. 어떠니?’
‘……좋아요.’
‘그래, 이게 약속의 증표가 될 거다. 나와 다시 만날 때 넌 내가 네 친구들을 죽인 건 잊고 있겠지만, 나의 존재는, 오늘의 공포는 절대 떨쳐 내지 못할 거야.’
헤이먼은 두 손을 들어 자연스럽게 마력을 손바닥에 모았다.
마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 그냥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남자의 마력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헤이먼은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지우기 시작했다.
남자는 은근하게 미소 지은 채 허리를 숙여 헤이먼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시킨 일을 네가 해내지 못할 때마다 너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하나씩 죽일 거다. 네가 어디의 누구 밑에서 자라든, 자라며 누구를 만나든. 네 이름을 아는 사람, 너와 대화한 사람, 너와 눈이 마주친 사람. 모두 죽일 거다. 그것만 기억하렴.’
분홍색 눈이 눈꺼풀 뒤로 넘어갔다. 예, 라고 대답했는지 안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대답을 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테니까.
‘잘 자렴. 나의 자랑스러운 61번, 헤이먼.’
처음 마법을 써 본거라 완벽하진 않았는지 헤이먼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실험실에서 어떤 실험을 받았는지와 그곳에 있는 내내 굶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이달론을 다시 만났을 때 숨통이 조여 오는 공포감을 느끼는 동시에 ‘아무도 나를 구할 수 없다.’라는 체념이 빠르게 헤이먼의 무의식을 장악했다.
헤이먼은 몇 달에 한 번씩 이달론을 만났다.
장소는 매번 바뀌었다. 이달론은 주기적으로 거처를 옮기는 듯 늘 다른 장소로 헤이먼을 불러냈다.
은밀할 필요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위대한 마법사 이달론은 그저 마법을 통해 공간을 차단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이달론은 헤이먼을 시켜 이름이 두 개인 수많은 자들의 목숨을 빼앗고, 그들의 마력을 갈취해 왔다.
헤이먼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기억을 모두 본 정령들은 정적에 휩싸였다.
몇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연 속에 스미듯 살아온 그들 사이에 대화가 끊긴 건 처음이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 후에 정령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린 꼭 이달론의 거처를 찾아야 해.”
“응. ……그런데 어떻게? 분홍이도 매번 다른 곳으로 가잖아. 심지어 한 번 갔던 장소는 다시 가지도 않고.”
“그래도, 그래도 우리가 찾아야 해.”
“그럼 일단 이달론이 여태 갔던 곳들의 목록을 쭉 나열해 보자.”
헤이먼이 일곱 살 때 입양됐으니 목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정령들은 한숨을 쉰 후 일제히 시선을 한 곳으로 옮겼다.
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분홍색 영혼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날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는 전혀 자라지 못했다.
스스로 눈을 찔러 마력을 쏟아 낸 이후로 아이의 영혼은 성장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멈춰 버렸다.
정령들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그때, 다른 정령들이 균열을 열고 깊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왔다.
“악! 여기 왜 이래! 밖에만 청소할 게 아니라 여기도 청소해야겠네, 더러워!”
“우웩! 왜 이래, 여기? 이상한 냄새 엄청 나!”
“엄청 많이 나!”
“구역질 나!”
“더럽네!”
“윽! 싫은 냄새!”
“이달론 끄나풀 냄새 너무 심해, 더러워!”
“여기 있기 싫어!”
“대충 알아봤으면 그냥 나가자!”
헤이먼의 기억을 본 정령은 2팀뿐이었으니 다른 정령들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기 전과 똑같이 굴었다.
2팀 정령들이 도끼눈을 뜨고 다른 정령들을 노려봤다.
“너네 씨바, 한 번만 더 우리 분홍이한테 이달론 끄나풀이라고 해 봐! 가만 안 둬!”
“진짜 주둥이 틀어 버릴 거야!”
“맞아! 주둥이 틀어 버린다!”
“임시 주인한테 다 말한다!”
불같이 화를 내는 2팀 정령들의 모습에 다른 정령들이 당황하고 말았다.
“너네 왜 그렇게 화를 내?”
“맞아, 꼭 임시 주인처럼…….”
하지만 2팀 정령들은 강건했다.
한 정령은 구석의 분홍색 영혼에게로 다가가 그를 살포시 안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분홍이를 향한 공격과 모욕은 나를 향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고로 분홍이를 욕할 시 나를 욕한 것으로 생각할 거고, 그 즉시 욕한 놈의 주둥이를 틀어 버릴 거야.”
정령의 품 안에 갇힌 작은 영혼이 살짝 고개를 들어 정령을 바라봤다.
품 안에 포옥 안기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작은 아이는 배시시 웃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웃었다.
2팀의 정령들이 다른 정령들의 손을 잡고 방금 봤던 분홍이의 무의식 속 기억을 공유했다.
정령들끼리는 대화보다 이 방법이 훨씬 간단했다.
모두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와중에 어디선가 오도독, 소리가 들려왔다.
비스킷을 먹는 정령이었다.
“야! 너는 남의 머릿속에서 과자를 먹으면 어떡하냐! 부스러기 떨어지면 어떡할래!”
“배고프잖아! 우리 여기 들어온 지 하루도 훨씬 더 지났는데!”
“넌 심각함이란 걸 몰라?!”
“그게 뭐가 심각해!”
비스킷 정령의 말에 다른 정령들이 기함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너, 너 사이코패스야?”
“너 자연 속에서만 살아와서 공감 능력이 없어?”
“이 인간이 불쌍하지도 않아?”
“너…… 이 어린애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보고도!”
모두의 질타를 받던 비스킷 정령이 분한 듯 소리쳤다.
“이달론 마력 청소도 다 했고! 저기, 쟤! 무의식의 깊고, 깊고, 또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쟤가 있잖아!”
“어?”
“응?”
정령들이 한 번에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비스킷 정령이 소리쳤다.
“저 작은 분홍색 영혼이 분홍이의 마지막 생명력이자 마력이잖아! 바보들아! 마력이 완전히 다 빠져나간 게 아니니까 쟤가 남아 있는 거잖아! 쟬 키워 내면 되는데! 그럼 분홍이도 살아날 테고! 더 이상 이달론한테 마력 안 받아먹어도 되고! 이달론을 찾아서 죽인 다음에 이름 새로 만들면 되지! 뭐가 문제야! 마력이, 생명력이 저기 있는데!”
말을 다 마친 비스킷 정령이 억울한 마음에 씩씩거렸다.
비스킷 정령을 둘러싼 정령들은 멍하니 그와 구석에 웅크린 분홍색 영혼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모두 비스킷 정령에게로 걸어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를 안아 줬다.
“나 비스킷 먹어도 돼?”
“먹어, 먹어. 부스러기 떨어지면 우리가 다 치울게.”
비스킷 정령은 만족한 듯 웃으며 몰래 들고 온 다른 비스킷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