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조용하던 헤이먼의 방이 정령들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아가 불곰 안녕!”
“아가 불곰 반가워!”
“아가 불곰 귀여워!”
“아가 불곰 동생 지키고 있구나, 착해!”
“우리 근데 아가 불곰한테 모습 보여 줘도 돼?”
“얘는 주인의 검도 없는데!”
“그래도 아까 우리 봤으니까! 난 아가 불곰이랑 인사하고 싶어!”
“나도! 난 아가 불곰 좋아!”
“나도 아가 불곰 좋아!”
티온은 이 많은 정령들이 부르는 ‘아가 불곰’이 설마 자기를 말하는 건지 헷갈려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모르는 자가 봤다면 적대적인 눈빛에 오줌을 지리고도 남았을 테지만 이들은 정령이었다.
티온의 맑은 영혼이 예뻐 죽겠는 정령들이 티온을 두려워할 리 없었다.
“아가 불곰! 대답!”
작은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정령이 티온의 눈앞까지 날아와 외치자 티온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좋아!”
“……그런데, 너희 왜 여길…….”
“우리는 임시 주인이 이 분홍 머리의 머리에 들어가서 무의식을 마구 휘저으라고 해서 왔어!”
“맞아! 분홍 머리의 머리로 들어가래!”
“머리, 머리 헷갈려!”
“그럼 이제부터 분홍이라고 부르자!”
“좋아!”
“분홍이 좋아!”
당사자의 동의는 전혀 구하지 않은 채로 헤이먼은 분홍이가 되었다.
티온의 얼굴이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는 정령들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몰라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정령들을 저지했다.
“내 동생 머리로 들어가지 마.”
“하지만 임시 주인이 시켰는걸!”
“……왜?”
티온의 (겉보기에) 날카로운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정령들은 그가 귀여워 못 참겠다는 듯 티온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한마디씩 했다.
“이달론의 거처를 알아내야 하니까!”
“더러운 마법사 이달론!”
“못된 마법사 이달론!”
“분홍이의 생기를 빨아먹는 이달론!”
“분홍이에게 마력을 넣어 주면서 생기를 빨아먹고 있는 이달론!”
“생기를 빨아먹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심각해진 티온의 목소리에도 정령들은 그저 해맑았다.
“이달론이 마력이 없는 분홍이에게 자기 마력을 넣어 줬지만 그렇게는 오래 못 살거든! 여태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지!”
“맞아, 기적이지!”
“지금 분홍이가 몇 시간째 눈을 못 뜨고 있는 것도 이달론이 마력과 생기를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지!”
“꼭두각시로 만들어서 온갖 지저분한 심부름을 시키면서 부려 먹었지!”
“맞아! 고작 생을 조금 연장해 준 대가로!”
“하지만 처음 분홍이가 계약했을 때는 어렸으니까!”
“맞아, 분홍이는 어렸으니까!”
“하지만 곧 죽을 거야!”
“응, 분홍이는 이제 다 쓴 카드니까!”
“응! 분홍이는 이제 필요 없으니까!”
“맞아, 아가 불곰처럼 맑은 영혼이 아니야! 이달론이 더럽게 사용했으니까!”
“응! 죽어야 돼!”
“응, 죽어도 싸지!”
정령들은 말간 얼굴로 저들끼리 까르르 웃어 대며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 댔다.
헤이먼이 언제 일어날지 몰라 지키고 있던 티온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했다.
“……안 돼, 헤이먼 살려 줘. 헤이먼을 살려 줘,”
그의 흉터가 일그러졌다.
“에구, 아가 불곰, 울지 마.”
“아가 불곰 영혼 힝구야!”
티온의 얼굴 가까이로 날아온 정령들이 그의 머리를 포옹하듯 꽉 끌어안고는 뽀뽀를 쪽쪽 날려 댔다.
이제 그만 됐다며 떼어 내고 싶었지만 정령들은 제 손바닥보다도 작아서 실수로 건드렸다간 터뜨릴 것 같았다.
티온은 바짝 굳은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동생, 헤이먼을…… 살려 줘. 부탁이야.”
“응응, 우리 아가 불곰 동생 살려 줄게!”
“아가 불곰은 착하니까!”
“아가 불곰은 작고 귀여우니까!”
“내가 왜 아가 불곰……?”
티온이 질문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정령들은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헤이먼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우리 갔다 올게!”
눈 깜빡할 사이에 그들은 사라졌다.
결국 티온은 제가 왜 아가 불곰인지 물어보지 못했다.
* * *
“우웩! 분홍이 머리 더러워!”
“웩! 분홍이 머릿속 끈적거려!”
“윽! 나가고 싶어!”
“숨 쉬기 힘들어!”
“나 나갈래!”
“얘들아! 꼬마 호랑이가 책도 읽어 주고, 임시 주인이 우리한테 부탁도 했잖아! 아가 불곰이 분홍이 살려 달라고 했고!”
“……그랬지.”
“그랬긴 하지.”
“흠.”
“그럼 반은 여기서 분홍이 머리에 낀 더러운 마력을 치우고, 반은 분홍이 무의식으로 들어가서 이달론 찾자!”
“좋아!”
“나도 좋아!”
“어떻게 나눌 거야?”
“난 이달론 찾을랭.”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청소 싫다고 다른 사람한테 미루면 나쁜 정령이지요?”
“너 말투 임시 주인이랑 똑같다!”
“진짜!”
“신기해!”
“갑자기 임시 주인 보고 싶어. 여기 더러워! 나 나갈래.”
“나도!”
“나도!”
“나도!”
정령들이 빛을 번쩍 내뿜으며 헤이먼의 머릿속에서 나가려는 순간, 초록색의 끈적이는 열기로 가득 차 있던 공간에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 닥쳐. 내가 너 지킬 거니까.
너 더럽다고 생각 안 해. 그렇게 생각하는 새끼들은 내가 주둥이를 틀어 버릴 거야.
“엇…….”
정령들은 저 목소리의 주인이 어디선가 나타나 자신들의 주둥이를 틀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밑으로 가라앉았다.
“아, 맞다. 임시 주인 욕하는 거 무서웠지…….”
“우리 그냥 하자.”
“응. 그러자……. 요즘 좀 친절해져서 까먹고 있었네.”
방금 전까지 아웅다웅 다투던 정령들은 빠르게 팀을 세 개로 나눴다.
1팀은 남아 있는 이달론의 마력 청소.
2팀은 무의식으로 들어가 이달론의 거처 찾기.
3팀은 텅 비어 버린 분홍이의 몸에 자연의 생기를 넣어 주기.
자연의 생기를 받아들일 만한 맑은 몸은 아니지만 이거라도 불어 넣어 주지 않으면 헤이먼은 며칠 안에 죽게 될 터였다.
“자연의 생기를 넣어 주면 며칠 안에 임시 주인이 어떻게든 하겠지!”
“맞아! 며칠이 지나면 그것조차 다 뱉어 내고 죽겠지만!”
“맞아, 어차피 그냥 둬도 죽으니까!”
“맞아, 시간을 버는 거지!”
“맞아. 임시 주인이 이달론과 맺은 마력 계약을 끊어 줄 거야!”
“새로운 이름을 줄지도 몰라!”
“새 이름이 새 인생이니까!”
“응, 응. 임시 주인이 솔레아가 된 것처럼!”
“맞아!”
정령들은 늘 그랬듯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헤이먼의 머릿속 이곳저곳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깨진 균열 사이로 들어간 2팀은 곳곳에서 들려오는 솔레아의 애정 담긴 욕설을 누비고 다녔다.
“분홍이는 왜 자기한테 욕한 임시 주인만 자꾸 떠올리는 거야?”
“욕 듣는 걸 좋아하는 타입인가 봐.”
“나 그거 알아! 책에서 봤어!”
대화 중 매사에 꼼꼼한 정령 하나가 헤이먼의 무의식 구석에 필기해 뒀다.
<헤이먼: 욕을 들으면 다소 좋아함. 길들여지는 걸 좋아하는 듯.>
“흠.”
필기를 끝낸 정령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신이 적어 놓은 내용을 보며 고민했다.
“얘들아! 이리 와 봐!”
다른 정령이 부르는 통에 정령은 글씨를 미처 지우지 못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솔레아가 함께 있었다면 꿀밤이라도 먹이고 벅벅 지웠겠지만 아쉽게도 무의식 속에 솔레아는 없었다.
다른 정령에 부름에 달려간 헤이먼의 깊은 무의식 속은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었다.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한 솔레아를 향한 애정, 티온과 그레이와 함께 보낸 유년기의 추억, 공작과 공작 부인을 향한 신뢰.
그리고 곳곳에 퍼진 죄책감과 열등감.
그 사이에서 옅은 분홍색으로 물든 작은 영혼이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분홍이, 안녕?”
정령들보다도 더 작은 영혼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얼굴 표정도 뭣도 없는 그저 사람 모양의 작은 덩어리에 불과했다.
“분홍이. 이달론의 거처가 어디야? 넌 알고 있지?”
“우리한테 말해 줘.”
하지만 분홍색 영혼은 겁을 집어먹은 듯 몸을 더욱더 옹송그리며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조금 더 있다간 벽으로 들어가 사라질 기세였다.
“이렇게 작고 힘없는 영혼은 처음 봐.”
“불쌍해.”
“아무도 안아 주지 않았어?”
“너를 착하다, 예쁘다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분홍이 마음이 되게 오래 아야 했구나.”
정령이 바닥에 주저앉아 분홍색 영혼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다른 정령들도 하나둘씩 주변으로 모여 분홍색 영혼을 안고는 천천히 그를 다독였다.
“분홍이 아픈 거 이제 끝.”
“분홍이 외로운 것도 끝.”
“분홍이 착하고 예뻐.”
“분홍이 하나도 안 더러워.”
“분홍이 똑똑하고 귀여워.”
“분홍이는 다정하고 멋진 분홍이야.”
“응, 욕 듣는 걸 좋아하는 변태지만.”
“야. 분홍이한테 왜 말을 그렇게 해! 애 듣겠다!”
“왜 나한테만 그래! 아까 다 같이 그렇게 얘기했잖아!”
“분홍이가 어련히 알아서 자기한테 맞는 짝 찾을까! 넌 이 작은 애기한테 그러고 싶냐?”
“너네 왜 애기 앞에서 싸워! 다시 안아 줘!”
“앗, 미안해. 분홍아.”
정령들은 싸움을 멈추고 다시 분홍색 영혼을 끌어안았다.
주변을 빙 둘러싼 채 이글루 모양으로 분홍 영혼을 감싸고 있기를 몇 분, 갑자기 품 안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뜨끈하네.”
“그러게. 왜지?”
어느새 조금 자란 분홍색 영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홍색 영혼은 아까보다 커졌을 뿐 아니라 눈, 코, 입까지 생겨 있었다.
그는 정령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들 중 하나의 손을 잡고 더 안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러곤 작은 균열을 조심스럽게 벌려 정령과 함께 더 깊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빛이라곤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검은 밀실이었다.
‘61번! 일어나!’
어떤 남자의 고함 소리에 영혼은 화들짝 놀라 정령의 뒤로 숨었다.
‘61번. 눈 떠.’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남자가 쿵쿵 발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그가 내민 커다란 주사를 본 영혼이 경기를 일으키듯 온몸을 떨어 댔다.
당황한 정령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까 들어왔던 균열은 어디 가고 사방이 창살로 막혀 있었다.
영혼은 소리 지르지 않았지만 그의 무의식 속은 이미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체도 없는 악몽에서 마구 발버둥 치는 영혼의 얼굴이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됐다.
영혼은 이젠 정령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혼자 떨다가 바닥을 기어서 구석으로 도망쳤지만 창살에 가로막혀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창살을 꼭 붙잡은 채 벌벌 떠는 영혼을 바라보던 정령들은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발길질을 해 댔다.
“분홍이 괴롭히지 마!”
“주사 네 엉덩이에나 꽂아!”
“분홍이 61번 아니야!”
“이 나쁜 놈!”
“엇, 그거 임시 주인이 쓰던 욕인데!”
“나도 쓸래!”
“개새끼!”
“이 쌍놈 새끼!”
정령들이 쌍욕을 퍼부으며 악몽 속의 남자를 때리던 중, 어떤 정령이 손을 들어 제 입으로 가져갔다.
“얘들아, 쉿.”
“왜 그래?”
“쉿. 들어 봐.”
창살 밖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61번이?’
‘예, 그놈 몸에서만 마력이 빠져나갔습니다. 다 빠져나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는 거죠. 나머지는 실험 중에 다 죽었고, 뒤 번호 애들은 숨은 붙어 있는데 상태가 영…….’
‘그렇군.’
짧게 대답한 남자가 허리를 숙여 창살 안을 들여다봤다.
심리적인 공포감이 크기로 나타난 건지 남자의 얼굴은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래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단 하나만큼은 선명했다.
짙은 초록색의 눈동자.
그 눈이 반쯤 접히며 싱긋 웃는 순간, 옆에서 주사기를 들고 있던 남자의 몸이 폭탄처럼 터져 버렸다.
붉은 피와 진득한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콧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온 쇠 비린내가 뇌의 깊숙한 곳까지 강하게 뚫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