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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103/192)

103화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그는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뜨거운 눈으로 솔레아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물었다.

“울었습니까?”

라트엘의 검은 눈동자 가득 솔레아의 단단한 얼굴이 들어찼다.

“눈이 퉁퉁 부어 있습니다. 얼굴은 잠 한숨 못 잔 것처럼 엉망이고, 옷도 먼지 구덩이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엉망이잖습니까. 하인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답을 하지 않으니 아가씨께 물을 수밖에 없죠.”

솔레아는 평소답지 않은 라트엘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그에게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도 없었거니와 설명한들 그가 믿을 리도 없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퉁퉁 부은 눈으로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누가 멀쩡히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돌아가겠습니까.”

솔레아는 라트엘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에요. 라트엘은 베르고만 생각하세요.”

“아가씨도 베르고입니다.”

“나는…….”

무심코 입을 연 솔레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라트엘을 바라보며 단어 하나하나를 쏘아붙이듯 내뱉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어요? 우란이 그 기사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계약된 상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우란의 주거래 고객들의 구매량에는 변화가 있는지, 그런 것들을 체크해야죠. 우리가 지금 소꿉놀이나 하자고 여기 모였나요? 라트엘이 말한 것처럼 우린 사업을 하는 거예요.”

굳은 표정으로 솔레아를 내려다보던 라트엘의 미간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그냥 대답해 주시면 안 됩니까? 왜 우셨는지 물은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에요? 아가씨 말씀처럼 사업으로 엮인 관계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간 같이 일을 하면서 서로를 걱정할 만큼은.”

라트엘이 ‘걱정’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순간 솔레아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라트엘의 어깨를 툭 밀쳤다.

그리 강하지 않은 힘이었음에도 라트엘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늘 고고하게 깜빡이던 그의 눈이 일순간 크기를 키웠다가 이내 제 모양으로 돌아왔다.

솔레아는 손을 뻗어 라트엘의 턱을 손끝으로 살짝 잡고는 저를 바라보도록 그의 얼굴을 고정시켰다.

“정신 차리세요, 라트엘. 동정 따위 때문에 일 그르치지 말고.”

“……아가씨.”

“네가 나한테 한 말인데 그거 하나 기억 못 해서 사람을 붙잡고 따져 물어? 지금 중요한 게 나야, 아니면 베르고의 부흥이야? 쓸데없는 일에 감정 쓰지 마.”

“쓸데없다니, 이건.”

“감성에 젖어서 일 내팽개칠 거면 가서 공작님 업무나 마저 보고 퇴근하세요. 라트엘이 좋아하는 편안하고 걱정 없는 삶으로 돌아가라고. 그게 아니면 시킨 일이나 해.”

솔레아는 그의 턱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대로 몸을 돌리려 했지만 라트엘이 힘없는 손길로 솔레아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퇴근 후라도 괜찮으니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지금…… 위태로워 보이십니다.”

솔레아는 그를 무시하고 제 방을 향해 걸어갔다.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순간까지 등 뒤의 라트엘이 움직이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레아는 미련 없이 방문을 걸어 잠갔다.

제가 가짜인 걸 알고도 싸고도는 티온과 그레이의 반응은 의외였지만, 라트엘은 공작의 사람이니 공작의 얘기를 들어 주고 공작의 편이 되어 줬으면 했다.

제가 떠난 후에 진짜 아가씨가 그립다고, 진짜 아가씨라면 그리 매몰차시진 않았을 거라며 욕이라도 씹어 주길.

‘퇴근 후라도 괜찮으니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하지만 라트엘이 한 말은 꽤나 반가웠다.

늘 적당히 선을 지키던 그와 진짜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방으로 들어온 솔레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아무스와 그레이였다.

그레이와 10년은 알고 지낸 것처럼 그의 어깨에 편안히 몸을 말고 있던 아무스가 솔레아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그레이도 제 방인 양 의자에 편하게 앉아 테이블에 발을 올린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솔레아의 비밀스러운 일기장을.

“뭐 하는 거야, 그레이.”

“아니, 얘가 자꾸 이 야한 책 위에 올라가려고 하길래, 뭐가 있나 해서 봤지. 근데 그냥 저번이랑 똑같이 야한 쓰레긴데?”

“이리 줘 봐.”

“너어는 이렇게 시급할 때마저 야한 책이 보고 싶니? 하, 오빠는 정말 우리 동생이 걱정돼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솔레아는 그레이의 말을 무시한 채 일기장을 받아 들어 펼쳤다.

아무스가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것 역시 이달론 때문인 듯하다.

이달론을 막기 위해선 아무스의 이름이 적힌 세 번째 종이를 찾아야 한다.

솔레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무스.”

이름을 부르자 그레이의 어깨에서 내려온 아무스가 책들 사이에 자리를 잡더니 꼬리로 바닥을 쿵쿵 내려쳤다.

“그레이의 검을 산 가게에서 받은 종이에서 한 번, 이 일기장에 네 이름이 나타났을 때 한 번이었으니까 이제 다른 곳에서 네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 네 힘을 되찾을 수 있다고?”

쉬익!

아무스가 혀를 날름거리며 머리를 들어 올려 끄덕거렸다.

“뭔데, 거기 뭐 적혀 있어?”

그레이의 질문에 솔레아는 일기장을 덮어 버렸다.

지금으로선 이 일기장만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이것까지 그레이에게 설명할 순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레이, 헤이먼한테 가서 일어날 때까지 곁을 지켜 줘. 그 많은 기사들이 한 번에 기절했으니 티온도 위험할지도 몰라.”

“……넌?”

“이달론을 찾아봐야지.”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은 채 능청스럽게 굴던 그레이가 발을 바닥에 내리고는 솔레아를 올려다봤다.

그의 입에서 딱딱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티온이랑 나는 헤이먼을 지키고, 너는 혼자 이달론을 찾겠다고?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라? 그 인간이 네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솔레아는 피곤한 듯 인상을 쓰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네 말처럼 그가 찾는 건 나야. 그러니 내가 집 안에 숨어 있으면 그 마법사는 또 헤이먼을 조종할 거야.”

“그럼 네가 또 그 이상한 회초리로 때리면 되지.”

“안 통하면 어떡해. 그땐 돌이킬 수가 없다고!”

솔레아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앤이 가져다 놓은 물에 적신 천을 집어 들어 솔레아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아! 아야, 그레이. 뭐 하는, 아!”

“으이구, 내 동생. 눈곱 떼고 세수 좀 하자.”

“그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친 솔레아가 그레이가 쥐고 있던 천을 빼앗았다.

그레이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씩 웃었다.

“야. 차분하게 생각해. 너한테는 나도 있고, 티온도 있고, 지가 용이라고 주장하는 뱀도 있고, 정령들도 있어. 하나씩, 하나씩 같이 하자.”

솔레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순간 머릿속에서 예전에 헤이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달론이 자꾸 어떤 글자를 읽어 보라고 시킨다던.

아무스의 이름이 적힌 세 번째 종이는 이달론이 가지고 있는 거야.

“얘들아! 집중의 박수를!”

“어? 너 갑자기 뭔 소릴.”

그레이가 미친 사람을 보듯 바라봤지만 솔레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얘들아! 집중의 박수를!”

다시 한번 외치자 허공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오더니 정령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옳지! 잘했어!”

아무스가 노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솔레아와 정령들을 바라봤다.

“미안, 아무스. 네 정령들 수준이 딱 유치원생이라 내 나름대로 길들여 봤어.”

아무스가 불만스러운 듯 쉬익, 쉬익 소리를 내며 꼬리로 바닥을 쿵쿵 내려쳤다.

하지만 정령들은 솔레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자, 우리 정령 친구들. 내가 뭐 좀 물어볼게요.”

“네!”

“좋아!”

“뭐든 물어봐!”

“이달론의 마력이 자꾸 있다가 없어졌다 해서 본체가 있는 장소를 못 찾았다고 했지?”

“응!”

“웅!”

“넵!”

“네!”

“옙!”

“예!”

“대답은 한 번만. ‘웅’이라고 하는 거 안 돼요. 그리고 ‘넵, 네, 옙, 예’도 너무 성실한 회사원 같아서 안 돼요.”

“응!”

눈앞에서 팔랑팔랑 흔들리는 투명한 날개가 신기한지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정령들의 날개를 툭툭 건드렸다.

“그레이.”

“어우, 깜짝이야. 어, 왜?”

“헤이먼 마법 수업 집에서만 받은 거 아니지? 밖에도 몇 번 나갔다고 했잖아.”

“어. 그랬지.”

“그럼 걔가 이달론의 거처를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겠지. 근데 지금 기절해 있는 사람을 어떻게 깨우게. 마력도 다 빠져나가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며.”

“맞아! 처형도 아는 건데! 임시 주인 바보야!”

“임시 주인은 처형보다 바보야!”

“처형은 아내의 언니한테 하는 말이라고 임시 주인이 그랬잖아!”

“성별은 중요하지 않아!”

“맞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해, 이 자식들아!”

그레이가 소리를 지르자 정령들은 창문을 타고 미끄러지는 빗방울처럼 까르르 웃어 댔다.

솔레아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집중의 박수를!”

“짝! 짝! 짝!”

“너희 다른 사람 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

“응!”

“그럼!”

“우린 뭐든 할 수 있어!”

“꿈으로 들어가는 건 지금 우리밖에 못 해!”

“주인은 못 해!”

“주인 지금 뱀이라서!”

“바보야! 주인은 용이야!”

“바보야! 주인 지금 까망 뱀이야!”

“뭐? 누가 까망베르치즈라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비스킷을 손에 든 채 오독오독 씹고 있던 정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레이가 한숨을 쉬며 정령에게서 비스킷을 뺏어 들었다.

“잉! 왜 뺏어! 꼬마 호랑이 쓰레기 그레이 새끼!”

“너 욕 어디서 배웠어!”

“임시 주인은 맨날 욕하는데, 뭐!”

그레이가 솔레아를 쏘아봤다.

“애들 앞에선 물도 조심히 먹으라는데 너어는, 어? 정령들 앞에서 욕이나 하고, 잘하는 짓이다.”

그레이의 말에 동조하듯 아무스가 몸을 바짝 세우곤 솔레아의 종아리를 야금야금 씹어 댔다.

“좀! 그레이. 아무스. 둘 다 그만.”

사공이 많으니 배가 산 정상을 찍고도 모자라 일만 이천 봉을 모두 돌아다닐 모양이었다.

“정령 친구들. 사람은 의식이 없어도, 무의식은 있는 법이거든. 무의식을 뚫자, 얘들아.”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그래도 할래!”

“난 싫어!”

비스킷을 뺏긴 정령이 팔짱을 낀 채 벽 모서리로 날아가더니 뒤돌아서 파닥거렸다.

“씨! 미워! 싫어! 책도 못 읽게 하고! 과자도 뺏고! 임시 주인 미워!”

그레이가 손에 들고 있던 비스킷을 정령에게 다시 내밀었다. 자기 몸만 한 비스킷을 받아 든 정령이 불퉁한 얼굴로 다시 오독오독 과자를 씹기 시작했다.

“너 다시 솔레아 말 들을 거지?”

“시어! 책 일글랭!”

입 안에 과자를 한가득 문 정령이 고개를 젓고는 솔레아의 붉은 일기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정령들의 시선 역시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도! 우리도 읽을래!”

“좋아!”

“저거 읽고 할래!”

“야, 지금 급하다니까? 얘들아. 야! 솔레아, 정령들 왜 이래?”

그레이의 질문에 솔레아는 티벳 여우 같은 눈으로 정령들을 바라봤다.

“하……. 책을 치우고 난 뒤에 시킬걸. ……쟤네 원래 저래. 아마 흥 떨어지기 전까진 절대 안 움직일 거야. 저럴 땐 집중의 박수를 아무리 쳐도 안 통해.”

정령들이 책 모서리를 조금씩 나눠 든 채 그레이 앞으로 포르르 날아왔다.

“꼬마 호랑이! 책 읽어 줘!”

“처형! 읽어 줘!”

“그러면 우리 힘낼게!”

“무의식 들어갈게!”

“꿈에서 이달론 거처 찾을게!”

“아, 싫어!”

그레이가 질색하며 거절했지만 정령들은 끈질겼다.

“책 읽어 줘어어어!”

“여기! 여기부터 읽어 줘!”

“빨리!”

“얼른!”

“아! 싫다고!”

“그레이, 그냥 읽어 줘. 네가 빨리 해야 이달론 거처도 빨리 알아내지. 민망하면 난 나가 있을게.”

결국 그레이는 솔레아가 밖으로 나간 후에야 이를 악물고 렘샤 부인의 은밀한 사정을 읽기 시작했다.

“더 실감 나게 읽어 줘!”

“더 크게 읽어 줘!”

“묘사 재미없어! 대사 부분 읽어줘!”

솔레아였다면 뭔 말이 그렇게 많냐며 입 다물고 그냥 펼쳐진 부분 눈으로 읽으라고 성질을 냈겠지만 그레이는 그러지 못했다.

만족한 정령들이 방을 떠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그레이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부랑자처럼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집인데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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