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꺅! 뱀?!”
놀란 이안이 신문을 떨어뜨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신문이 펼쳐졌다.
릴홉 신문 1면에서는 마력을 넣은 사진이 짧은 동영상처럼 생동감 있게 재생되고 있었다.
[우란 상단, 신문사에 갑질·폭력 행사… 이대로 괜찮은가]
릴홉 신문사 편집장의 따귀를 후려치는 산체스 우란의 모습이 신문 속에서 생생하게 반복됐다.
신문을 유심히 살펴보던 아무스는 이내 관심을 끊고는 떨어진 회초리를 입에 문 뒤 천천히 바닥을 기어 솔레아의 방으로 향했다.
“저, 저 뱀이 왜 회초리를 물고 가는 건가요?”
놀란 눈으로 묻는 이안에게 솔레아는 어색하게 답했다.
“그, 글쎄? 아마 익숙해서? 자기 거라고 생각했나?”
라트엘이 인간 말종을 바라보듯 솔레아를 쳐다봤다.
“아가씨. 설마 회초리로 야생 뱀을 길들이신 건 아니겠죠? 그건 동물 학대입니다.”
“그런 적 없어요. 그리고 저건 그레이가 키우는 뱀이에요.”
“하지만 아가씨의 방으로 들어갔지 않습니까?”
“……뱀이 뭐,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다고요. 그냥 눈에 띄는 방이니까 들어갔겠죠.”
솔레아는 이안과 라트엘을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가며 그레이에게 눈짓했다.
그레이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곤 아무스가 들어간 솔레아의 방으로 향했다.
여전히 그의 뒤에서는 정령들의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
아무스의 검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정령들은 그레이에게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듯했다.
방으로 들어간 솔레아는 심호흡을 가다듬은 후 이안과 라트엘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신문사만 건드리신 줄 알았는데 상단을 만드셨던 겁니까?”
“만든 건 내가 아니죠. 이안의 상단이니까요.”
“솔리안은 누가 들어도 솔레아와 이안을 합친 것처럼 들리는데요.”
라트엘의 말에 이안을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공녀님께서 상단의 이름은 제 마음대로 지으라고 하셨어요.”
“자, 아무튼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고.”
솔레아가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이안이 재빠르게 말을 끊었다.
“아니요. 중요합니다. 공녀님과 저의 상단이니까요.”
라트엘이 기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솔레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뱀을 회초리로 길들이면 동물 학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회초리로 길들이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 질색하는 솔레아가 웃기다는 듯 라트엘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알았으니 사업 얘기를 해 보죠. 이걸로 우란이 흔들리기야 하겠지만 그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네요.”
“네, 그래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일단 우란 상단과의 계약 만료 시점이 다가오는 상점들 위주로 저희가 하나씩 포섭하면…….”
“아니요.”
솔레아는 이안의 말을 끊고는 우란 상단의 거래처 목록을 살펴봤다.
그녀는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 양모 직수입 라인부터 우리가 먹읍시다.”
라트엘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안 역시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렸다.
라트엘은 신문 기사를 턱끝으로 가리켰다.
“이건 우란에 대한 평판이 안 좋아지는 정도일 뿐, 이거로는 우란 상단의 주 수입원인 양모 직수입 사업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그간 거래처와 쌓아 놓은 신뢰가 있을 테니까요.”
이안 역시 라트엘과 비슷한 생각인지 솔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까까지 부끄러워하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사업 얘기를 하는 솔레아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제르노아로 들어오는 양모의 약 80%가 우란 상단 거예요. 이걸 우리가 가져오지 못하면 결국은 계속 우란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어요.”
“네, 공녀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거죠.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지금 이걸 손댈 이유가 없어요.”
솔레아는 말없이 뒤돌아서 벽에 붙어 있던 지도를 떼어 내 책상 위에 꺼내 펼치고, 책상 모서리에 있는 잉크통을 열어 손가락에 붉은 잉크를 푹 찍었다.
그러고는 우란 상단이 양모를 수입해 오는 경로를 따라 손가락을 쭈욱 그었다.
지도 위에 붉은 길이 그려졌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보라색 눈동자가 이윽고 멈췄다.
솔레아는 작은 핀으로 지도 위의 한 군데를 꾹 찍었다.
웬프론 협곡이었다.
솔레아는 고개를 들어 이안과 라트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차갑게 식은 눈동자에는 냉기가 서려 오싹할 정도였다.
“신뢰를 무너뜨릴 겁니다.”
“신뢰를 무너뜨리시겠다니요.”
“그간 문제없이 양모가 유통되어 신뢰가 생긴 거라면, 문제를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지금 상단 행렬의 물품을 약탈이라도 하시겠단 겁니까?”
라트엘이 그답지 않게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지만 솔레아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녀는 오히려 담담하게 답했다.
“네. 그거라도 해야 한다면 할 거예요.”
“대체 왜 그러십니까. 그 이후엔 어쩌시려고요? 우란이 양모 사업에서 손을 뗀다고 해서 갓 만들어진 신생 상단인 솔리안이 그걸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양모로 사업을 하는 귀족은 베르고뿐이니, 우란의 빈자리를 우리가 메꾸고 직접 관리하겠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그간 모아 놓은 비리 장부나 소속 상점들에게 행한 불법적인 행태를 공작가에서 처벌한다든지…….”
“공작가에서 처벌하고, 공작가가 사업을 뺏어 오라고요? 그걸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거 같나요?”
“무슨 상관입니까! 영주인데!”
“그런 귀족이 되면 베르고는 결국 또 뒤에서 욕만 먹게 될 거예요.”
“……다들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나도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었잖아요.”
솔레아는 초조한 듯 빠르게 이어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얘기 끝났어요, 이만 나가 봐요.”
“아가씨가 그런 준비를 하셨다는 게 밝혀지면 그땐 어떻게 하시려고요. 베르고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가씨의 신변에도 위험이 생기잖습니까! 사람들이 아가씨에 대해 뭐라고 떠들지는 신경도 안 쓰이십니까?”
“그건…….”
솔레아는 지도 속 베르고가 있는 위치를 손바닥으로 찬찬히 쓸며 나지막이 말했다.
“공녀가 악마한테 씌었다고 해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장난이에요. 얼른 가요. 이안은 잠깐 남고.”
영문 모를 표정으로 서 있는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공녀를 믿어 볼 생각이었다.
상단을 세우고, 신문사들을 사들이고, 예술가들을 영입해 베르고에 대한 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드는 과정 내내 공녀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라왔다.
그중 실패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 이번에도 공녀님의 뜻대로 될 것이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던 라트엘이 아무런 말 없이 집무실을 나가 버린 후, 솔레아는 문밖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이안에게 명령했다.
“이안. 그간 잘해 줘서 고마워요. 양모 수입 라인을 가져오게 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예요.”
“전 뭘 하면 될까요?”
솔레아는 은은하게 웃으며 이안의 손을 잡았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지금처럼, 욕심 있게 사업을 키워 줘요. 베르고를 버리지 말고. 이 말이 하고 싶었어요.”
공녀님이 이상했다.
마치 죽으러 가기 전 모든 걸 정리하는 사람 같았다.
흔들림도, 미련도 없는 말끔한 표정을 바라보던 이안은 솔레아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공녀님, 왜 이러세요? 이상해요. 정말…… 이상해요.”
“이상한 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니까.”
솔레아는 서랍 안에서 이상한 모양의 기계를 꺼내 이안에게 내밀었다.
“이건 메트로놈이라는 건데, 막대가 박자에 맞춰 소리를 내며 좌우로 움직여요. 음악가들에게 꼭 필요한 거니까 고객층 정확히 잡아서 팔아요. 원래는 상단이 좀 자리 잡은 뒤에 팔까 했는데 이것도 빨리 시작하는 게 낫겠네요.”
“지금 하고 있는 통롤러 사업과 출판사도 아직 자리를 잡는 중입니다. 예술 지원 사업도 진행 중이고요. 이것까지…….”
“예술 지원 사업에 이것도 같이 연계해서 유통시켜 봐요. 판로를 전국으로 넓힐 수 있을 거예요. 이안은 할 수 있어요. 수완이 좋은 사람이니까.”
이안은 썩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메트로놈을 받아 들었다.
이상하게도 꼭 이별 선물 같았다.
“팔 때 우리 둘째 오빠 헤이먼이 만든 거라고 꼭 알려 줘요. 헤이먼의 성과라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해요. 예민하고 싸가지 없는 베르고의 ‘둘째’라고만 알려지면 아깝잖아.”
“물론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만…….”
이안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솔레아는 할 말은 다 했다며 이안의 등을 떠밀어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혼자 남은 솔레아는 고개를 들어 집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달론이 헤이먼의 입을 통해 전한 솔레아를 살려 낼 수 있다는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아마 공작님과 날 이간질해서 떼어 놓으려는 거겠지.
하지만 딸을 잃은 공작의 곁에서 계속 솔레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살아갈 순 없었다.
가족이 되자고 말해 준 티온과 그레이에겐 미안하지만 가짜는 가짜에 불과하다.
솔레아는 제 가슴을 두드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야?”
대답이 없었다.
심장이 거세게 쿵쿵 뛰려는 순간, 일정한 박자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 똑똑, 똑똑똑.
돈이었다.
“들어와.”
“……아가씨,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저택에 안 계셨다고 들었는데, 한숨도 못 주무시고 일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 돼서.”
여전히 솔레아 앞에 서면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돈은 말끝을 자꾸 흐렸다.
“돈, 마침 잘 왔어. 이거.”
“네?”
솔레아는 돈에게 작은 지도와 그림을 내밀었다.
지도에는 베르고의 남부 도시인 퀘들턴이 그려져 있었고, 그중 한 곳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림엔 작지만 정갈해 보이는 붉은 벽돌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무슨……?”
“네 집이야. 지도에 표시된 위치로 가면 이렇게 생긴 집이 있을 거고, 열쇠는 옆집에 가서 받으면 돼. 본명을 쓰긴 좀 그래서 집주인의 이름이 던이라고 말해 뒀어. 비슷하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퀘들턴이면 널 아는 사람이 없을 거야. 네 과거도, 마법사인 척 모두를 속였던 것도 모를 거고.”
“이, 이걸 갑자기 왜, 왜 주시는 거예요?”
“원래부터 주려고 마음먹었는데, 생각보다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이야. 그래도 받아.”
얼떨결에 지도를 받아 들긴 했지만 불안감에 휩싸인 돈의 심장은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제 앞에 선 아가씨가 하는 말들이 웅웅대며 귓속에서 울렸다.
“네가 나한테 도움을 준 게 너무 많아서. 계속 이렇게 모두를 속이면서 살아갈 순 없잖아. 너도 네 인생을 찾아야지.”
“시, 싫어요! 싫습니다!”
목소리를 높여 말한 돈은 들고 있던 그림과 지도를 바닥에 내던졌다.
솔레아는 아무렇지 않게 허리를 숙여 그것들을 다시 주워 들었다.
“그래도 갖고 있어. 물론 이곳으로 갈지 말지는 네 선택이지만, 적어도 이 저택에선 떠나는 게 좋을 거야.”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 주인님은 아가씨예요. 아가씨라고 부르라고 하셔서 그렇게 부르고는 있지만 저는 아가씨를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었잖아요. 쭉 아가씨만 모셨잖아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절 보내지 마세요. 아가씨, 제발.”
돈은 지도를 내미는 솔레아에게서 한 걸음 멀어지더니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보내지 마세요, 아가씨. 제가 더 잘할게요. 연기도 더 잘하고, 마, 마법도 배울게요. 서대륙어도 더 열심히 공부할게요. 보내지 마세요. 저 버리지 마세요. 제발, 아가씨.”
솔레아는 그런 돈을 묵묵히 보다가 그의 손안에 그림과 지도를 쥐여 줬다.
“버리는 거 아니야. 넌 솔레아의 노예였던 적이 없으니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돈을 보며 붉은 머리의 여자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행복해져야 돼, 돈.”
그녀는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스가 있는 제 방으로 가려는데 누군가가 거칠게 팔을 잡아 몸을 돌려세웠다.
라트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