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헤이먼은 계단을 올라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그레이에게 다가갔다.
“진짜 네가 아는 사람이야?”
“어? 어, 어. 그럴걸.”
“……그래?”
“아까부터 너 좀 이상하다.”
“뭐가?”
햇빛 아래에서 본 헤이먼의 눈동자에서 약간 초록빛이 돌았다.
“헤이먼?”
“왜.”
다시 정면에서 보니 분명히 평소와 똑같은 분홍색이지만 묘하게 이질감이 들었다.
“형, 헤이먼. 눈 똑바로 뜨고 나 봐 봐.”
그레이가 헤이먼의 눈가로 손을 뻗는 순간, 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손대지 마!”
“……왜 성질을 내.”
“지금 이딴 장난이나 칠 상황이야? 상황을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란 말이야.”
게슴츠레 눈을 뜨고 그레이를 노려보는 헤이먼의 시선에서 선명한 멸시가 느껴졌다.
원래부터 성격이 맞지 않아 간혹 말다툼을 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상대를 깔보며 싸운 적은 없었다.
분명 평소랑 다른데…….
묘한 괴리감에 그레이가 헤이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그레이. 헤이먼은 네 형이니 키울 수 없다.”
“아빠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알몸 남자 때문에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공작이 헛소리를 해 대는 바람에 심각한 생각의 맥이 끊겼다.
그레이는 진심으로 더럽다는 듯 공작을 노려봤다.
“네가 이상한 놈을 자꾸 주워 오니까 그렇지. 저번에 솔레아가 데려온 노예도 네가 사서 자유인으로 풀어 주지 않았니.”
소란을 듣고 현관으로 나온 돈이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쳐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그건 걔가 자꾸 솔레아만 졸졸 따라다니니까……. 그리고 따지자면 걔는 헤이먼이 사 왔잖아요!”
“그걸 네가 마음에 들어 할 줄은 몰랐어.”
아씨, 놀리는 거 보니까 헤이먼 맞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레이가 씩씩거리는 동안 사용인들은 설설 눈치를 보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
큰 도련님과 아가씨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엉망이 되어 돌아왔으니 목욕 시중을 들어야 할 텐데, 분위기가 심상찮아서 섣불리 올라가겠다고 나서기 어려웠다.
공작은 계단 앞에서 주춤거리는 사용인들에게 명령했다.
“내가 내려오기 전까지 2층에 아무도 올라오지 마라. 라트엘이 출근하면 대기하라고 해.”
디에르고 공작은 아들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티온의 방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말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씻지도 않고 새 옷을 입으라니. 불쾌함을 감출 수 없다.”
“아, 좀 그냥 입어. 뭘 봤는지 공작님께 말하러 가야 될 거 아니야.”
“막내야, 이 사람이 진짜 아까 그 뱀이야?”
“응, 믿기 힘들겠지만 나중에 설명할게.”
“네가 아가 불곰이구나. 반갑다.”
“……아가 불곰…….”
“뱀. 너 인사하지 말고 옷이나 마저 입어.”
“다시 말하지만 난 뱀이 아니라, 이 옷은 불편하다니까.”
공작은 분노에 가득 차 문을 열었다.
“아직도 벗고 있단 말이냐! 감히 내 딸 앞에서!”
다행히 장발 남자는 셔츠와 바지를 입은 상태이긴 했다.
조끼를 들고 있던 솔레아가 얼른 대답했다.
“공작님. 솔레아는 맨몸 안 봤어요, 눈 안 배렸어요.”
“막내야, 왜 아까부터 자꾸 솔레아라고 해?”
“형. 그거 솔레아 습관이야. 그레이는 솔레아가 그레이를 변태로 몰아 가서 너무 슬퍼!”
“아, ……그래?”
그레이가 대충 거짓말로 수습하려 했지만 마지막으로 방문을 닫고 들어온 헤이먼이 불씨를 던졌다.
“저건 솔레아가 아니니까.”
“뭐라고?”
티온은 놀라 솔레아를 바라봤다가 본능적으로 검을 꺼내 헤이먼을 겨눴다.
“형,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상해.”
전쟁터에서 오래 구르다 보니 적들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는 동물적 감각만 강해졌다.
헤이먼의 말투와 눈빛에서 기이한 괴리감과 적대감을 느낀 티온은 등을 살짝 굽히며 검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 나갈 듯한 짐승 같은 몸짓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티온은 솔레아를 당겨 제 뒤로 숨겨 버렸다.
“막내야, 앞으로 나오지 마.”
헤이먼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티온을 바라봤다.
“티온. 고작 몇 달 같이 있었다고 가짜한테 정이라도 든 거야?”
“헤이먼. 화내기 싫어. 입 다물어.”
티온이 적색 눈동자에 적의를 담고 말하자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공작은 한숨을 쉬며 두 사람 곁으로 다가섰다.
“티온, 헤이먼이 예민하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이다. 검을 내려놓으렴.”
공작의 말에 티온은 경계심을 풀긴 했지만 검을 검집에 완전히 집어넣지는 않은 채 헤이먼을 노려봤다.
이 와중에 아무스는 공작의 곁으로 다가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요!”
“아니 내가 아직 힘이 돌아오지 않아 긴가민가해서. 피 냄새가 진하게 나는데, 젊은이. 사람 죽였나?”
“한 번만 더 내게 하대하면 네가 무엇이든 간에 가만히 두지 않겠다.”
“죄송해요, 공작님. 이 사람이 왜 이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일단 차분히 하나씩 얘기해요. 야. 너 그만해.”
아무스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솔레아의 옆으로 걸어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그러자 공작이 순식간에 다가가 아무스의 멱살을 잡고 방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감히 누구한테 손을!”
“죄송해요, 공작님. 제가 앞으로 조심할게요.”
공작은 화가 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솔레아를 보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니, 네게 화난 것이 아니라…….”
벽에 부딪친 아무스는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들 난폭해.”
풀어야 할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다들 앉아서 얘기해요, 저기 소파에…….”
소파로 가려던 솔레아를 붙잡아 왼손으로 안아 올린 티온은 적의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조금씩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티온. 진정하고 앉아라. 할 얘기가 많지 않니.”
“그래, 티온. 너도…… 꼭 들어야 돼. 듣고 나면 나한테 이러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 듣겠습니다.”
티온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앉자, 솔레아는 제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얘기를 시작했다.
놀란 티온이 몸을 움찔 떨긴 했지만 그녀를 내려놓진 않았다.
내려 달라 얘기했지만 티온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촉을 곤두세우며 사방을 경계하는 탓에 결국 솔레아는 티온에게 들린 채로 말을 이어 갔다.
“여기까진 티온이 알아야 할 얘기였고……. 이제 마르실라의 집에서 본 걸 얘기할게요. 그 여자는 자기 침대 밑에 구멍을 파고 문을 만들어서 가족들의 시체를 보관하고 있었어요.”
“……시체를?”
“네. 몸이 거의 썩어 가고 있었는데도 말을 했어요. 엄마, 구해 줘. 여보, 배고파 같은 말들을요.”
“……살아난 것처럼 보였니?”
“아니요. 똑같은 말만 반복했고, 시체도 부패가 심했어요. 그냥 마력으로 그렇게 보이게끔 한 것 같아요.”
“죽은 자를 되살릴 순 없다. 내가 장담하지.”
어느새 티온의 침대로 올라가 옆으로 누운 채 팔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야. 내려와. 남의 침대에 올라가는 거 아니야.”
“……여기가 푹신한데.”
솔레아의 말에 시무룩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온 남자를 보며 헤이먼이 말했다.
“살릴 수 있다면?”
“그런 일은 없어. 있어서도 안 되고.”
단호한 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인 헤이먼이 눈을 치켜뜬 채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이름이 뭐지?”
아무스가 노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너, 이상하구나. 역겨운 냄새가 난다 했더니.”
그 순간 그레이가 제 검을 빼 들어 헤이먼의 목을 겨눴다.
“그레이! 뭐 하는 거냐!”
놀란 공작이 소파에서 일어섰지만 그레이는 굴하지 않고 아무스를 보며 말했다.
“야. 뱀. 이 새끼 형 아니지.”
“아니, 나는 뱀이 아니라…….”
“이 새끼 헤이먼 아니지!”
그레이가 큰 소리로 다시 묻자 의견이 묵살당한 아무스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분홍 머리 곤듀에게선 비린내가 난다 해서 그 냄새인 줄 알았지. 그런데 좀, 더, 음……. 깊게 역겹구나.”
“네놈 한 번만 더 내 아들에게 역겹다고 지껄이면.”
“역겹다.”
공작은 뒷목을 잡고 넘어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레이는 두 손으로 검을 쥔 채 아무스에게 물었다.
“야. 내가 칼로 베도 어제 네가 한 것처럼 안에 있는 나쁜 것만 벨 수 있어?”
“처형, 아쉽지만 그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너 썅,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 그럼 네가 해!”
어느새 티온도 다시 검으로 헤이먼을 겨냥하고 있었다.
“너희끼리 이럴 때가 아니야!”
“아버지나 정신 차리세요! 뭐가 이상한지 모르시겠어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면! 그래도! 살릴 수만 있다면!”
“이달론이 진짜로 살릴 수 있다면 바로 찾아왔겠죠! 그런데 마르실라와 아버지를 이용해서 얘 몸을 빼내려고 했잖아요!”
“……뭔가, 그래도…… 방법이 있겠지. 딸을 살릴 수 있는……. 레아를, 그런 방법이 있다면, 있기만 하다면.”
티온이 눈물 젖은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천천히 한 마디씩 말했다.
“우리끼리 솔레아의 장례를 치러요. 그리고 다시…… 살아가요. 아버지.”
그레이가 아무스에게 검 손잡이를 내밀었다.
그레이가 내민 검의 손잡이를 잡으려던 아무스가 순간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이런.”
“왜 그래?”
그레이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무스는 뱀으로 돌아갔다.
공작은 사색이 되었다.
“그레이! 남자를 키우는 것도 반대지만! 뱀으로 변하는 남자를 키우는 건 아비로서 더 반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헤이먼이 헤이먼이 아니라고요!”
“헤이먼이 헤이먼이지, 그럼 누구니! 아빠 입장에선 네 괴상한 취향이 더 시급해!”
“왜 갑자기 거기서 이성을 되찾으시는 거예요! 지금 헤이먼을 베야 한다고요!”
비소를 머금은 헤이먼이 솔레아를 보며 이죽거렸다.
“저 여자를 베야 하는 거 아니야? 쟤가 가짜잖아.”
솔레아는 헤이먼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옆구리에서 검은색 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새끼손가락만 하던 게 순식간에 커졌다.
“다행히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서 이걸로 벌레를 많이 잡았거든. 사람은 잡아 본 적이 없긴 한데 한번 해 봐야겠다.”
“그만둬라. 아가.”
“공작님. 저건 헤이먼이 아니에요. 공작님도 아시잖아요. ……헤이먼이 솔레아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걸.”
“그 큰 걸로 사람을 치면 멀쩡한 사람도 다쳐! 만약 아니면 어쩔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님의 아들이 아닌 거 같지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방망이를 들고 잠깐 고민하던 솔레아는 손잡이를 쥐는 방식을 바꿨다.
“엉덩이를 때릴까요? 만약 조종당하는 게 아니어도 멍만 좀 들고 말 거고…….”
“그게 좋겠네!”
공작이 말릴 틈도 없이 그레이가 헤이먼의 뒷목을 잡아끌고 방 한가운데로 갔다.
“얘들아! 너희 미친 게 아니고서야! 헤이먼! 그레이! 티온!”
그레이가 헤이먼의 두 팔을 잡고, 티온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헤이먼의 허리춤을 팔로 감싸 잡았다.
“얘들아! 좀! 형을 왜 때리니! 그것도 엉덩이를! 형 나이가 있는데!”
“지금 심각한 상황이에요, 아빠!”
“공작님! 제가 꼭 헤이먼을 원래대로 돌려놓을게요!”
두 손으로 방망이를 꼭 쥔 솔레아가 야구 배트를 휘두르듯 자세를 잡고 헤이먼의 엉덩이를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