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92)

98화

* * *

그레이는 굳은 표정으로 마르실라를 지하 감옥에 가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에르고 공작이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뚜벅뚜벅 소리가 들렸다.

검은 셔츠를 입었지만 소매를 걷어 올리고 단추도 끝까지 채우지 않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늘 깔끔하게 넘겨져 있던 은발도 흐트러져 있었다.

아까 솔레아와 대화한 이후로 거울 한 번 보지 않고 옷만 갈아입고 내려온 듯했다.

공작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레이의 어깨를 한 번 다독이고 감옥에 갇힌 마르실라를 바라봤다.

“그레이, 수고했다. 이만 올라가서 자렴. 곧 해가 뜰 텐데 피곤하지 않니?”

“아니에요. 아버지. 옆에 있을게요.”

“굳이 험한 모습을 볼 필요는 없잖니.”

“제가 완전히 모르는 일도 아니고……. 괜찮아요. 아버지 혼자 계시게 하고 싶지 않아요.”

공작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보기 힘들면 언제든 올라가렴. 아빠는 걱정 말고.”

“네. 아, 참 아버지.”

“응?”

“아까 마르실라가…….”

그레이는 마르실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다 간략하게 전했다.

“솔레아 상태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어요.”

“그랬구나. 알았다.”

천천히 몸을 튼 공작은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가 무릎을 꿇은 채 묶여 있는 마르실라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르실라.”

늘 잔잔한 미소로 공작을 대하던 마르실라의 주름진 얼굴에 식은땀이 비적비적 흐르고 있었다.

“읍! 으읍!”

그녀는 두 눈을 치켜뜨고 공작을 향해 신음을 뱉었지만 공작은 재갈을 빼내 줄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이런 곳에서 자네를 마주할 줄이야……. 에일린을 어렸을 때부터 모시며 자란 당신은 우리가 결혼할 때 감동받아 울기도 했고.”

“읍!”

“아이들도 모두 차별 없이 키웠고, 에일린이 먼저 떠난 후에도 저택을 지켜 줬지. 우린 참 긴 시간을 친구처럼 지냈지.”

공작은 지나간 날을 회상하듯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고마웠어. 마르실라.”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단검으로 마르실라의 오른쪽 허벅지를 찍었다.

“으읍! 으으읍!”

“내게 독을 먹이고 내 딸을 이달론에게 보내려 했던 이유가 뭘까?”

“읍! 으윽! 읍!”

마르실라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리자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버지. 마르실라 입에 물린 재갈을 빼야 대답을 할 텐데…….”

공작은 단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온화하게 웃으며 그레이를 돌아봤다.

“알고 있단다, 그레이.”

“……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보라색 눈은 반으로 곱게 접혀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어떤 기쁨도 들어 있지 않았다. 어쩐지 애처로운 미소로 공작은 씁쓸하게 답했다.

“적어도 오늘 새벽에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구나.”

그는 다시 마르실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는 마르실라의 눈에선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일린이 떠났을 때도 그렇게 울었지, 마르실라.”

“으, 읍, 흡!”

“내겐 오늘이 솔레아가 떠난 밤이니 함께 울어 줬으면 좋겠어, 친구.”

공작은 쥐고 있는 칼을 비틀었다.

“으으윽!”

눈을 부릅뜬 마르실라가 입에 재갈을 문 채로 소리를 지르며 상체를 비비 꼬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몇 줄기로 갈라져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공작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기괴한 표정으로 따라 울었다.

완전히 동이 튼 아침이 되고서야 공작은 마르실라의 재갈을 풀었다. 피범벅이 된 마르실라는 기다렸다는 듯 숨을 몰아쉬며 컥컥 마른기침을 뱉어 댔다.

“마, 말하겠, 말하겠습니다. 공작님.”

“아마 이달론이 자네의 어린 딸과 남편의 목숨을 인질로 삼아 협박을 했겠지. 우리를 가족처럼 여긴 자네가 날 배신한 이유가 돈은 아닐 거 아닌가.”

공작은 단검으로 마르실라의 허벅지를 빠르게 찔렀다가 다시 빼냈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진 마르실라는 자신이 흘린 피로 척척해진 흙바닥 위에서 버둥거리며 겨우 몸을 틀어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님, 제발,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그래. 이젠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말해 봐.”

“아가씨를 살릴 수 있습니다.”

몇 시간 내내 우느라 퉁퉁 부어 있는 데다 오른쪽 실핏줄이 터져 시뻘게진 눈에서는 확신으로 가득 찬 광기가 번들거렸다.

마르실라는 다시 한번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크게 뜬 두 눈은 깜빡거리지도 않았다.

“아가씨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공작님.”

“……죽었다고 했다.”

“살릴 수 있어요, 공작님.”

마르실라의 말은 너무 달콤해 마치 환각제를 들이부은 듯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디에르고 공작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저도 모르게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 아이가 분명 죽었다고…….”

“위대한 마법사 이달론 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단 말입니다! 아직 아가씨의 몸이 멀쩡하잖습니까!”

공작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돌려 그레이를 바라봤다.

그레이 역시 놀란 얼굴로 마르실라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감옥 안으로 들어올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리 마력이 강해도 안 되는 일이 있어. 그런 게…… 진짜 가능할 리가 없잖아.”

“살릴 수 있어요. 정말, 정말 이달론 님이 온전히 살려 주실 겁니다.”

“그럼 지금 그 아이는 어찌 되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작의 목소리에 마르실라는 자꾸만 핏물이 흘러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냈다.

“그 여자는 당연히 죽죠. 감히 우리 아가씨의 몸에 들어가 건방을 떨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작 부인, 우리 불쌍한 에일린과 닮은 얼굴로, 악마 같은 년. 당장 목을 틀어서.”

“닥쳐! 걔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여!”

그레이가 감옥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디에르고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단검을 높이 들어 마르실라의 목을 꿰뚫었다.

“나머지는 이달론에게 묻지.”

마지막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생생한 표정 그대로 죽어 버렸다.

“……아, 아버지. 이달론의 거처를 알아내야 하는데…….”

“알고 있었다면 재갈을 풀었을 때 제일 먼저 말했을 거다. 이자가 알고 있는 가장 고급 정보는 이것뿐이라는 얘기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디에르고 공작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신발에 피 묻겠다, 그레이. 이만 올라가자.”

계단을 올라가려는 순간 위에서 누군가가 아주 느린 박자로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표정의 헤이먼이었다.

“헤이먼, 올라가서 얘기하자. 여긴 대화하기에 썩 좋은 장소가 아니니.”

“아니요. 여기서 말씀드려야 해요. 위엔 듣는 귀가 있으니까요.”

“듣는 귀라니?”

이맛살을 찌푸린 공작의 물음에 헤이먼은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여자가 어떤 마법으로 저택을 장악했는지 모르니까요.”

“마법이라니, 솔레아의 몸에는 마력이 없다는 걸 알잖니.”

“숨긴 걸 겁니다.”

공작은 다소 차갑게 식은 눈으로 헤이먼에게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고작 몇 달 만에 베르고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호의적으로 변한 게 말이 안 되죠.”

“야! 그게 무슨 궤변이야!”

그레이의 윽박에도 헤이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절한 얼굴로 디에르고의 팔뚝을 붙잡았다.

“아버지. 평범한 마법사는 사람의 마음까지 조종하진 못합니다. 그건 저주 받은 마력으로 만들어 낸 괴물이에요. 수백 개의 통롤러를 만들어 내고도 전혀 지치지 않는 게, 평생 동안 유지 가능한 마법을 넣은 염색 양모 제품을 만드는 게 마력 없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솔레아가 데려온 서대륙의 마법사가.”

“아버지. 서대륙의 마법사는 모두 죽었습니다.”

“나도 알아봤다. 그중 몇몇은 도망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도 있더구나.”

“아니요, 다 죽었습니다.”

어쩐지 헤이먼의 말끝에 무게가 실려 섬뜩하게 느껴졌다.

“……솔레아를 위해서라도, 그 여자를 빨리 솔레아의 몸에서 빼내야 합니다.”

“형, 무슨 소리야!”

말없이 서 있는 공작의 모습에 다급해진 그레이가 헤이먼 앞을 가로막으며 공작에게 말했다.

“아버지, 헤이먼이 한 말은 그저 추측이에요. 아까 솔레아한테 들으셨잖아요. 정령들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그레이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헤이먼이 목을 쭉 빼고, 상기된 얼굴로 되물었다.

“걔가 그렇게 말했어? 정령들과 대화가 가능하대?”

헤이먼은 보물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헤이먼?”

소름이 끼친 그레이가 헤이먼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황급히 표정을 굳혔다.

“왜.”

“너 방금…….”

그때 위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세상에나! 이를 어째! 괜찮으신가요?”

“어딜 나갔다 오신 거예요!”

공작은 두 아들의 어깨를 다독인 후 그들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일단 다들 올라가자.”

지하실에서 올라와 중앙 현관으로 가니 먼지를 뒤집어쓴 솔레아와 티온,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티온의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어!”

그레이가 삿대질하며 소리를 지르자 검은색의 장발 사내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다시 보니 반갑다. 처형. 이렇게 간헐적으로 내 힘이 돌아오나 보더군. 지금은 겨우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말이야.”

디에르고 공작의 귀에는 그레이가 수수께끼의 남자와 인사를 나누는 소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뛰어가 두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얘들아, 다치지 않았니? 티온은. 솔레아는? 괜찮은 거야?”

티온은 늘 그랬듯 미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솔레아 역시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려 무덤덤하게 화답했다.

“걱정 마세요, 공작님. 솔레아 몸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어요.”

“아니, 난…….”

솔레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이어 말했다.

“믿어 주세요. 절대로 상처 입히지 않을게요.”

솔레아는 티 없이 맑은 표정이었다. 어떤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없는 눈으로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솔레아’의 안전을 약속하고 있었다.

디에르고는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달싹였지만 어떤 말도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검은 머리 사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씻고 싶다.”

“뭐?”

“더러운 마력을 온몸으로 받아 냈다. 젊은이, 자네가 이 사람들 중 가장 높은 인물 같은데 욕실을 빌려주게.”

공작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젊은이라니?

애가 몇인데 젊은이라니. 심지어 그 애들도 다 컸는데.

“자네 지금 무슨 소릴…….”

“얘가 좀 아파요!”

솔레아가 얼른 끼어들어 사내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악! 아프다!”

그러고 보니 코트 아래로 맨다리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공작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레아! 이런 제정신도 아닌 난잡한 남자를 집에 데려오다니! 티온, 가만히 두고 본 거냐!”

당황한 공작이 저도 모르게 평소 말투로 솔레아에게 소리치자 티온이 얼른 대답했다.

“이 남자는 사실 비앰…….”

솔레아는 손날을 세워 티온의 목울대를 후려쳤다.

“억!”

뱀이니, 용이니 떠들기엔 현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티온도 아프대요! 공작님!”

“대체 그 헐벗은 남자를 왜 데려온 거니! 솔레아!”

솔레아는 남자 둘을 끌고 계단을 올라가며 큰 소리로 답했다.

“그레이가 키우는 남자예요!”

사람들의 시선이 그레이에게 쏠렸다.

“그, 네, 뭐. 예, 뭐. 나쁘지 않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네, 조심스럽게. 해 봤는데, 하하하. 웃기죠? 네, 저도. 남자는 처음 키워 보는데요. 남자를 키운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하하, 하…….”

그레이가 두 손을 깍지 낀 채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다 작게 중얼거렸다.

가만 안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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