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피를 토할 것처럼 악을 쓰는 마르실라의 목소리에 저택 곳곳에서 사용인들이 튀어나왔다.
그레이가 마르실라를 기절시켰는지 더 이상 비명은 들리지 않았지만 정원으로 나온 이들 대부분이 이미 무언가 이상하단 것을 눈치챈 이후였다.
“방금 마르실라 님 목소리 아니었어요?”
“대체 누구한테 욕을 하신 거예요?”
“아가씨인가? 저기 서 계시잖아.”
“예끼, 이 사람아. 누가 아가씨께 욕을 해. 내 보니까 아가씨도 구경 나오신 것 같은데.”
“그런데 마르실라 님이 맞긴 한 거야? 생전 욕하신 적이 없으셨잖아.”
“에이, 아니겠지. 마르실라 님이 욕하실 일이 뭐가 있어.”
“하긴 그것도 그래.”
마르실라가 아닐 거라 확정 짓는 사람들이 답답했는지 앤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솔레아가 앤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마, 앤. 그냥 기다려.”
주변을 의식했는지 앤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 소곤거렸다.
“……근데 방금은 진짜 이상했잖아요. 아가씨한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이해가 안 가고요.”
“앤, 너 마르실라의 집이 어딘지 알아?”
“아…… 네, 예전에 심부름을 하느라 한 번 가 본 적이 있어요. 근데 한 3년 전이라…….”
“어디야?”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아마 앙거튼 언덕 아래일 거예요.”
“더 자세히.”
“모리슨 정육점 뒷길로 들어가서 쭉 걷다 보면 ‘애커만’이라고 적힌 우체통이 있는데 그걸 기준으로 오른쪽 집이요. 엄청 복잡한데, 제가 말씀드린 대로 가시면 쉽게 찾으실 거예요! 앗, 지금 가시게요? 잠시만요. 외투 좀 챙기고.”
“넌 여기에 있어.”
“예?”
“있어, 앤. 위험하니까.”
솔레아는 앤을 내버려 두고 혼자서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마침 방에서 나온 티온이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솔레아를 바라봤다.
“막내, 방금 누가 소리를…….”
“티온, 검 챙겨.”
“……응.”
다급해 보이는 솔레아의 얼굴에 티온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옆구리에 검을 찼다.
“마도구 중에 방어 뭐 어쩌구 있으면 챙기고.”
“응.”
“조용히 나랑 둘이 나가는 거야.”
“응.”
반대편 복도 끝의 작은 계단을 향해 걷던 솔레아는 우뚝 멈춰 선 채 티온을 향해 뒤돌았다.
“너…… 파충류 무서워해?”
“조금…….”
“그럼 조금 참아 봐.”
티온은 티 나지 않게 조금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울상을 지었지만 솔레아에겐 지금 아가 불곰을 어르고 달랠 시간이 없었다.
솔레아는 제 방으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마치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검은 뱀이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운 채 문 앞에서 솔레아를 반겼다.
“아무스, 이리 와.”
쉬익!
“……뱀 키워?”
“아니! 그레이 뱀이야!”
“왜, 왜 데려가……?”
“지금 필요해!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저기 뭐야, 어, 대단한 뱀이야! 산책해야 되거든.”
“검은 뱀은 처음 봐…….”
“멸종 위기종이라 그래. 자, 빨리!”
아무스를 어깨에 두른 솔레아는 티온과 함께 작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마차, 아니 말 가져와. 티온.”
“응.”
티온은 이번에도 군말 없이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공녀님! 안녕하세요!”
정원 근처를 돌던 경비병들이 활짝 웃으며 솔레아에게 다가왔다.
“야심한 시각에 뭐 하, 악! 뱀이다!”
“내가 키우는 거 아니고 그레이가 키우는 뱀! 산책시키려고 데리고 나왔어! 검은색 뱀은 처음 보지? 멸종 위기종이라서 그래. 자, 해산!”
“네. 바쁘신가 봐요…….”
평소 같으면 농담도 하고, 따듯한 말도 건넸을 솔레아가 빠르게 말을 쏟아 낸 뒤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경비병들은 티온보다는 티 나게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후 솔레아에게 인사하고 멀어졌다.
“아!”
솔레아는 마구간과 붙어 있는 연무장 방향으로 뛰었다.
몸이 흔들리자 아무스가 입을 쩍 벌려 솔레아의 머리를 깨물었다.
쉬익! 쉬익! 쒸익!
“아! 좀! 용이 무슨 멀미를 한다고! 가만히 있어!”
연무장에는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공녀님!”
“와! 공녀님이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 우악! 뱀!”
“큰 뱀!”
“어, 엄청 크지? 내가 키우는 거 아니고 그레이가 키우는 뱀이야. 오늘 마침 밤공기가 딱 좋은데 하필 그레이가 바빠서 내가 산책시키려고 데리고 나왔어, 뱀도 산책을 한다, 참 좋은 세상이지? 검은색 뱀은 멸종 위기종이니까 만지지 말고. 자, 이 중에서 몇 명, 아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헤이먼 방으로 가 줘.”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잘 못 슴다?”
“헤이먼 방으로. 모두. 가.”
“예!”
“가서 뭐 할까요?”
“헤이먼을 지켜. 몸이 안 좋아 보인다든지, 눈알 색이 변한다든지, 갑자기 몸에 구멍이 난 것마냥 마력이 줄줄 샌다든지, 아무튼 이상 있으면 바로 공작님 부르고.”
마르실라가 공격적으로 나온 이상, 이달론에게 직접 마력을 공급받는 헤이먼이 멀쩡할 리 없었다.
때마침 티온이 말 두 마리를 끌고 빠르게 걸어왔다.
“티온! 빨리 와! 나 말 못 타니까 오빠가 태워 줘!”
티온은 환한 얼굴로 웃으며 말고삐 하나를 내팽개치고 검은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곤 빠른 속도로 달려오며 솔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당황한 솔레아가 얼떨결에 팔을 내밀자 몸을 기울인 티온이 한 팔로 솔레아를 안아 올려 제 앞에 태웠다.
“악! 너무 무서워!”
쉬익! 쒸익!
떨어질 뻔했는지 팔에 겨우 매달린 아무스가 씩씩거리며 티온의 머리통을 앙앙 깨물었다.
“막내야, 얘가 나 물어.”
“……뱀이 원래 좀 상도덕이 없어. 짐승이잖아.”
쒹!
이번엔 아무스가 솔레아의 정수리를 낑낑거리며 깨물었다.
솔레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티온. 앙거튼 언덕 아래의 모리슨 정육점 뒷길로 가야 돼. 길 알아?”
“알아. 나 이 동네에서 컸잖아.”
티온은 자랑스럽게 대답한 후 빠르게 말을 몰았다.
잔디를 파헤치며 정원을 가로지르는 티온의 말을 보며 기사들은 조용히 말했다.
“대장 원래 옛날에 살았던 동네 싫어하지 않으셨나?”
“……공녀님이 물어보시면 괜찮으신가 보지.”
“……그, 일단, 뭐, 우린 도련님 방으로 가자.”
“그래. 지키라고 하셨으니까.”
“공녀님이 시키셨으니까 가자.”
맬다는 이미 저택 입구에 가 있었다.
“야, 이 시키들아! 빨리 왁! 공녀님 말 거역했다가 큰일 나고 싶억! 뛰어!”
“저 새낀 얼마 전부터 대체 왜 저러는 거야.”
* * *
앤이 가르쳐 준 곳에 정확히 ‘애커만’이라고 적힌 우체통이 있었다.
오른편에 있는 집 문을 당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문이 안 열리잖아?”
솔레아의 뒤에 서 있던 티온이 문을 밀었다. 파사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미는 문인가 봐.”
“……어.”
그럴 리가. 네가 방금 부순 거겠지.
솔레아는 당황한 마음을 빠르게 가라앉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평생 동안 베르고에 충성을 바쳤던 마르실라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제 주인이 아끼던 딸을 남에게 갖다 바칠 리가 없었다.
마르실라는 분명 내가 죽어야 아가씨가 돌아온다고 했어.
하지만 정령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솔레아는 죽었다고 했어.
이달론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그 사실을 공작님께 알렸으면 알렸지 마르실라가 제 손으로 주인에게 독을 먹일 이유는 못 돼.
더 간절한 이유가 있는 거야.
“여긴 왜 왔어, 막내야?”
“증거를 찾으려고. 좀 수상해 보이는 거 찾아봐.”
내내 솔레아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던 아무스가 스르륵 몸을 움직여 내려오더니 나무 바닥 위를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뭔가 느껴져?!”
그러고는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안락한 자리가 느껴졌니?”
쉬익!
“뭐가 또 불만이니?”
쒸익!
아무스가 긴 꼬리로 침대를 팡팡 내리쳤다.
“당연히 내 방 침대가 더 편하겠지. 비싼 거잖아.”
솔레아는 방 이곳저곳을 뒤지며 대충 대답했지만 아무스는 계속 꼬리로 침대를 내려쳤다.
쉬익! 쒸익! 쒹!
주방과 화장실, 창고를 모두 샅샅이 살펴본 티온은 아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곳으로 걸어갔다.
“침대 옮겨 줄까?”
아무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머리를 끄덕였다.
티온이 커다란 침대를 잡고 질질 끌자 침대가 있던 자리 바닥에 뚫린 문이 드러났다.
“막내야. 여기 문.”
“문?!”
다른 곳을 살피다가 헐레벌떡 뛰어온 솔레아는 작은 홈이 파인 손잡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연다.”
아무스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그곳을 응시했고, 티온은 검을 손에 쥔 채 가만히 대기했다.
길게 심호흡을 한 솔레아는 순식간에 바닥의 문을 열어젖혔다.
온통 검어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뭐지?”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솔레아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아무스가 입을 쩍 벌렸다.
샤아아아―
뱀 특유의 위협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검은 안개가 걷혔다.
두 구의 시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악!”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솔레아를 붙잡아 안아 올린 티온은 유심히 시체들을 살펴봤다.
퍼렇다 못해 시커멓게 변해 썩고 있었지만 살이 썩는 악취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이상해. 살 썩는 냄새가 안 나.”
“……그러네.”
저도 모르게 티온의 머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있던 솔레아는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와 시체를 살펴봤다.
하나는 나이가 꽤 많은 중년의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이제 겨우 열셋, 열넷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티온은 손을 뻗어 그들의 목에 가져다 댔다. 맥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죽었어.”
“근데 왜 시체를 여기다 둔 거지?”
그 순간 시체 두 구가 동시에 눈을 떴다.
놀란 솔레아가 입을 틀어막았고 티온은 빠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시체들에게 검을 겨눴다.
초점도 맞지 않는 누렇게 썩은 네 개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찾듯 사방팔방으로 흔들렸다.
밖으로 돌출된 안구는 금방이라도 관자놀이 옆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여보. 배고파.”
“엄마. 살려 줘.”
“여보, 어디 있어?”
“엄마, 구해 줘.”
썩어 버린 살점 사이로 드러난 성하지 않은 치아들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 말투였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응당 있어야 할 여백이나 말의 높낮이 같은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약간 드러난 턱뼈를 움직이며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구해 줘.”
“엄마.”
“여보.”
“구해 줘.”
“배고파.”
“살려 줘.”
“여보.”
징그러울 정도로 푸른 초록빛이 시체들의 썩은 살점 사이로 반짝거리며 새어 나왔다.
티온과 솔레아는 얼른 코와 입을 막고 뒤로 물러났지만 초록색의 안개가 번지듯 다가오는 것이 더 빨랐다.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아까 부쉈던 문이 열리지 않았다.
티온이 다급하게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더니 솔레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티온, 뭐 해!”
“껴, 얼른!”
처음으로 솔레아에게 고함을 친 티온은 솔레아의 엄지에 반지를 끼우곤 부드럽게 웃었다.
“마력 방어 도구야.”
“너는?!”
“나 안 죽을게. 우리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잖아.”
티온이 환한 미소를 짓는 동시에 초록색 안개가 그들의 위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