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한참을 운 공작은 솔레아의 두 손을 부여잡은 채 죽은 나무처럼 미동도 없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야심한 밤이 되고서야 솔레아를 잡고 있는 공작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짙은 자안에 분노와 살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솔레아의 방에 들이닥쳤을 때처럼 모든 것을 불태울 것 같은 열띤 온도는 아니었다.
꾸며지지 않은 디에르고의 살기는 훨씬 잠잠하고 고요했다.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내 감정을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었다. 너를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이건 누구 짓이지?”
“공작님은 마력에 조종당하셨어요.”
공작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달론이냐?”
“네.”
“마르실라가 도왔을 테고?”
“……네. 심증은 그렇지만 정확한 증거는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잡아 와. 손톱을 뽑든, 눈을 빼내든 하면 진실을 뱉어 내겠지.”
자식을 앞세운 아비의 심장은 갈 길을 잃고 망연히 시들었다. 생기가 사라진 자리엔 살기만 가득했다.
디에르고는 잡고 있던 솔레아의 두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으니 돌아가라.”
“……아버지! 돌아가라니요. 솔레아는.”
“그레이.”
그레이의 말을 끊은 디에르고는 잠긴 목소리로 먹먹하게 말했다.
“솔레아는…… 이제 없다.”
디에르고는 고개를 숙여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솔레아를 바라봤다.
“바보같이 딸을 못 알아본 죄는 죽은 후에 직접 비마. 그러니 너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거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스했으나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당황한 그레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돌아서는 디에르고를 말리려는 순간, 솔레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심하게 바라보는 디에르고를 마주한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밤이네요.”
“……뭐?”
“아까 저를 검으로 찌르려고 하셨죠.”
방구석으로 걸어간 솔레아는 벽에 걸린 검을 빼 들었다.
“야, 너 뭐 해!”
솔레아는 그레이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몇 달간 이 집에서 살며 알게 되었는데, 벌레들이 피를 좋아하더라고요. 제가 약해지니 그런가 봐요.”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쥔 솔레아는 서슬 퍼렇게 빛나는 검날을 왼손으로 감아쥐고서 단번에 손바닥을 그었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솔레아!”
“뭐 하는 짓이야!”
두 사람의 비명이 울리는 동시에 핏방울이 카펫을 적셨다.
솔레아가 왼손을 꾹 말아 쥐자 새빨간 피가 주먹 사이로 새어 나와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너 진짜 미쳤어?! 왜 그래!”
그레이가 다가오려 하자 솔레아는 피범벅이 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벌레가 나타났다.
그레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봤지만 공작에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얘들아, 공작님께 보여 드려.”
‘그래도 돼?’
‘진짜 그래도 돼?’
‘평범한 인간인데!’
‘검의 주인도 아닌데!’
“지금 잠깐이면 돼.”
“왜 혼잣말을 하는 거…… 이건 대체.”
솔레아에게 말을 걸던 공작의 시야에 번쩍하는 빛과 함께 검은 벌레들이 가득 들어왔다.
검을 들고 있던 솔레아는 검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옆구리에 차고 있던 작은 방망이를 꺼내 휘둘렀다.
검은 방망이는 금세 커다랗게 변했다.
솔레아는 아무런 말 없이 방을 날아다니는 검은 벌레들을 쳐 죽였다.
벌레를 모두 죽인 뒤 솔레아는 방망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공작에게 무릎을 꿇었다.
“저는 정령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움을 받기도 해요. 이 능력으로 베르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달론을 잡을 수도 있을 겁니다.”
빠르게 말을 뱉은 솔레아는 말없이 서 있는 공작의 시선을 끈질기게 좇으며 이어 말했다.
“이 몸으로 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겠습니다.”
“야!”
그레이가 솔레아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공작이 아들의 손목을 쥐고 그를 막았다.
“네 뜻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난 딸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 솔레아가 누렸어야 할 행복을 제가 대신 누린 건 사실입니다.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디에르고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솔레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똑같은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도, 제가 알던 딸의 얼굴과는 너무나 다르게 보였다.
그런데 저 눈만은.
짙고 어두운 보라색 눈만은 제 것과 똑같았다.
“공작님의 가족을.”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자안이 느리게 깜빡였다.
“솔레아가 사랑한 가족들을 저도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솔레아와 똑같지만, 결코 솔레아가 될 수 없는 여자가 자신만의 견고하고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작은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나붓하게 말했다.
“알았으니 앞으론 다치지 마라.”
“네.”
“……그건 네 몸이 아니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족하다는 듯 솔레아는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부드럽게 답했다.
“아빠!”
공작에게 붙잡혀 있던 그레이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쟤가 몇 달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잖아요! 잠도 안 자면서 공부하고, 끼니도 겨우 챙기고, 매일 졸려 죽겠다는 눈을 하고서도 운동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욕하면 달려들어서 싸우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쓰린 눈빛으로 그레이를 바라보던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를 응시했다.
“아이야.”
“……네, 공작님.”
“……나는 방금 딸을 잃었고,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매정하게 들리겠지만, 네가 아무리 똑같이 생겼어도…….”
“네, 공작님. 알아요. 아무리 똑같이 생겼어도 저는 솔레아가 될 수 없죠.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제 그만 일어나렴.”
피곤한 듯 한숨을 쉰 디에르고는 침대에 걸터앉은 후 말했다.
“그레이, 가서 마르실라를 잡아 와. 도망치려 하면 두 다리를 잘라서라도 데려와라.”
그레이가 솔레아와 공작을 번갈아 보며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자 공작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서.”
“……마르실라를 통해서 이달론의 거처를 알아내시게요? 그자는 정해진 거처도 없고, 저택에 찾아오는 날이 아니면 목격했다는 사람도 없는 귀신같은 놈이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도 내내 꺼리셨고. ……그런데 마르실라가 쉽게 얘기를 할까요?”
“나 역시 쉽게 물어볼 생각은 없다.”
공작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해진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말없이 가만히 서 있던 그레이는 빠르게 방을 나섰다.
끼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방 안엔 솔레아와 공작 단둘만 남았다.
공작은 솔레아의 모습을 뇌리에 깊이 박아 놓듯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방망이가 무겁진 않니?”
“다행히 정령들이 가볍게 만들어 줬어요.”
“그런데도 꽤 파괴력이 있어 보이더구나.”
“벌레들에게 반응해서요.”
“그렇구나.”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공작을 향해 솔레아는 안심하라는 듯 다정하게 말했다.
“솔레아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할게요.”
공작이 무어라 답하기 전 솔레아는 이어 말했다.
“공작님 ……힘드시겠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저를 솔레아라 불러 주세요. 주변 사람들이 의심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돌아가기 전까지만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공작을 보고 솔레아는 방을 나섰다.
“얘들아. 이달론이 있는 곳을 찾아내 줘. 대략적이라도 괜찮으니까.”
‘그런데 저번에 때리러 갔을 때도 멀리서만 볼 수 있고 다가갈 순 없었는데!’
“그래, 위치만 알려 줘.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임시 주인이 미끼가 될 거야?’
“아니.”
‘다행이다!’
‘그건 너무 무섭잖아! 다행이야!’
솔레아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이건 솔레아의 몸이잖아. 그럴 순 없지.”
정령들이 무어라 빠르게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지만 솔레아에겐 들리지 않았다.
방문을 열자 커다란 검은 뱀이 보란 듯이 침대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던 뱀은 솔레아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을 뜨고 머리를 들어 올렸다.
“……안녕.”
인사를 건넨 솔레아는 다리를 질질 끌며 침대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방 안의 공기가 유독 낯설게 느껴져 숨 쉬는 것이 버거웠다. 솔레아는 신경 써서 숨을 들이마셨다가 조금씩 나눠 뱉었지만 그래도 가슴 어딘가에 물이 들어찬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똬리를 풀고 이불 위를 기어 온 아무스가 솔레아의 팔을 타고 어깨 위로 올라와 머리를 기댔다.
아무스의 시원한 체온이 솔레아의 목 언저리에 닿았다. 솔레아는 아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
“공작님은 참 다정하신 분 같아. 나였으면 당장 쫓아냈을 텐데. 아, 하긴. 원래 가족보다 더 나으니까 좋아했겠다. 하하.”
아무스가 긴 혀를 밖으로 내밀어 솔레아의 눈꼬리를 살짝 핥았다.
“야. 너 지금 뱀 모습이라서 내가 가만히 참고 두고 보는 거지. 사람이었으면 패대기쳤어.”
웃음기를 머금고 농담을 건넸지만 아무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솔레아의 눈꼬리를 핥았다.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일기장으로 시선을 옮긴 솔레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주저앉아 일기장을 펼치니 공백이었던 곳에 새로운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마르실라는 왜 이달론의 편에 섰을까.
그러게.
에일린 일던 공작 부인이 디에르고 공작과 결혼하기 전부터 그녀를 모시던 충직한 하녀였는데.
무슨 이유로 이달론의 편에 서서 ‘솔레아’의 몸을 노리게 된 거지.
약점을 잡혔나?
솔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달렸다.
멀리서 걸어오던 앤이 솔레아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뛰어왔다.
꼴이 엉망인 걸 보니 맨바닥에서 구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가씨! 마르실라 님이 뒷문 쪽으로 가고 있는데, 그레이 도련님이 뛰어오셔서! 그래서 왠지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마르실라 님 여기 있다고 붙잡고 소리 질렀더니! 아니, 그래서 잡히긴 했는데! 마르실라 님이 발버둥을 치다가!”
“어디 있어, 그 여자!”
앤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저택 밖에서 귀를 찢어 놓을 듯한 께름칙한 비명이 들려왔다.
“이거 놔아아악! 놓으란 말이야!”
솔레아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정원으로 향했다.
네 명의 기사들에게 붙잡혀 있는데도 마르실라는 온몸을 뒤틀어 가며 피를 토할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놔! 가야 한다고, 놔! 놓으라고, 제발, 놔!!”
악귀라도 들린 듯 마르실라는 관절을 꺾어 가며 발버둥 쳤다.
밧줄로 몸을 묶는 것조차 여의치 않아 보였다.
“집, 집에 가야 한다니까! 놔! 놓으란 말이야!”
“네 가족은 어디 있지?”
솔레아의 물음에 마르실라가 괴성을 멈추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침을 뱉었다.
“악마 같은 년. 남의 몸을 꿰차고 들어앉아서 희희낙락, 즐거웠니?”
“무슨 미친 소리야! 입 막아!”
당황한 그레이가 밧줄로 마르실라의 입을 막았지만 마르실라는 밧줄을 입에 문 채 침을 줄줄 흘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히가! 둑어야! 아앗시가! 도라온다고!”
그녀는 정원 뒤뜰의 지하실 입구로 끌려가면서도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히가 둑어야 해! 히가 죽어야! 데다리로 도라와! 너은 둑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