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92)

95화

눈을 동그랗게 뜬 솔레아가 그레이를 보며 작게 물었다.

“……네, 네가 키우게?”

“그렇다고 네 방에 두고 나갈 순 없잖아. 이, 이…… 변태 새끼를.”

검은 뱀은 반갑다는 듯 혀를 날름거리며 그레이에게 기어 왔다.

“어우, 씨.”

그레이가 질색하자 마르실라가 빗자루를 든 손을 바들바들 떨며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도, 도련님이 키우시는 뱀이라고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세상에, 공작님은 왜 쓰러져 계세요? 모건! 이봐!”

뱀을 보고 안색이 잿빛으로 변한 마르실라는 집사장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고, 공작님 괜찮으신가요? 제 목소리 드, 들리세요?! 공작님이 왜 아가씨 방에 쓰러져 계신 거예요?”

그때 검은 뱀 아무스가 몸을 세우며 마르실라를 향해 입을 쩌억 벌렸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레이의 머릿속에 아무스가 방금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제일 먼저 문을 여는 자가 공작에게 독을 먹인 사람이다.’

마르실라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모건과 앤, 다른 하인들이 달려왔다.

그레이는 한 팔로 솔레아를 안은 채 마르실라를 보며 물었다.

“마르실라. 솔레아의 방엔 왜 왔어?”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아가씨께서 안색이 안 좋으셔서 혹시 어디가 불편하신 건 아닌지 여쭤보려고 왔죠.”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마르실라의 눈은 진실해 보였다.

방 안으로 들어온 모건과 다른 하인들은 공작을 조심스럽게 업어서 다른 방으로 옮겼다.

앤은 엉망이 된 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솔레아에게 곧장 다가갔다.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혹시 또 발작이라도 하셨어요?”

기억을 잃은 솔레아가 펄쩍펄쩍 뛰던 때를 떠올렸는지 앤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또 어디가 아프세요? 대체 어디가 아프신 건데요. 흑, 아니, 아프시면 저한테 말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아냐, 난 괜찮아. 괜찮으니까…….”

솔레아는 공작을 따라가는 마르실라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앤의 귀에 속삭였다.

“앤, 마르실라를 따라가 봐.”

“왜 마르실.”

“쉿. 자연스럽게. 얼른.”

“네.”

사명감을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던 앤이 뒤늦게 뱀을 발견하고는 제자리에서 높게 뛰어올랐다.

“뱀!”

“어, 내가 키울 거야.”

차분한 그레이의 말에도 앤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저, 저 아가씨가 가래서 가지만……. 뱀은, 뱀은 조금 그래요. 아니, 도련님. 뱀을 왜…….”

“얼른 가 봐.”

“네……. 그래도 뱀은 조금. 왜 하필…….”

“얼른.”

방을 나서면서도 앤은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계속 뒤를 힐끔거렸다.

앤이 나가자마자 솔레아는 일어나 문을 닫았다.

“이달론이야.”

“뭐?”

“내 목숨을 노리는 거, 이달론일 거라고.”

“……네 목숨을 왜 노려? 그 사람 좀 음침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헤이먼의 마법 선생이잖아.”

“헤이먼도 그 사람한테 이용당하고 있어. 나를 노리는 이유는…… 내가 마력이 없어서 그럴 거야.”

“잠깐만. 이해가 안 되는데. 마력이 없는 거야 마법사가 아니니까 당연하잖아.”

“아니야. 마법서 중 금서로 지정된 것들이 있는데 거기 보면 모든 인간은 각자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돼 있어. 아마 그게 생명력인 거겠지. 그걸로 소드 마스터가 되는 사람도 있고, 각자의 특출난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고 그러나 봐. 그런데 난 다른 세상에서 와서 마력이 없어. 나는 이쪽 세계의 생명이 아니니까.”

“……아, 뭐 그래, 그렇다 치자. 근데 마력도 없는 널 왜 노리는데? 그 이유가 뭐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뭐?”

“……그동안 온갖 책을 다 뒤져 보고 암암리에 마법사들을 만나 물어보기도 해 봤어. 정령들한테도 물었고. 그런데 어디서도 답을 못 찾았어.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솔레아의 말을 들은 그레이는 바닥에 팔자 좋게 늘어져 있던 뱀의 목을 쥐어 올렸다.

“넌 알아?”

뱀이 혀를 내밀며 쉬익― 소리를 냈다.

“알면 혀 한 번 날름, 모르면 두 번 날름.”

쉬익― 쉬익―

“으이그. 네가 무슨 용이냐, 뱀이지.”

쉬이이이이익―

항의하듯 뱀 아무스가 혀를 길게 날름거리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숨어 있던 정령들이 다시 나타나 그레이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악!”

“우리 주인 욕하지 마!”

“우리 주인 뱀 아니야!”

“우리 주인 용이야!”

“주인 엄청 큰 용이야!”

“꼬마 호랑이 나이도 어린 게!”

“새파랗게 어린 게!”

“아까 태어난 주제에!”

“아악! 아야! 좀! 그만! 아!”

그레이가 벌을 쫓듯 머리 위로 손을 마구 휘젓는 동안 아무스는 그의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와 솔레아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안락하게 똬리를 튼 아무스를 발견한 그레이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넌 어디 남의 동생 침대 위에 올라가!”

뱀의 꼬리를 잡고 주욱 바닥으로 떨어뜨리자 아무스가 분하다는 듯 몸을 세우고 다시 쉬익거렸다.

“네가 상식이 있는 인간이면, 아니 용이건 뱀이건 간에, 다짜고짜 남의 침대 위에 올라가면 안 되지.”

쉬익―

“너 같은 놈한텐 내 동생 못 줘. 이 덜떨어진 변태 놈아.”

쉬익!

“화낸다고 달라지냐? 너 같으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놈이 ‘동생을 주십시오.’ 해도 모자랄 판에 ‘네 동생이 내 짝이다.’ 하는데 마음이 가겠냐고. 이 사회성도 부족하고 몰상식한 자식아.”

쉬익! 쉬이이익! 쉬익!

“……너 방금 또 나보고 꼬마 호랑이라고 했지? 왠지 기분이 더러운데?”

그레이와 아무스가 실랑이하는 걸 보고 있던 솔레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레이.”

“어?”

“미안해. 오랫동안 네 동생인 척해서. 아까 한 말 진심이었어. 너희 가족들한테 은혜만 갚으면 바로 돌아갈게. 더 이상 동생 행세 하지도 않을 거고……. 공녀라고 건방 떨지도 않을게.”

“야. 너 그…….”

뭔가 말하려던 그레이가 쉽게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이 깨어나셨어요!”

놀란 솔레아와 그레이가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그리고 너 내 옆에 있고.”

뱀무스가 따라오려는지 쉬이익 하며 바닥을 기자 그레이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를 노려봤다.

“뱀. 너는 여기 있어야지.”

쉬익!

“네가 가 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어? 사람들 기함해서 도망이나 치지.”

쉬익― 쉬익!

“아니, 너 지금 뱀이잖아. 어? 그냥 계시라고. 대화도 안 통하잖아.”

뱀무스가 천천히 바닥을 기어가 솔레아의 다리를 휘감으려는 순간, 그레이가 또 뱀무스의 목을 잡고 솔레아에게서 떼어 냈다.

“이 새끼가! 어디 남의 동생 다리에 머리를 들이밀어! 야! 너어는, 어? 너는 진짜 어림도 없어!”

그레이는 책이 담겨 있던 커다란 상자를 뒤집어엎고 그 안에 뱀이 된 아무스를 집어넣었다.

“꼼짝 말고 있어.”

몸을 돌린 그레이가 솔레아의 손을 잡고 복도로 나갔다.

“아무스 저대로 두고 가도 돼?”

“너 쫓아다니는 놈 같은데 사라지진 않겠지. 근데 너 쟤 알아?”

“아니, 모른다니까. 이름을 봐서…… 아!”

“왜?”

“너한테 검을 선물한 그 무기 상점. 거기 할머니가 준 종이에 아무스 이름이 있었어.”

“알았어. 일단 아버지 먼저 뵌 뒤에 마르실라 뒤도 밟아 보고, 그 상점도 가 보자.”

“응.”

“……솔레아.”

“어?”

공작의 방 앞에 멈춰 선 그레이가 이름을 부르자 솔레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레이는 그런 솔레아와 시선을 맞춘 채 이미 헝클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쓰다듬었다.

“나 너 안 미워해.”

“아……. 응.”

“주눅 들지 마.”

노크를 한 뒤 공작의 방문을 열자 마르실라와 집사장 모건, 앤을 비롯해 티온과 헤이먼까지 와 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는 공작은 솔레아를 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나가.”

“아버지, 의사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됐으니 모두 나가. 솔레아와 둘이서 할 얘기가 있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움직이며 밖으로 나갔다.

앤은 솔레아에게 눈짓하며 마르실라의 뒤를 쫓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솔레아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레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커다란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세 사람이 남았다.

“넌 나가지 않을 거니, 그레이?”

“예.”

“……이미 알고 있구나.”

한숨을 쉰 공작은 자세를 고쳐 앉은 뒤 솔레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네 방으로 갔던 건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의 일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솔레아는 말없이 공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솔레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는 내가, 아니 며칠 전부터 이상했는데 혹시 말이야……. 내가 과민한 생각을 하는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저는 솔레아가 아니에요.”

공작의 말을 끊은 솔레아는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단단한 음성으로 이어 말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원래 다른 세계 사람인데 갑자기 이쪽으로 건너와 솔레아의 몸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공작은 들이마신 숨을 미처 뱉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누군가 그의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공작은 침대에 기대앉은 자세 그대로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솔레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목구멍 안을 돌아다니던 말을 겨우 꺼냈다.

“……솔레아는 죽었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공작은 찬찬히 솔레아의 얼굴을 뜯어봤다.

파르르 떨리는 얇은 눈꺼풀과 동그란 이마, 장미를 짓이긴 듯 붉은 입술과 머리카락은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딸의 모습이 맞는데.

공작의 시선은 솔레아에게 단단히 꽂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공작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트라우마가 있는 음식을 다시 잘 먹게 된 걸 거야. ……크게 앓고 난 이후 체질이 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구나.”

이불을 세게 말아 쥔 공작은 솔레아에게서 고개를 돌려 제 두 손을 내려다봤다.

“그럴 리가 없지 않니. 아무리 마법사들의 마력이 강하다 해도, 사람이 바뀔 리가. 우리 딸이 책을 많이 읽더니 상상력이 좋아졌구나.”

하지만 말과는 달리 한 마디씩 뱉을 때마다 공작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힘없이 웃으며 모른 척 부정하려 해 봤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솔레아는 죽었고, 눈앞에 선 이는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걸.

“……공작님.”

“그것 봐라, 목소리도 똑같지 않니. 솔레아……. 하하, 헤이먼이 나를 공작님이라고 부르니 너도 여덟 살 무렵인가 나를 공작님이라고 불렀단다, 기억나니?”

솔레아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공작은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 겨우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에서 떨어진 투명한 물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는 겨우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보기 버거울 정도의 힘겨운 웃음이었다.

“네 엄마가, 에일린이 네 이마에 하루에 수십 번씩 입을 맞추던 게 기억나니? 하하, 그러다 이마가 꺼질까 봐 걱정되니 나보고는 뒤통수에만 뽀뽀하라고 했는데, 재밌는 사람이지.”

“저, 아버지.”

그레이가 디에르고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그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레아,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니……?”

그리 물으며 뻗어 오는 그의 손이 너무 간절해 보여 솔레아는 하마터면 긍정의 대답을 뱉을 뻔했다.

그녀는 흉 많은 커다란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저 손안에 디에르고의 숱한 역사가 들어 있겠지만 그중 지윤의 것은 단 한 줄기도 없었다.

그게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레아, 아빠가 너를 얼마나……. 너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데, 말이 안 되잖니. 몸은 남기고 영혼만 사라진다는 게, 그렇게 죽는다는 게…….”

공작은 천천히 솔레아에게 다가왔다.

두 손을 솔레아에게 뻗었다가 차마 안지도,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 가만히 멈춘 채로 공작은 바들바들 떨었다.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가 느리게 내려왔다. 각진 턱이 거세게 다물렸다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열렸다.

“……정말 내 딸이 죽었다고? 또, 나를 두고 가 버렸다고?”

솔레아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딸인 척 행세해서 죄송해요.”

공작은 무릎을 꿇은 솔레아를 내려다보다가 그녀 앞에 주저앉았다.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음을 있는 대로 내뱉었다.

꺽꺽거리는 공작의 거북한 울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는 통곡하며 솔레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 아아……, 네가 죽은 줄도 모르고 아빠가 웃었구나. 아빠가…… 멍청하게. 어디로 갔니, 우리 딸. 아빠가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딸. 다시 돌아오렴. 아빠가 다시 잘해 볼게……. 아빠가 이번에는, 손잡고 놀러도 가고……. 불꽃놀이도 보여 주고, 뱃놀이도 가자. 솔레아. 레아…….”

디에르고 공작의 거친 손이 얼굴을 쓸어내릴 때마다 지윤의 눈에서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딸이 아니라서 죄송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