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공작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솔레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솔레아!”
그레이가 솔레아를 감싸 안은 덕에 작은 칼은 그의 어깨에 꽂혔다.
“윽!”
“오빠!”
제 아들의 어깨에 칼이 꽂혔음에도 공작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손을 뻗어 그레이의 품에 안겨 있는 솔레아의 머리채를 잡아 쥐고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아악!”
“왜 그래요!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아빠!”
그레이가 공작의 손목을 그러쥐었지만 도저히 떨쳐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공작의 칼이 오른쪽 어깨의 신경을 눌렀는지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티온! 헤이먼! 밖에 누구 없어?! 누가 아버지 좀!”
그레이는 이를 악물고 온몸으로 공작을 막으며 방문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그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방만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레이의 뒷덜미를 잡은 공작은 가공할 만한 힘으로 그를 방구석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솔레아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악! 아, 아빠!”
공작의 손에 긴 머리를 잡힌 채 끌려 나가는 솔레아의 입에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아빠! 죄송해요, 술, 술 사 올게요! 아줌, 아줌마가 외상 안 된다고 해서! 아니에요, 사 올게요! 다시 갔다 올게요! 다신 안 그럴게요! 아니에요! 아빠 무시한 적 없어요! 아빠 무시 안 했어요! 잘못했어요! 건방지게 쳐다본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설거지했어요! 냄새나면 다시 할게요! 아빠, 잘못했어요!”
“……솔레아?”
눈을 휘둥그레 뜬 그레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솔레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빠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싫어요! 추워요, 화장실 너무 추워요! 아빠 잘못했어요.”
아무스가 그레이의 검을 들고 방문 앞에 섰다.
“그리 맛있지도 않았을 텐데 독을 많이도 드셨군.”
아무스는 단숨에 검으로 공작의 몸을 갈랐다.
목에서부터 갈비뼈를 지나 허벅지까지, 온몸을 가로지르듯 검을 휘둘렀지만 공작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그의 몸 안 가득 차 있던 암녹색의 안개가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공작은 온몸에 힘을 풀고 쓰러졌지만 솔레아는 그에게서 풀려난 뒤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빠 목말라요. 아빠 배고파요. 아파요. 잘못했어요. 아니에요,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저도 사랑해요. 알아요, 제가 잘못해서 혼내신 거 알아요. 네, 다신 안 그럴게요. 네. 잘못했어요.”
아무스는 검으로 공작의 몸 한가운데를 다시 찔렀다.
기절한 공작이 마른기침을 하자 시커먼 벌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아무스는 헛소리를 하는 솔레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상하네. 짝의 몸에는 독이 없는데도 환상을 보는군.”
방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레이가 혼이 나간 표정으로 바닥을 설설 기어 왔다.
그러고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두 손을 모아 빌고 있는 솔레아의 몸을 감싸 안았다.
“괜찮아, 오빠 여기 있어. 옆에 있을게. 나 있어. 네 아빠 여기 없어. 괜찮아. 내가 계속 같이 있을게.”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네, 다신 안 그럴게요. 이제 안 그럴게요. 아빠 무시한 적 없어요.”
그레이는 넝마가 된 꼴로 웅크린 솔레아를 품에 안은 채 계속해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빠 여기 있을게. 옆에 있어. 나쁜 사람 아무도 없어. 때리는 사람 없어. 가두는 사람도 없어. 오빠가 같이 있을게. 지켜 줄게. 오빠가 계속 옆에 있어 줄게.”
솔레아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어딜 가든 같이 있을게.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게. 내 목소리 들려? 나 지금 네 옆에 있어.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두 손을 모은 채 허공을 향해 빌던 솔레아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레이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몇 분 뒤에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둘러본 뒤 자신을 힘 있게 안고 있는 그레이를 보며 눈을 천천히 깜빡이던 솔레아는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그레이의 피를 발견하곤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 어깨 어떡해. 나 때문에……. 다치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 금방 나아.”
씩 웃는 그레이의 뒤에 서 있던 아무스가 다시 고개를 갸우뚱 꺾으며 말했다.
“금방 낫지 않을 텐데? 꽤 깊이, 정확하게 찔렸다.”
“넌 새끼야. 눈치라는 게 없어?”
그레이의 말이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린 아무스는 허리를 숙여 단숨에 그레이의 어께에 꽂힌 검을 빼냈다.
“악!”
그러고는 빠르게 상처를 치료했다.
“물론 내가 치료하면 금방 낫는다. 지금은 아프지 않지?”
아무스는 매끄럽게 웃었지만 그레이와 솔레아는 전혀 웃지 않았다.
조금 시무룩해진 아무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두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짝. 왜 가만히 있었지?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너는 끌려 나갔을 거야. 너는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인데.”
솔레아를 품에 안은 그레이가 이를 갈며 아무스에게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 전에 아버지가 왜 이러시는지부터 설명해야 되는 거 아니냐?”
“네 아버지는 독에 당했다. 마력에 독을 담은 것 같은데 내가 아직 힘이 완전하지 않아 출처를 알 수 없군. 아마 내 힘을 야금야금 뜯어 간 놈과 동일인이 아닐까 싶은데.”
“그럼 지금은 괜찮으신 거야?”
“방금 봤다시피 몸에 있던 독을 빼냈다. 내 힘이 완전하지 않아서 완벽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오래 잠들어 있던 내 검을 아끼고 연마시킨 네 덕분에 빼낼 수 있었다. 꼬마 호랑이.”
“한 번만 더 나를 꼬마 호랑이라고 부르면 용이고 뭐고 네 목부터 썰어 주마.”
“……아내의 오빠를 뭐라고 부르더라? 긴 꿈을 꾸는 동안 솔레아 네가 있던 세계를 봤는데. ……처형?”
“아니 그건 아내의 언니를 말하는 거고…….”
솔레아가 정정해 주기 무섭게 그레이가 주먹으로 아무스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이 새끼가 어디 남의 여동생보고 아내래.”
“꼬……. 처형의 주먹은 아프군.”
“그건 아내의 언니를 부르는 말이라니까.”
솔레아가 또다시 정정해 주자 아무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돌렸다.
“괜찮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안 괜찮은데. 개새끼, 신경 쓰이게 하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용이다.”
“아까부터 대화가 겉도네. 너 사람이랑 대화해 본 적 없어?”
“안타깝게도.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 인간사를 이해하기가 버겁군.”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솔레아가 픽 웃자 그레이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살폈다.
“너 괜찮아?”
“응…….”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지? 그때 기억 때문에 아까 그런 거야?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입을 떼기 어려운지 솔레아가 망설이고 있자 아무스가 끼어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짝, 너는 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다. 왜 과거의 기억 때문에 힘들어하지?”
솔레아는 쓰러진 공작이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 몇 올을 바라보며 망연히 말했다.
“나 하나도 안 강해. 용기도 없어. 도망치는 것만 잘해.”
“아니, 너는 강하다. 네가 이쪽 세계로 온 이후로 나는 네 꿈을 계속 꿨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마음으로 고난을 이겨 냈는지.”
아무스의 샛노란 금빛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시련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았다. 외로워도 매일 살아 냈다. 견디고 버티며 노력했다.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왜 그걸 모르지? 방금도 정령들이 만들어 준 방망이를 휘둘렀으면 됐을 텐데. 너는 네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널 믿어.”
“……혹시 전에도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어? 뭐든지 할 수 있다든지, 믿으라든지…….”
아무스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나 기억해?”
그레이가 다시 주먹으로 아무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 용 새끼가 어디 남의 동생한테 꼬리를 쳐.”
“……꼬리는 있지만 방금 전엔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꼬리를 친다니?”
뺨을 감싸 쥔 아무스가 묻자 정령들이 끼어들었다.
“그건 알아요!”
“책에서 봤어요!”
“앤이 읽는 책에 있었어!”
“수작 부린다는 뜻이야!”
“맞아요!”
“유혹한다는 뜻이에요!”
“껄떡댄다는 거야!”
“연애하고 싶다는 목적이 있는 행동이야!”
“은밀한 속내가 있다는 거야!”
정령들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아무스의 시선이 솔레아의 바지로 향했다.
그 순간 그레이가 검지와 중지로 아무스의 두 눈을 찔러 버렸다.
“보지 마, 이 자식아!”
“……인간의 공격에 상처 입을 정도로 나약한 용은 아니나 자꾸 때리면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처형.”
“처형이라고도 부르지 말라고. 변태 새끼야.”
침울해진 아무스가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뉘엿뉘엿 능선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어. 솔레아 네가 마지막 남은 내 이름을 찾아 불러 줘. 그러면 완전히 돌아오겠다.”
“안 와도 돼, 꺼져. 꺼져.”
손을 휘휘 젓는 그레이를 바라보던 아무스가 생긋 웃었다.
“나는 꼬리를 치지 않았는데 꼬리를 친다고 받아들인 걸 보니 처형이 내게 유혹당했나 보군. 아쉽지만 내 짝은 솔레아다.”
“……다른 검으로는 네 목 벨 수 있냐?”
그레이의 말을 무시한 아무스는 솔레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공작은 이제 괜찮을 거다. 적어도 너를 밖으로 끌고 나가려 하진 않을 거야. 처형의 검이 널 지켜 줄 테니 처형과 함께 있어. 정령들도 나도 너를 공격하려는 이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잘 보이지가 않아. 온전하게 힘을 되찾으면 그땐 알 수 있겠지. 공작이 깨어난 뒤 그에게 물어보면 의심 가는 이를 찾을 수 있겠지. 시간이 별로 없어 이 정도밖에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니, 왜…….”
“그래도 여태 잘 버텨 주어 고맙다. 내 짝.”
“내가 왜 네 짝인데?”
솔레아의 질문에 아무스는 수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검은 동공을 둘러싼 노란 눈동자가 투명한 구슬처럼 반짝거렸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줬으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아무스는 자신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째려보는 그레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레이가 더럽다는 듯 쳐 냈지만 아무스는 다시 손을 올렸다.
“처형이 내가 만든 검의 주인이 됐기 때문에 정령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처형 아니라고, 새끼야.”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내 짝을 지켜 주길 바란다.”
“내 동생이 왜 네 짝이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처형과 좋은 사이가 될 것 같아 앞으로도 기대가 된다.”
“너 내 말 안 들리냐.”
“내가 비록 사회성이 부족하지만.”
“알고 있다니 놀랍다.”
“앞으로는 처형에게 많은 도움을 받겠다.”
“준다고 한 적 없어, 제발 꺼져.”
따듯한 시선으로 그레이를 보며 말하던 아무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의 두 눈에 살기가 가득 들어찼다.
“……야, 꺼지랬다고 화났냐?”
그레이의 물음에도 아무스는 표정을 굳힌 채 눈을 부릅뜨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방에 쳐져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제일 먼저 문을 여는 자가 공작에게 독을 먹인 사람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양쪽으로 벌어진 문틈 새로 연한 베이지색 드레스가 보였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마르실라였다.
“아무리 노크를 해도 답이 없으셔서, 꺅! 웬 뱀이!”
아무스가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검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마르실라가 들고 있던 빗자루로 뱀을 내리치려는 순간 그레이가 오른손을 뻗었다.
“내, 내가 키우는 뱀이야!”
“예?”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