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쿵 소리와 함께 공작의 거대한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버, 공작님!”
솔레아가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순간 남자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위험해.”
“당신 누구야! 지금 공작님한테 왜…….”
“안녕, 오랜만이야.”
“뭐?”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그레이가 뛰어 들어왔다.
“야! 솔레아! 방금 어떤 미친, 놈이 여기 있네!”
그레이가 곧장 검을 빼 들었다.
그의 눈엔 검은색 긴 머리 남자가 제 아버지를 기절시키고 솔레아를 데려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시큰둥한 말투로 솔레아를 내려다봤다.
“저 검을 왜 저자가 들고 있어? 네가 챙겼어야지.”
“검……. 검은 그레이한테 선물로 준 거니까. 아니 근데 당신 누구냐고!”
“나 알잖아, 솔레아.”
솔레아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생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등을 지나 허리까지 찰랑이고, 입술은 맑은 붉은색에 눈은 샛노란 금색이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져 있었다.
방금 전 읽었던 일기 속 이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스?”
그제야 남자가 활짝 웃었다.
“응.”
“솔레아. 아는 사람이야?”
“아니야! 모르는 사람이야! 그, 그냥 어쩌다 이름만 어디서 봤어! 지금 때려 맞힌 거야!”
그레이의 질문에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젓는 솔레아를 보며 서운하다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인 아무스는 쓰러진 공작의 몸을 넘어 그레이에게 다가갔다.
“우리 아까도 봤지?”
“너.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하는 걸 보니까 마법사 같은데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내 이름을 말한 건 솔레아지만 날 부른 건 너야. 음…… 회색 동태 눈깔.”
“뭐?”
몇 달 전 솔레아가 자신을 그리 불렀던 것을 기억해 낸 그레이가 벙찐 얼굴로 아무스를 올려다봤다.
그러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레이는 순식간에 다리에 힘을 주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은 보기 좋게 튕겨 나가고 말았다. 마치 투명한 막이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한껏 인상을 구긴 그레이가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먹히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검을 그만 휘두르는 게 좋을 거야. 검에 담기는 공격성은 내 짝이 위험하다는 신호라 공격성이 담길수록 나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니까. 뭐, 덕분에 빨리 깨어나긴 했지만.”
아무스가 요사스럽게 눈을 접어 웃었다.
“내 비늘로 만든 검을 이렇게 소중히 갈고 닦아 주다니. 고맙다. 꼬마 호랑이.”
더럽다는 듯 검을 바닥에 내팽개친 그레이가 몸을 휘청거렸다.
“나……. 나 왜 이럴까. 아무래도 악귀가 씌었나 봐. 왜 자꾸 남자가 꼬이지?”
“꼬마 호랑이. 걱정 마라. 이 검은 꼬마 호랑이의 것이지만 내 짝은 솔레아니까.”
“아, 다행……이 아니지! 이 새끼가 어딜 남의 동생한테!”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그레이가 주먹을 내질렀지만 남자는 부드럽게 피하곤 그레이를 살포시 안았다.
“듣던 대로 착한 꼬마 호랑이구나. 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갸륵하다.”
“악!”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그레이를 구하기 위해 솔레아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깡! 소리와 함께 아무스가 뒤통수를 감싸 쥐고 털썩 주저앉았다.
솔레아의 손에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검은색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너, 너, 그건 뭐야?”
“이, 이게 뭐냐면…….”
대답을 망설이는 솔레아의 주위로 빛이 반짝이더니 점점 그 양이 늘어났다.
빛들은 손바닥만 한 사람의 형태로 변하더니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우리 주인 죽었어?”
“우리 주인 죽었어?!”
“주인 죽었어!”
“이러라고 방망이 크기 조절 가능하게 만든 거 아닌데!”
“임시 주인이 우리 주인 죽였어?”
“뭐? 임시 주인이 우리 주인 죽였다고?!”
“임시 주인이 우리 주인을 패 죽였어!”
“쳐 죽였어!”
“한 방에 죽였어?!”
“대단한데?”
“앗! 저기 꼬마 호랑이가 보고 있어!”
“괜찮아! 우리 못 볼 거야! 주인이 깨어나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 없어!”
“주인 깨어났잖아!”
“아, 참!”
그레이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갔다.
“이, 이것들은 뭐야? 뭐, 뭔데!”
“들켰다!”
“들켜 버렸어!”
“꺄아아아아아!”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소음에 그레이는 상황 파악을 하지도 못하고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솔레아는 두 손을 들어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집중의 박수를!”
“짝! 짝! 짝!”
공중을 날아다니는 작은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 냈다.
“……솔레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으, 머리야. 그건 내가 설명하지, 꼬마 호랑…… 억!”
일어나려던 미친 변태의 얼굴을 걷어찬 그레이가 변태장발남을 뛰어넘고 솔레아 앞으로 다가왔다.
“솔레아. 아버지는 왜 네 방에 쓰러져 계신 거고, 이 미친놈은 누구야? 이…… 날아다니는 사람들은 또 누구고, 방망이는 어디서 꺼낸 거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우린 정령이야!”
“우리는 정령이지!”
“난 정령!”
“너만 정령이냐?”
다시 싸움이 붙은 정령들을 겨우 떼어 놓은 솔레아가 망설이는 눈으로 그레이를 바라봤다.
“너 왜 이렇게 겁을 먹었어? 아빠가 소리 지르셨어? 괜찮아? 밖에 잠깐 나가서 걷다 올래?”
그레이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던 솔레아가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솔레아가 아니야.”
“뭐?”
그레이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난, 솔레아가 아니야.”
똑같은 말을 다시 뱉은 솔레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떼어 냈다.
“공작님이…… 그걸 아시고 나를 내쫓으려고 하셨던 거고, 공작님은 아무 잘못 없으셔. 내가 다 잘못한 거야. 왜냐하면 난…… 가짜니까.”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게 말이 돼? 가짜라니…….”
솔레아에게 다시 손을 뻗던 그레이의 말끝을 미묘하게 흐려졌다.
“……그때? 기억이 사라진 그때야?”
입술을 앙다문 여자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 넌 누군데?”
차가운 목소리에 여자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진동하듯 떨렸다.
“……죄송합니다.”
“뭐?”
솔레아가 아닌 여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은혜만 갚으면 바로 돌아갈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일어나, 왜 그래.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어? 일어나라고. 네가 솔레아가 아니면 대체 누군데!”
“나는 용이다.”
“썅, 끼어들지 말고 닥치고 누워 있어! 이 변태 새끼야! 네 얘긴 나중에 들을 테니까!”
입을 다문 아무스는 조용히 누운 채 정령들에게 치료를 받았다.
꼬마 호랑이 발톱이 꽤 매섭군.
그러니까요, 주인님.
성질도 썩 좋지 않아.
평소엔 저 정도는 아니에요, 주인님.
믿기 힘들구나. 인간이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니. 대견하긴 하다만.
조용히 있진 않고 속닥거렸다.
그레이가 다시 한번 아무스를 죽여 버릴 듯 노려보자 아무스는 자연스럽게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다시 말해 봐. 네가 누구라고? 괜찮아. 소리 안 지를게. 말해 봐.”
감겨 있는 솔레아의 눈꺼풀과 그 아래에 자리한 입술이 파들거렸다.
겨우 눈을 뜨자마자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다정하게 굴지 마, 그레이.”
“뭐?”
“나한테 다정하게 굴지 말라고.”
몸을 옹송그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마치 추위를 타는 것처럼 떠는 솔레아를 내려다보던 그레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두 팔을 뻗어 솔레아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야. 떨지 좀 마. 왜 궁상을 떠냐. 천천히 말해 봐. 기다릴 테니까.”
“흐, 흐으…….”
솔레아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천천히 운을 뗐다.
나는 다른 세계에서 왔고, 돌아갈 방법을 열심히 찾는 중에 이 가족들에게 정을 주고 말았다고.
받은 게 너무 많아서 나도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일을 벌였으니 그걸 처리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일이 마무리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그게 안 되면 저택을 나가 없는 듯 살겠다고.
짧은 얘기를 끝낸 솔레아는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네 동생인 척해서 미안해…….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그럼 솔레아는, 죽은 거야?”
동그란 머리가 위아래로 짧게 끄덕여졌다.
그레이가 짙은 한숨을 뱉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힘없이 흘러내린 적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스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솔레아가 얼굴을 쳐들고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아니야. 그레이. 정말 아니야. 내가 빈 몸에 들어왔다고 했어……. 정령들이.”
정령들이 활기찬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응!”
“우리가 말해 줬어!”
“우린, 정령이니까!”
그레이가 주먹을 아스러질 듯 세게 움켜쥐었다.
“그럼 걘 죄책감만 갖고 그냥 그렇게…… 간 거네. 자기가 태어나는 바람에 나랑 형들까지 더 욕먹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그렇게. 어떻게 풀어 볼 기회도 없이, 혼자서…….”
정령 중 하나가 그레이의 어깨 위로 포르르 날아가 그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꼬마 호랑이야, 사람은 원래 죽을 때 혼자야. 살아 있는 너희들은 짧게 슬퍼하고, 길게 살아야 해.”
다른 정령이 그레이가 움켜쥔 주먹을 끌어안았다.
“꼬마 호랑이야, 울지 마. 착한 솔레아는 가기 전까지 모두를 사랑했어. 정말이야.”
벌겋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느리게 껌뻑이던 그레이가 손을 들어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가 떼어 내고 솔레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두 팔로 웅크린 몸을 감싸 안은 채 온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마치 세상에서 저를 지켜 줄 것이 제 두 팔밖에 없다는 것처럼.
“죄송해요, 제가……. 제가 죄송해요……. 여기 와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차마 그레이를 보지 못하고 연신 바닥만 보며 중얼대는 솔레아의 시야에 하얀 손수건이 들어왔다.
그레이는 손수건으로 솔레아의 얼굴을 거칠게 벅벅 문지르더니 코에 갖다 댔다.
“킁.”
“어?”
“킁, 해. 콧물 나와, 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솔레아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자 그레이가 솔레아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곤 말했다.
“네 말 안 믿는 거 아니야. 지금 상황이 너무 이것저것 엉망진창인데 네 코에 콧물이 달랑거려서 신경 쓰이잖아. 이거부터 해결하려고 그런다. 그러니까 자, 빨리 킁.”
“크, 킁.”
“너 코 한 번도 안 풀어 봤어? 소리만 내지 말고 킁! 해.”
“킁!”
“잘했어.”
씩 웃은 그레이는 손수건을 접어 말끔한 부분으로 솔레아의 코를 마저 닦아 주고는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괜찮아, 버려도 돼. 빌이 이번엔 손수건으로 노선을 틀었거든.”
“아…….”
고개를 끄덕인 솔레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그레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긴장 좀 풀렸어? 네가 너무 떠니까 난 울지도 못하겠다.”
“미, 미안해. 그레이.”
“……괜찮다고는 못 하겠는데,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내가 모시고 나갈게.”
그레이가 기절한 공작을 일으키려 손을 대는 순간, 그가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아, 깜짝이야!”
놀란 그레이가 손을 떼자마자 공작은 왼쪽 허리춤에 항상 차고 있던 주머니칼을 꺼내 솔레아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