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가끔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내긴 했어도 에일린은 늘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에일린, 일어나서 수프라도 좀 먹어 봐.’
‘오늘은 어리광 부리고 싶은 날인가 봐요. 일어나기가 싫네.’
‘내가 먹여 줄 테니까 그러지 말고 몸 좀 일으켜 봐. 뭘 먹어야 약을 먹지.’
‘이왕 수프 먹여 줄 거면 몸도 좀 일으켜 주지.’
‘알았어. 자, 일어나.’
‘이왕 일으켜 준 김에 수프도 입으로 먹여 주지.’
‘……그만.’
‘네.’
열에 들뜬 얼굴로도 해맑게 웃던 그녀는 솔레아를 낳은 뒤로 심각하게 건강이 안 좋아졌다.
보통 사람들이면 회복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도 에일린은 한참 더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게 낳지 말자고 했잖아!’
‘쉿, 애 들어요. 이맘때 애기들이 안 듣는 것 같아도 누군가 자기 앞에서 소리를 지른 건 다 기억한대요.’
‘……하, 팔 아프니까 들고 있지 말고 이리 줘.’
‘왜 아이를 무슨 물건 대하듯 말해요. 그러지 마요.’
‘이리 달라니까.’
‘디에르고.’
‘알았어. 아이는 내가 보고 있을게. ……좀 쉬어.’
에일린은 그제야 아이를 넘겨주었다.
‘아기 이름 말인데요. 솔레아 어때요? 티온, 헤이먼, 그레이, 솔레아. 어감이 잘 어울리죠?’
‘당신 좋을 대로 해.’
‘좀. 그렇게 관심 없다는 듯 대답하지 말고.’
‘정말 당신 좋을 대로 하면 돼. 난 당신 마음에만 들면 되니까.’
‘하여간 성질하고는.’
에일린은 솔레아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봤지만 디에르고의 눈에 아기는 그저 작은…… 아주 작은 덩어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빨갛고, 너무 작았다.
몸을 약간 회복한 뒤로 에일린은 솔레아를 안고 자주 후원으로 나갔다.
벤치 뒤편에 앉아 아기에게 가족들의 이름을 시를 낭송하듯 한 음절씩 불러 주곤 했다.
‘디에르고, 에일린, 티온, 헤이먼, 그레이, 마지막으로 솔레아.’
그러면 장난기 넘치는 그레이가 가족들의 이름에 음을 붙여 노래를 부르며 후원을 뛰어다녔다.
‘디에르고 공작님! 에일린! 공작부인, 티온은 큰형, 헤이먼은 작은형, 잘생긴 그레이! 솔레아는 아기! 우리는 베르고 가족∼’
에일린은 소리 높여 웃으며 팔을 벌렸고, 그레이는 우다다 달려가다가 벤치에 다다르면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에일린에게 안겼다.
‘그레이는 노래를 잘하네, 검을 잡지 말고 노래를 하지 그러니?’
‘싫어요.’
‘왜?’
‘노래하는 남자들은 거시기를 자른다면서요.’
‘……엄마가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래도 너는 셋째고 위에 형들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에일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장난을 치자 그레이가 벌게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망쳤다.
‘어머니 미워요!’
‘그레이, 엄마가 다 네게 재능 있어 보여서 하는 말이야!’
‘미워! 싫어요!’
흐어엉 우는 그레이를 달래느라 저택의 모든 하인들이 쩔쩔맸다.
하지만 그레이는 금세 까먹고 또 어린 솔레아 앞에서 노래를 불러 주곤 했다.
자고 있는 아기 방에 들어가 노래를 부른 탓에 아기가 울며 깨기 일쑤였다.
그레이의 노래는 괴상한 멜로디인데도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 가끔 하인들이나 하녀들이 따라 부르기도 했다.
‘디에르고! 공작님, 에일린! 공작부인, 티온은 큰형, 헤이먼은 작은형, 잘생긴 그레이! 솔레아는 아기! 우리는 베르고 가족∼’
저택엔 웃음과 노랫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솔레아가 뒤집기를 성공하고, 걷기를 시작하고, 옹알이를 하며 성장하는 내내 다들 하루 종일 벙싯벙싯 웃고 다녔다.
솔레아가 처음 한 말은 아빠도, 엄마도 아니었다.
‘디고!’
‘……음?’
‘디이고!’
아이를 안고 있던 디에르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일린을 바라봤다.
그날도 몸이 안 좋아 침대에 누워 있던 에일린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솔레아! 엄마, 해 봐! 엄마! 아니면 아빠 해 봐. 하루 온종일 마마 하던 애가 왜 갑자기 아빠 이름을 불러?’
‘……어…….’
‘어! 그렇지!’
‘디고.’
방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디에르고는 솔레아를 품에 꼬옥 껴안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내가 당신보다 더 좋은가 보지.’
‘엄마보다 맨날 책상에 붙어 있는 아빠가 더 좋니?’
솔레아가 두 살이 됐을 때 알았다.
아빠가 더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주야장천 아기방에 드나들던 그레이가 부른 노래 때문이었다는 걸.
솔레아는 그레이와 작은 나뭇조각을 가지고 놀며 뭉개진 발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디고! 곤자임. 에리, 공잔빔. 티오는 크넝. 헤먼 자그넝.’
거기까지만 불렀다.
‘왜 나는 안 불러 줘! 솔레아! 나도 불러 줘!’
솔레아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꺄르르 웃으며 그레이에게 나뭇조각을 던졌다.
‘너, 너 이런 식으로 자꾸 오빠 무시해! 어?’
‘우이는 베고 가조옥∼’
‘노래 중간에 끊지 말고 끝까지 불러 달라고∼’
그레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허공에 대고 발을 동동 구르면 솔레아가 그를 따라 벌렁 누워서는 짧은 다리로 허공을 차며 높은 목소리로 꺄아아아! 하곤 웃었다.
솔레아는 모르겠지.
그레이가 굳이 솔레아를 안아 보겠다며 안고 걷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칠 뻔했다는 걸.
그때 솔레아를 보호하느라 제 몸을 틀며 넘어진 그레이가 팔꿈치가 찢겨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동생이 다쳤을까 봐 엉엉 울며 손잡고 나란히 저택으로 들어왔던 것도.
‘그리, 우어요.’
‘흐어엉. 솔. 어엉. 다쳐 가지고. 흐어엉. 솔레아가, 넘어져서. 아니, 내가. 으어엉.’
‘오바. 우디 마.’
헤이먼이 보여 주는 노란 나비를 쫓아가며 뛰던 어린 시절을.
……티온이 벌레인 줄 알고 마력이 깃든 검으로 나비를 베는 바람에 한동안 티온만 보면 푸우우 하며 침을 뱉었다는 것도.
그러다가도 티온이 하늘 높이 안아 올리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는 것도.
네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너는 모를 거다, 솔레아.
아름다운 기억은 어느새 조금씩 흐려져 에일린의 마지막 날로 바뀌었다.
‘아이들을 절대로…… 버리지 말아요. 알았죠?’
‘알았어. 내가 우리 애들을 왜 버려.’
‘아이들한테 잘해야 돼요. 항상 잘 살펴봐요. 애들이 안 그런 척해도 눈치도 많이 보고……. 속이 깊어서 말도 잘 안 해요……. 그러니까 계속 사랑해 줘요. 응?’
‘……나는 걱정 안 돼? 에일린.’
‘당신 잘할 거예요. 믿어요.’
‘그렇게 말하지 마.’
에일린은 미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디에르고를 한참 보다가 눈을 감고 조용히 떠났다.
그 이후로 그녀가 가르쳐 준 사랑은 그에겐 고통일 뿐이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세 살이 겨우 넘은 아기는 복도를 도도도도 걸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디에르고! 공작님! ……티옹은! 큰형!’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던 디에르고는 펜을 쥔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기만 했다.
아이의 노래는 이상했다.
음절마다 소리를 지르듯 불렀고, 에일린 부분은 매번 부르지 않고 건너뛰었다.
‘디에고! 공작임! 티옹은! 큰형! 헤이먼! 짝은! 형!’
노래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없어지니 이제 사라진 사람이라는 걸 거듭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디에르고는 눈을 부릅뜨고 집무실 문을 뜯어낼 것처럼 벌컥 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어.’
‘노래를 부를 거면 똑바로 불러! 왜 엄마는 안 부르는 거냐!’
작은 몸의 아이는 오들오들 떨다가 눈물 젖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레이 오빠는, 어, 자기 안 부르면, 응, 멀리서도, 뛰어와서, 뛰어오는데……. 엄마는 아직 안 와서, 엄마가. 엄마 안 와서, 이렇게 부르면 에일린, 엄마 올까 봐…….’
에일린을 쏙 빼닮은 새빨간 머리카락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아이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지고 두 눈엔 순식간에 커다란 물방울이 가득 들어찼다가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아기가 계속 불렀는데 엄마 안 와…….’
꺼이꺼이 울기 시작하는 솔레아를 보다가 디에르고는 복도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함께 울었다.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이 데려온 아이들, 당신을 닮은 아이.
모두 당신에게서 뻗어 나온 추억이라 바라보는 것조차도 힘에 부쳤다.
아이들에게 더 이상 괴상한 노래를 부르지 말라 명령하고, 벽에 걸려 있던 가족들의 초상화를 모두 떼 버렸다.
에일린이 일궈 낸 가정을 지키면서도, 그 이상을 해낼 자신은 없었다.
티온의 안경이 어느 날 사라진 걸 알았을 때도, 헤이먼이 마법 수업이 끝난 이후에 유독 피곤한 모습을 보여도, 그레이가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고 솔레아의 곁에 남겠다고 말해도 모두 그러려니 했다.
‘베르고’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이 가족의 형태가 그대로 지탱되기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아니, 괜찮을 거라 믿었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이들의 얼굴과 행동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에일린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겨웠다.
필요 이상으로 곁을 내주지 않았다. 잘 자랄 수 있을 정도로만. 아이들이 다 커서 모두 이 집을 떠날 때까지만.
제 엄마를 닮아 몸이 약한 솔레아가 몇 번이나 앓는 동안 공작은 더욱 과민해졌다.
‘솔레아를 데리고 밖에 돌아다니지 마라.’
‘하지만 공작님, 아가씨도 곧 성년이신데…….’
‘저렇게 안 좋은데 어딜 돌아다닌다는 거야! 그러다 또 쓰러지면! 더 안 좋아져서 혹시, 혹시…….’
에일린처럼 죽기라도 하면.
이대로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에일린의 말대로 가정을 지키고 있고, 당신의 말대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런 자신이 언제부터 바뀌었더라.
솔레아가 건강해진 이후였나.
어느 순간부터 솔레아는 생기 넘치는 미소로 저택을 휘저었고, 제 사람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적막하던 저택이 숨결을 불어 넣은 듯 활기를 띠었다.
미안하고 대견하고, 또 미안한 마음에 공작은 잘해 보고 싶었다.
또다시 가족을 잃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래서…….
꿈속을 방황하던 디에르고의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공녀님이 꼭 다른 사람처럼 건강해지셨군요.’
이달론.
헤이먼의 마법 수업을 끝내고 돌아가던 그와 마주쳤을 때, 그가 자신에게 건넨 말이 거머리처럼 뇌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맞아.
……솔레아가 꼭 사람이 바뀐 것처럼.
정말 바뀐 걸까? 솔레아가 아닌가? 그럼 내 딸은? 그 모든 추억을 안고 자란 우리 아이는 어디로 갔지?
공작은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조용한 집무실 안이었다.
십수 년의 세월을 한 번 더 겪어 낸 사람처럼 그의 눈엔 피로와 절망, 슬픔이 가득했다.
갈 길을 잃은 분노가 제 딸의 몸을 가득 메운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감히 내 딸의 몸을 꿰찬 걸로도 모자라 깔깔 웃고, 에일린이 좋아하던 색의 옷을 입고, 진짜 솔레아인 것처럼 딸 행세를 하고 다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난 공작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주 오래전, 세 살배기 솔레아에게 화냈던 그날처럼.
공작은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 솔레아의 방문을 잡아 뜯다시피 열었다.
제 딸이 아닌 여자는 책을 읽고 있었다.
“공작님.”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만, 아니 그 틀이라도 잡을 때까지만 말미를 주시면 안 될까요?”
“이딴 책이나 읽고 있을 시간에 꺼지란 말이야!”
이상하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화내면서 소리 지른 적은 없었는데. 이건 아닌데.
‘아니에요, 이 여자는 당신 가족을 무너뜨리려고 했잖아요.’
그래, 맞아. 이 여자는 내가 지켜 온 가족을 망가뜨렸어.
머리에서 누군가가 끊임없이 속삭였다.
공작은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을 뺏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책장이 촤르르륵 넘어갔다. 여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곧 갈게, 아무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공작이 여자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려던 순간 눈앞에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처음 뵙겠다. 젊은이.”
“젊……?”
“일단 자는 게 좋겠군. 당신 머리가 더러워.”
검은색 장발의 남자가 손가락을 맞부딪쳐 튕기자 공작은 그대로 쓰러졌다.
눈을 감기 전 바라본 그의 눈은 뱀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