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싱그럽게 웃고 있던 솔레아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네?”
위로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 왔다.
떨림은 잉크 번지듯 아주 빠르게 온몸으로 퍼졌다.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끝이 경련이 일듯 떨려 솔레아는 두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먼 곳을 바라보는 공작의 두 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잠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지?”
“아직…….”
“돌아올 일이 없는 건 아니고?”
공작이 솔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은 따듯했으나 무감했고, 입은 웃고 있었지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왜 우니?”
그 말이 꼭, 남의 자리를 훔쳐서 산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울고 있냐는 것처럼 들렸다.
공작을 바라보는 솔레아의 시야가 뿌옇게 번져 왔다.
내가 울었나?
분명히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울었지?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우는 걸까?
솔레아의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지도 못하고 두 눈 안에 갇혀 있었다.
“저, 그게……. 저, 아, 아버지. 공작님……. 저는…….”
내가 솔레아라고 말해야 하는데.
내가 당신의 딸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왜 입이 떨어지지 않을까.
그동안 악몽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했던 거짓말들은 막상 상황이 닥치니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간 공작이 다정하게 대해 줄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죄책감이 쌓인 모양이었다.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 솔레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눈물방울이 그제야 허벅지 위로 투두둑 떨어졌다.
맞은편에서 온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딸과 정말 똑같구나.”
그 말은 자신의 딸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의 딸 솔레아가 아닌 나. 솔레아가 될 수 없는 나.
속이 울렁이고 꾹 다문 아랫입술이 떨렸다.
“제가 다 했어요! 제가 베르고를 위해 매일 밤을 새며 공부했어요! 오빠들이 어디서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제가 다 한 거란 말이에요! 저예요! 제가 했다고요! 저란 말이에요!”
제 딸의 얼굴을 한 누군가가 가슴을 퍽퍽 치면서 말하는 모습을 보며 공작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고맙구나.”
공작의 투명한 은발이 실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공작은 마치 숨을 쉬지 않는 사람처럼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당신에게 그런 것을 바란 적 없소.”
반쯤 일어섰던 붉은 머리의 여자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얼굴에 절망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어딘가에 소속된 어린 마법사인 듯한데……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모른 척해 줄 테니 원래대로 돌려놓으시오. 빠른 시일 내에.”
자리에서 일어난 공작은 무심한 뒷모습을 보인 채로 살짝 고개를 돌려 덧붙였다.
“내 아이들이 눈치채기 전에.”
공작은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혼자 남은 지윤은 바람에 눈물이 마르는 감각을 오래도록 느꼈다.
“내 아이들……. 그래, 난 원래 솔레아가 아니었으니까.”
솔레아의 몸에 운 좋게 들어와 그녀 행세를 하고 살았던 거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이 일 저 일 벌이고 다닌 거니까.
“……얘들아. 정령들아.”
어디로 갔는지 대답이 없었다.
“원래 주인이 깨어나서 그리로 갔어? ……그럼 인사라도 하고 가지 그랬어.”
어느새 방향을 바꾼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왔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안개처럼 시야를 가렸다.
이것도 내 게 아닌데.
고개를 돌렸다.
초록색 벌판과 아름다운 저택, 친절한 사람들, 다정한 아빠와 오빠들.
이 넓은 곳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생각해 보면 원래 그랬다.
아주 먼 기억 속, 가장 처음부터.
고개를 숙인 지윤의 입에서 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프, 하하. 하하하! 맞아, 그랬지! 하하하! 그랬었어! 하하하! 바보처럼 잊고 있었네! 누구 탓을 하겠어! 하하, 하, 하하하…….”
웃음은 너무 쉽게 한숨으로 변해 버렸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고서야 붉은 머리 여자는 언덕을 내려왔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인사를 건네곤 공작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마침 퇴근하던 라트엘이 그녀와 마주쳤다.
“아가씨, 이제 내려오셨습니까?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떡하시려고요.”
“에이, 난 이제 건강하잖아요. 걱정 말고 퇴근해요, 라트엘. 시간 다 됐어요.”
“네.”
“참, 내일 신문 1면에 우란 갑질 얘기 실어 달라고 해 주고요.”
“제가 그거 때문에 오늘 정시 퇴근을 못 하고 신문사로 잔업 하러 가지 않습니까? 수당 따로 챙겨 주셔야 합니다.”
“그럼요. 제가 언제 돈 떼먹은 적 있나요?”
“제가 그래서 아가씨를 좋아합니다.”
붉은 머리 여자는 밉지 않게 씩 웃는 라트엘의 어깨를 툭 치곤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요, 라트엘.”
“예. 아가씨 내일 뵙겠습니다.”
라트엘이 가고 난 후 붉은 머리 여자는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저예요.”
“……그래.”
짧은 대답이 들려오자 붉은 머리 여자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은 보고 있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부탁이 있습니다.”
“내 딸의 몸을 꿰찬 이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는데.”
“마지막 부탁입니다. 들어주세요.”
잠깐 말이 없던 공작은 펜을 내려놓고 붉은 머리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지만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주일만 주세요. 준비 중인 일들이 제가 없어도 굴러갈 수 있도록 만들어만 놓고 갈게요. 정말, 그다음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갈게요.”
“……솔레아는 어디 있소?”
“그 사람은…….”
붉은 머리 여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 이내 꾹 닫아 버렸다.
공작은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마르실라입니다.”
“……들어와.”
“아가씨랑 계셨군요! 여기 차라도 한잔 드시면서 얘기 나누세요.”
생글거리며 공작의 책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마르실라는 붉은 머리 여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가씨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여자는 애써 웃으며 마르실라에게 답했다.
“괜찮아요. 그럼 허락하신 줄 알고 가 볼게요. 공작님.”
공작은 그녀에게 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간 붉은 머리 여자가 복도를 뚜벅뚜벅 걷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먹먹하게 말려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목이 막혀 와 공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목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공작님, 목이 따가우세요? 따뜻한 차를 가져왔으니 한 모금 드세요. 일도 좀 쉬엄쉬엄하시고요.”
“……향이 좋군, 무슨 차지?”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차예요. 잠도 잘 오실 거예요.”
“그렇군.”
차를 마신 후 공작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붉은 머리 여자의 물기에 젖은 눈망울이 어른거렸다.
어색하게 ‘아버지’라 부르다가 겨우 ‘아빠’ 하고 부르던 순간의 음성도 귓가에 생생했다.
흙바닥에서 굴러 엉망이 된 꼴로도 저를 발견하자마자 사르르 웃던 얼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릴 때 크게 체한 기억 때문에 아몬드를 먹지 못하던 솔레아가 어느 날 아몬드 한 주먹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씹고 있길래 억지로 먹을 필요 없다고 했더니 ‘그레이도 싫으면 먹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난 아몬드 좋아하는데.’라고 답했다.
기억을 잃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던 아몬드를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체질적으로 복숭아가 맞지 않아 두드러기가 나곤 했는데 복숭아파이를 한 입 가득 베어 물곤 ‘너무 맛있어요!’라고 하기도 했었다.
체질은 기억과 관련이 없을 텐데.
그 외에도 단순히 기억만 잃었다 하기에는 원래의 솔레아와 다른 점이 많았다.
낯을 심하게 가리던 아이가 갑자기 온 저택의 사용인들과 기사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고, 직접 사업을 크게 벌이고…….
마치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래도 겁이 많은 아이니 상처받지 않도록 차근차근 물어보며 천천히 대화할 생각이었다.
그 아이가 누구든 나날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이 늘어나는 건 진짜였으니까.
……그런데 누가 그 아이에게 복숭아파이를 가져다줬지?
“공작님, 복잡한 생각은 마세요.”
공작은 상냥한 마르실라의 목소리에 생각을 멈췄다.
꼿꼿하게 앉아 있던 공작이 책상 위로 쓰러졌다.
“이 차는 작은 의문을 의심으로, 의심을 확신으로, 확신을 증오와 분노로 바꿔 주는 차예요. 분노는 우리 삶의 원동력이잖아요. 공작님.”
마르실라는 공작을 내버려 두고 집무실을 나서며 환희에 차 눈물을 흘렸다.
이제 거의 다 됐다. 내 가족을 살릴 수 있어.
* * *
공작은 서서히 꿈속에 잠겨 들었다. 꿈은 아주 오래전 기억부터 시작되었다.
에일린의 몸이 약한 탓에 결혼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컸다.
아내의 몸이 약하지만 대신에 내가 강하니 괜찮지 않냐는 말에 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아이를 네가 낳을 거니?’
젊은 디에르고는 아버지를 힘껏 노려보며 답했다.
‘아이가 없어도 괜찮으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네가 괜찮아도 베르고는 괜찮지 않아!’
‘고작 가문의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에일린과 헤어질 바에는 차라리 가족과 인연을 끊겠습니다.’
꿈속의 젊은 자신을 바라보는 디에르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는 날들이었다.
아버지와 대화를 끝내고 저택을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에일린이 바람에 머리를 감듯 높게 묶었던 붉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에일린, 뭐 하는 거야.’
‘바람이 너무 시원해요, 공작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아하하! 당신 삐질 때 눈꼬리가 삐죽 올라가는 거 알아요? 고양이 같아.’
‘날 고양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좋다는 뜻이죠?’
그를 약 올리듯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는 에일린의 얼굴엔 생기가 가득했다.
몸은 약했지만 마음까지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에일린은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베르고의 후계를 잇기 위해 아이를 입양한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자식이 많아 오히려 골치가 아픈 어느 친척에게서 아이를 데려와 양자로 삼았겠지.
그녀는 가죽 공장 뒤편 하수도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티온을 저택으로 데려와 씻기고 돌봐 주었다.
‘아가, 괜찮니? 아직 너무 어려 보이는데.’
디에르고도 티온을 처음 본 날을 기억했다.
좋은 옷을 입혀도 남의 옷을 훔쳐다 입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깡마르고, 등이 굽은 소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죽 공장으로 돌아간 티온은 남의 옷을 훔쳐 입었다는 오해를 받아 선배들에게 옷을 뺏기고 두들겨 맞아 다리가 부러졌다.
절뚝거리며 걷다가 쓰러져 결국 공작저 앞까지 기어 온 티온이 에일린에게 바란 것은 작은 동정이었다.
티온은 약품 때문에 진물이 올라오고 지문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내밀며 빌었다.
‘조금만 도와주세요.’
에일린은 다친 티온을 보살피며 진심으로 슬퍼했고, 조금씩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따듯하고 폭 넓은 무언가인 것 같았다.
디에르고는 매 순간 그녀에게서 사랑을 배웠다.
세상엔 다양한 모양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어떤 사랑은 시간을 들여 서서히 생겨나기도 한다는 걸 티온을 키우며 알았다.
그 후 헤이먼을 데려오고, 어렵사리 솔레아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여섯 살 남짓이던 그레이를 입양했다. 세 아이를 한방에 우르르 모아 놓고 부른 배를 문지르며 동화를 읽어 주겠다고 책을 펼치는 에일린은 여전히 싱그러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디에르고는 에일린에게 사랑을 배워서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