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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192)

88화

산체스 우란은 그나마 자신에게 우호적인 다른 신문사에 직접 찾아갔지만 거기서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글쎄요……. 요즘 상황이 좀 심상찮아서 이런 걸 싣기가 좀 그런데요.”

“무슨 소립니까, 그게.”

“베르고가 뜨고 있어요. 그런 데는 팍팍 밀어야지.”

“……단체로 미친 거냐고! 어딜 봐서 뜨고 있다는 거야?! 입양한 놈들을 파양한 것도 아닌데!”

편집장실 안이었지만 산체스의 목소리가 컸던 탓에 바깥까지 말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유리문 너머의 사원들 중 몇몇이 도끼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섬뜩한 기분에 밖을 힐끗 바라본 우란은 입을 다물었다.

이상했다.

꼭 베르고가 여기저기에 첩자를 심어 놓은 것 같았다.

우란이 조용해지자 편집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통롤러 말입니다. 베르고에 머물고 있다는 그 마법사가 만들어 파는 거.”

“그게 왜요. 그건 황족들이나 쓰는 고가품이지 않습니까.”

“물량이 풀렸어요. 일반 영주민들 대상으로.”

“하! 그것도 분명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팔아 치우겠지!”

“아뇨? 무슨 재활 치료…… 거기에 베르고 공작님 성함으로 100개 기부했다던데요.”

“뭐야?!”

“흥분했다고 자꾸 반말하지 마시고요. 아무튼 요새 베르고가 예전 같지 않아요. 뭐랄까……. 영주민들을 좀 더 살뜰히 살핀달까?”

“전엔 공작저에 필요한 일 외엔 황궁 쪽에서 내려오는 중앙 업무 위주로만 처리했잖습니까!”

“예, 확실히 그랬죠. 그런데 공녀님이 건강해지신 뒤로 공자님들과 함께 영지를 살뜰히 살피시는 것 같더라고요. 다행이죠. 우리들 입장에선.”

“다행이긴 뭐가 다행입니까.”

씩씩대는 우란을 바라보며 편집장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대로라면 가난한 사람들 등골 빨아먹는 놈들도 곧 잡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뼈 박힌 말에 산체스는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을 돌려 편집장을 노려봤다.

“내가 여기에 후원한 돈이 얼마고, 붙여 준 광고가 몇 개인지 알 텐데, 왜 말을 그렇게 하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신문사의 귀중한 고객님이시죠.”

편집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우란의 잔에 따듯한 차를 부어 줬다.

“근데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요.”

“총기가 흐려졌나 보지?”

“예, 뭐.”

웃음기를 머금은 편집장이 실수인 척 들고 있는 찻주전자의 방향을 틀어 우란의 바지에 찻물을 부었다.

“악! 지금 뭐 하는 거야!”

벌떡 일어난 산체스는 젖은 바지를 털며 편집장의 어깨를 밀쳤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딴생각을 하다가!”

“딴생각? 내가 여기까지 직접 방문했는데 딴생각을 했단 말이야?! 보자 보자 하니까 분수를 모르는군! 릴홉 신문사가 아무리 커도 내가 광고를 끊으면 어디서 투자를 받고, 어떻게 인쇄 비용을 충당할 거야! 이 거지 같은 새끼!”

“죄송합니다. 치료비와 옷값은 물어 드릴 테니…….”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편집장은 황급히 구석으로 걸어가 서랍에서 돈을 있는 대로 꺼냈다.

하지만 우란이 보기에는 그저 푼돈이었다.

“돈 안 받을 테니 얼굴 이리 대.”

“……예?”

“돈 안 받을 테니 얼굴 대라고.”

“그게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란이 편집장의 따귀를 후려쳤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편집장이 책상 위에 쌓아 놓은 종이들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건방지긴. 네가 누구 덕분에 글 쓰고 사는지 알아야 돼. 뭐? 반말을 하지 마? 닥치고 이대로 써서 신문 발행이나 해.”

베르고에 대한 모함을 적어 놓은 종이가 편집장의 책상 위로 나풀나풀 떨어졌다.

릴홉 신문사를 나온 우란은 근처 우란 지점 상가에서 바지를 갈아입었다.

물론 값은 지불하지 않았다.

“베르고 공작저로.”

마차에 올라탄 우란은 불쾌한 낯을 숨기지 않았다.

“계약서.”

“무슨 계약서요?”

우란의 젖은 바지와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가방을 품 안 가득 챙겨 든 시동이 멍청한 얼굴로 묻자 우란은 시동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내가 지금 베르고로 가는데 무슨 계약서를 달라고 하겠어!”

“아, 네, 네! 직접 가셔서 계약하시게요?”

“그래야지.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5 대 5로 계약을 해야겠어. 그 이후에 차근차근 작업해서 수정하게 만들어야지.”

시동은 정강이를 잠깐 문지르고는 얼른 계약서를 내밀었다.

잠시 후 베르고 공작저에 도착한 우란은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장착한 채 마차에서 내렸다.

“공녀님을 뵈러 왔다. 우란 상단의 단주, 산체스 우란이라 하면 아실 게다.”

공작저 입구를 지키는 하인을 훑어보며 말하자 그는 짧은 대답 후 곧장 저택 안으로 달려갔다.

산체스가 뒤따라 공작저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경비병들이 막아섰다.

“못 들어간다.”

“……기사님들이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난 계약을 하러 온 단주라니까. 저택의 현관 앞까지는 걸어가도 되지 않습니까?”

“안에서 허락이 와야 들어갈 수 있다.”

“하, 참!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요. 다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경비병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가 방금 기사님들 이름을 묻지 않았습니까?”

“상인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우란이 이를 악물었다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웃었다.

“그 상인이, 지금, 공녀님과 계약을 하러 왔다니까? 이미 거래를 약속한 사이인데 이런 식으로 문전 박대를 합니까? 문지기가 이름조차 말하지 않고?”

“……문지기?”

세 명의 경비병 중 하나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올리며 산체스에게 다가왔다.

“네가 문지기라고 무시한 우리들의 이름을 아가씨는 다 외우고 계신다. 심지어 담당하는 시간대도 알고 계셔서 마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실 때마다 직접 이름을 부르시며 인사도 건네신다. 가끔은 와서 간식도 주시니 네가 가서 고자질을 하면 아가씨는 그 문지기들이 누군지 곧장 아시겠지.”

다른 경비병이 위협적으로 우란을 내려다보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네게 이름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지. 가서 직접 말씀드려라.”

젠장. 오늘은 어딜 가나 하나같이 불쾌한 놈들뿐이로군.

산체스는 인상을 한껏 구긴 채 공작저 입구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고의 하인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걸어왔다.

“아가씨께서 단주님을 안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거보라며 경비병들을 쏘아보는 그때, 하인이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그리고 피구 중이니 한 시간만 기다려 달라 전하셨습니다.”

“……피구?”

뒤에 서 있던 경비병 중 하나가 풉,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우란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다시 말했다.

“피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거래가 급하니 당장 공녀님을 모셔 오거라.”

“아가씨께서 단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실 경우엔 이리 설명을 붙이라 하셨습니다. ‘피구는 다른 사람들과의 협동심이 중요한 운동이라 함께하는 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소. 장사와 다를 바가 없으니 그대 역시 너그러이 이해할 거라 믿겠소.’”

“운동? 고작 운동을 한다고 나를?!”

“아가씨는 여리셔서 하루에 두 시간씩 꼭 운동을 하십니다. 이만 안으로 드시죠.”

공작저 안으로 들어가며 우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여리긴 개뿔이 여려.

지난번 정찬실에서 꼿꼿이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명령하는 기개는 웬만한 장부 못지않았다.

심지어 한자리에서 장사를 오래 해 잔뼈가 굵은 터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여리다니. 헛소리.

응접실에서 공녀를 기다리는 동안 우란은 분을 참지 못해 한참을 씩씩거렸다.

“이봐. 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공녀님은 아직이신가.”

하인은 눈은 내리깔고 차분하게 답했다.

“약속 없이 오신 손님이라 다소 시간이 걸리시는 듯합니다. 공녀님이 워낙 바쁘시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누군 안 바빠서……! 하, 됐어. 가 봐.”

이래서 귀족들이란.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콧대만 높아서 남 기죽이기에 바쁘지.

멍청한 귀족이 장사를 한다고 설칠 때 장단을 맞춰 주는 게 아니었는데.

염색 양모를 만드는 그 장인이라는 것들만 빼내면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할 년이 건방 떨기는.

이미 염색 양모 공장이 어디 있는지, 그걸 만드는 이들은 누구인지 조사하라고 지시해 둔 상태였다.

기술자들만 빼내면 베르고의 염색 양모는 제힘으로도 만들어 낼 수 있을 터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돈방석 미래를 꿈꾸며 우란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녀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우란. 기약도 없이 오셨네요.”

“예, 공녀님. 운동은 잘 마치셨습니까?”

“덕분에요. 계약서를 직접 들고 올 줄은 몰랐는데 마음이 급했나 봐요?”

“하하, 워낙 좋은 물건이라.”

자리에 앉은 공녀는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더니 흠, 하는 신음을 흘리며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계약 해지에 관한 내용이 없네요.”

“계약 해지할 일이 뭐 있다고요.”

“저나 우란 상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계약을 그대로 감당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요.”

산체스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하긴, 베르고가 지금 잠시 평판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 ‘베르고’다.

영주민들이 언제 등 돌리고 무시할지 모르지. 귀족이라고 무조건 칭송받진 않으니까.

우란은 고개를 끄덕이곤 펜을 들었다.

“특약을 추가하죠.”

“네.”

“‘갑 또는 을에게 문제가 발생하여 더 이상 해당 제품을 판매할 수 없는 경우엔 계약을 해지한다.’ 어떻습니까?”

“어떤 문제인지도 적어야 할 것 같네요. ‘갑의 평판이나 영향력이 매출에 큰 영향을 끼쳐 판매율이 40% 이하로 하락했을 경우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공녀님. 저희는 판매율이 낮아진다고 해서 사람을 버리진 않습니다. ……계약 내용을 수정할 뿐.”

“그런가요? 그럼 ‘계약을 해지하거나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라고 적어두죠.”

“아하하. 그건 너무 제게만 좋은 조건인데요.”

“아하하. 그럼 을에 대한 조건도 추가할까요?”

산체스의 웃음소리를 그대로 따라 한 공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번, 을인 우란 상단의 실경영자인 산체스 우란의 신변에 변화가 생겨 상단이 해체되는 경우, 2번, 우란 상단에 등록된 포목점 중 40%가 계약을 해지한 경우, 3번, 을의 실경영자인 산체스 우란이 압류, 가압류, 가처분, 조세 체납 처분 등의 이유로 강제 집행을 받아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해졌을 경우. 계약을 해지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셨나 봅니다. 제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럼요. 우란의 신변에 변화가 생길 일도 없고, 그 커다란 우란 상단과 거래하는 포목점 중 40%가 갑자기 계약을 해지할 리도 없죠.”

“제가 누군가에게 재산을 뺏길 일도 없을 겁니다.”

산체스는 약간은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공녀는 그런 그를 지그시 보다가 싱긋 웃었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우란의 재산을 뺏을 리가 없는 거겠죠.”

어쩐지 분위기가 싸늘해진 듯해 우란은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자! 그럼 이대로 진행하실까요. 여기 서명하시죠.”

공녀는 미소를 띤 채 계약서에 서명했고, 산체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계약서를 챙겼다.

그대로 응접실을 나서려던 산체스는 한 시간도 더 전에 겪은 불쾌했던 일을 공녀에게 그대로 꼰질렀다.

“공녀님. 여기 경비병들이 말입니다. 굉장히…… 충성스럽더군요. 융통성 없이.”

“하는 일이 외부인에게서 저택을 지키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죠.”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공녀를 보니 부아가 치밀었지만 산체스는 이번엔 참기로 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공녀니 손님을 대하는 법도 모를 수 있지.

“앞으로도 손님 모실 일이 많을 테니, 손님 모시는 법을 좀 알아야 할 것 같더군요. 그럼 이만.”

산체스는 공녀의 답인사도 채 듣지 않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응접실의 문이 닫힌 뒤 공녀는 손을 들어 흔들었다.

“어, 양아치 잘 가.”

경비병들이 우란을 문전 박대 했다니.

잘했다고 보너스라도 주고 와야겠네.

솔레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앤∼ 응접실에 소금 뿌려.”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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