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92)

87화

* * *

산체스 우란은 베르고 저택에서 돌아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외투를 벗어 집어 던졌다.

“5 대 5라니. 미친 계집. 누구 장사 망하는 꼴 보려고 그러나.”

가격을 비싸게 부른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가격을 더 세게 올릴 수도 없잖아. 아무리 귀족이래도 양모 하나에 300만 제르라니. 이게 말이야, 똥이야. 이 망할 년.”

물론 귀족들은 300만 제르라도 살 것이다. 그러나 600만 제르라면? 그건 당연히 안 사겠지.

의자에 앉은 산체스 우란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지금까지 우란은 상품 제작자에게 구매한 가격의 두 배로 물건들을 팔았고, 제작자에게 수익을 배분할 때는 원가를 기준으로 계산했다.

간혹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우란 상단을 완전히 등지고서는 업계에서 장사로 먹고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건 둘 다 이득인 윈윈 전략이라고요, 고객님. 아시겠어요?”

그러니 다들 우란에게 따지러 찾아왔다가도 어쩔 수 없이 계약을 연장하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일지라도, 겨자 정도야 인생을 살다 보면 얼마든지 먹게 되는 법이지.

산체스는 그런 식으로 제 상단을 키워 왔다.

가끔 훨씬 많은 수수료를 주겠다고 제시하는 제작자가 있으면 현재 다른 사람이 팔고 있는 품목과 똑같이 만들라고 시킨 뒤, 가격을 1.7배 정도만 불려서 우란 지정 가게들에 납품했다.

소비자들은 당연히 더 싼 제품을 구매했고, 원 제작자는 울분을 터뜨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슷한 제품을 팔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결국 원 제작자도 수수료를 올려 주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 식으로 거래를 하니 이젠 제품을 9 대 1의 수수료로 우란에게 넘기는 제작자들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돈 많고 명망 있는 놈이 이기는 법이지. 지역 사회란 그런 거야.

산체스는 돈이 걸린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건방진 빨간 머리 귀족 계집 정도야 우스웠다.

300만 제르? 웃기는 소리.

100만 제르에 사 줘서 감사합니다, 소리가 나오도록 해 주지.

산체스는 계약서를 바로 공녀에게 보내지 않았다. 대신 하인을 신문사로 보냈다.

베르고에 대한 온갖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릴 예정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베르고에 어떤 이미지가 박히느냐였다.

“산체스, 그 공녀를 망하게 할 거라면 공장을 쳐야 하지 않나요?”

싸구려 극단에서 일하던 여자를 데려와 아내로 삼았더니 이런 멍청한 소리나 하는군.

산체스는 픽 웃으며 아내를 밀쳐 냈다.

“그 양모는 꽤 쓸 만해. 그러니 베르고의 평판이 바닥을 치게 만들어야지. 우리에게 사정사정하며 제발 팔아 달라고, 빌기 전까진 어림도 없어.”

건방지게 굴던 그 마법사 놈과 공녀가 나란히 무릎을 꿇기 전까진 절대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사에 다녀온 하인은 전혀 예상도 못 한 말을 꺼냈다.

“……주인님. 이런 내용으로는 기사를 쓸 수가 없다는데요?”

“뭐야?!”

산체스는 심부름 하나 제대로 못 하는 하인을 걷어찬 후 그가 가져온 편지를 빼앗듯 잡아챘다.

‘우리 트라비아 신문사는 언제나 진실만을 추구합니다.’

“개버러지 같은 새끼!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다른 신문사라도 찾아갔어야지!”

바닥에 쓰러진 하인의 복부를 발로 차며 소리 지르자 그가 울음을 터뜨리며 품에서 다른 종이들을 우수수 꺼냈다.

“전부 다 돌았어요, 주인님…….”

종이에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들 뿐이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신문에 실을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거짓 선동에 휘둘리지 않겠습니다.’

‘진실의 가치를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산체스 우란.’

개중에선 진짜 이상한 내용의 쪽지도 있었다.

‘그런 기사는 쓸 수 없음. 당연함. 베르고를 사랑함. 이미 뼈를 묻음. 땅 매우 따듯.’

“단체로 약이라도 먹은 거야?!”

분에 찬 산체스는 편지들을 모조리 구겨 벽난로로 집어 던져 버렸다.

* * *

그랜트는 오늘도 아침 일찍 서점 문을 열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원래는 시외에 작은 집이 있었지만 빚 때문에 집과 서점 둘 중에 하나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 생겨 버렸고 그는 울면서 오랜 세월 살았던 집을 팔았다.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일한 유산인 그랜트 서점을 팔아 버릴 수는 없었다.

“……오늘은 손님이 열 명만 왔으면 좋겠군.”

그래 봤자 다섯 명 남짓이겠지만.

그랜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밤새 닫아 두었던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부서지듯 가득 들이쳐 눈살을 찌푸린 그랜트는 가까이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가게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대부분이 하녀인 듯 깔끔한 검은색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아저씨, 낙인 있어요?”

“사장님. 이제 문 연 거예요? 들어가도 돼요?”

“낙인 몇 권 있어요?”

“아니, 이봐요! 내가 먼저 왔잖아!”

“나 프롬린 백작 부인 심부름으로 온 사람이야!”

“네가 백작 부인이야?! 아니잖아! 일찍 와서 줄을 섰어야지!”

“너 어디서 왔어!”

“나 알리시아 후작님이 직접 보내셨어! 낙인 네 권 사 가야 된다고!”

“아니, 다 됐고! 사장님! 낙인 몇 권 있냐니까요!”

그랜트는 서점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하녀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제 뺨을 후려쳤다.

짝! 소리가 들리지 하녀들이 잠깐 조용해졌다.

“사장님 어디 안 좋으세요?”

“아니, 분명히 여기 오면 있을 거라고 해서 왔는데.”

“낙인 없는 거면 빨리 말해 주세요. 다른 곳 가 봐야 돼요.”

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때 아내가 다락에서 걸어 내려왔다.

“여보, 왜 이렇게 소란스럽……. 설마 또 빚쟁이들이 왔어요?”

두 눈에 경계심을 가득 담은 아내가 입구로 걸어왔다가 하녀들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고 그랜트처럼 멈춰 섰다.

“사장님? 낙인 있어요?”

“낙인 몇 권 남아 있어요?”

그녀는 남편보다 상황을 빠르게 판단했다.

“네! 낙인,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그랜트 부인은 아직도 멍청하게 서 있는 남편의 등을 밀었다. 그래도 그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자 엉덩이까지 발로 차며 서가로 밀어 넣었다.

“낙인 찾아와요! 창고에 있는 것까지 전부 다!”

“으, 응! 알았어! 네, 여보! 알겠어요!”

아내의 목소리에 겨우 제정신을 차린 그랜트는 창고로 들어가 허겁지겁 먼지 쌓인 재고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대체 왜 갑자기 이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몇 주 전에 책을 사 갔던 그 손님이 주변에 추천이라도 한 걸까?

그랜트는 싱글벙글 웃으며 낙인을 몇 권 찾아냈다.

재고가 많지 않아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손님이 분명히 생길 것 같았다.

그랜트는 수레에 열 권 남짓한 책을 실어서 카운터 쪽으로 돌아갔다.

“먼저 오신 분부터 계산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한 분당 한 권만 사 가시는 게 어떨까요?”

하녀들은 인상을 찡그린 채 저들끼리 얘기하다가 그랜트에게 말했다.

“저희도 그러고는 싶죠. 그런데 주인님들이 사 오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마음대로 한 권만 사 갈 수 있겠어요.”

늦게 온 이들은 지금이라도 다른 서점을 가 봐야 하는지 아니면 이대로 줄을 서 있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어제 모퉁이 서점 갔을 때 거긴 그런 책 없다고 했잖아.”

“애초에 그 낡은 책이 왜 갑자기 읽고 싶으시다는 거야?”

“우리 마님은 살롱에서 읽고 오셨는데, 너무 감동적이라 소장하고 싶다고 두 권 사 오라 하셨다니까.”

“젠장. 어딜 가야 되지.”

모처럼 손님들이 들이닥쳤는데 책이 없어서 팔지를 못한다니.

그랜트와 부인은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비슷한 내용의 다른 책은 어떠시냐며 추천했지만 하녀들은 낙인이 아니면 구매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정확히는 그들의 주인들이 오직 「낙인」만을 원했다.

“어쩔 수 없죠. 일단 다른 곳에라도 갔다 와 볼게요.”

“여기는 낙인이 있다 그래서 왔는데…….”

하녀들 몇몇이 침울한 표정이 되어 떠나려는 그때, 그랜트 서점 앞에 거대한 짐마차가 멈춰 섰다.

“리치 그랜트 씨?”

“……예, 제가 리치 그랜트입니다만…….”

그랜트의 머릿속에는 빚쟁이가 왜 또 왔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스쳐 지나갔다.

숱한 시간 동안 빚쟁이들에게 달달 볶여 왔기 때문에 낯선 이가 이름을 호명하면 그는 심장부터 졸아붙었다.

“여기 사인해주세요.”

커다란 짐마차를 몰고 온 이가 그랜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영수증이죠.”

“여, 영수증이라뇨. 구매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다급히 고개를 숙여 읽어 본 영수증의 품목란에는 익숙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낙인」 ― 대금 납부 완료

낙인? 지금 사람들이 찾고 있는 그 낙인?

그랜트는 놀라서 짐마차의 뒤편으로 뛰어갔다.

이미 인부 몇 명이 짐칸 안에서 커다란 상자를 내리고 있었다.

“이게, 이게 무슨.”

“출판사에서 급하게 찍어 냈다 하더라고요. 여기로 보내면 된다던데. 아무튼 여기 서명만 해 주세요. 수량은 정확히 500권입니다.”

그랜트는 멍청한 눈으로 서명을 하고, 서점 앞에 책 상자가 차곡차곡 쌓이는 걸 지켜봤다.

“이보시오, 누가 대금을 치렀는지는 모릅니까?”

“저희야 모르죠. 출판사에선 그랜트 서점에서 주문이 들어왔다던데요. 너무 걱정 마세요. 선불로 돈 다 냈다는데 뭐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저흰 이제 갑니다.”

짐마차와 인부들은 일을 끝내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사냥감을 노리는 하녀들의 눈이 번뜩였다.

“이거 그, 맞죠? 사장님!”

“사장님. 저희 이제 구매 제한 없죠?”

“사가도 되죠?”

길 한가운데에서 영수증을 들고 서 있는 리치를 보다 못한 아내 폴이 서점에서 튀어나왔다.

“예! 순서대로! 구매하십쇼! 줄을! 서시오!”

구름떼처럼 몰려든 하녀들이 책을 잡히는 대로 쥐고는 값을 치른 뒤 사라졌다.

괴이한 행렬은 오후를 지나, 저녁을 넘어서, 그다음 날까지도 이어졌다.

아침에 가게 문을 열면 하녀들이 지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사장님. 아직 낙인 남았죠? 저희 마님이 구해 오라셔서요.”

“아가씨가 티타임 때 읽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좀 빨리 부탁드려요.”

“자작님이 찾으세요. 두 권 주세요.”

“사장님.”

“사장님?”

“사장님!”

“싸! 장! 뉨!”

사장님 소리가 이렇게 달콤하게 들렸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누군가가 ‘그랜트, 책값을 받으러 왔다.’ 하면 돈을 갚기 위해 가게 매상을 조금씩 따로 모아 뒀지만 그 ‘누군가’는 단 한 번도 그랜트를 찾아오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500권은 완판되었고 그랜트는 밝은 달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은혜는 반드시 갚겠,

“여보! 빨리 들어와서 신문 좀 봐! 낙인 작가가 차기작을 낼 거래! 무, 무슨 예술 협회 같은 게 있나 본데? 거기에서 지원금 받아서 이사도 했대!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해 침체기를 겪고 있던 자기를 찾아 주고, 묵혀 뒀던 차기작을 발표할 수 있게 해 준 예술 협회 솔리안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데.”

“솔리안이 뭐 하는 곳이야?!”

“‘신작 발표 및 작가 사인회는 그랜트 서점에서 할 예정이다.’ 이 그랜트가 설마 우리 그랜트야?”

“우어억! 악!”

괴상한 괴성을 지르던 리치는 결국 기절했고,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 다짐했다.

오늘부터 내가 모시는 신의 이름은 솔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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