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92)

86화

싸가지라고는 서대륙에 두고 온 것 같은 돈의 모습에 모두들 당황한 눈치였다.

……나까지도.

심지어 나도 모르게 ‘돈, 너 왜 그래?’ 하고 물을 뻔했다.

그때 토번이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중재하려 끼어들었다.

“하하. 과연 서대륙의 마법사답군요.”

우란이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토번을 향해 몸을 돌리자 그가 이어 말했다.

“서대륙의 마법사들은 제국의 마법사들과는 달리 상당히 권위적이라 들었습니다.”

우란은 다시 사람 좋은 척 웃으며 돈을 바라봤다.

“그렇군. 그래도 여긴 제르노아니 장소에 맞춰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돈은 이젠 아예 우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불쾌해졌는지 우란은 팔짱을 낀 채 돈을 지그시 바라봤다.

“뭐, 중요한 건 능력이니까. 괜찮으시면 마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으면 하는데.”

돈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그를 무시했다.

당연하지, 마법을 보여 줄 만큼의 마력이 없으니까.

마법을 보여 주기 위해선 내가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의 시선이 나와 돈에게 집중되어 있으면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돈이 움직이질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우란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혹시 마법사가 아닌 거 아닙니까? 마법사치고는 손도 영 거칠고……. 길바닥을 구르며 고생깨나 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토번이 눈치 없이 말을 얹었다.

“음? 서대륙의 마법사들은 험한 일을 하지 않을 텐데요?”

“……공녀님이 장난이나 치실 요량으로 저희들을 불러 모으신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름이 뭔지 말도 안 하는 자라니, 신원이 의심 가는데 진짜 마법사가 맞긴 한 겁니까?”

“자기 신분부터 명확히 밝혔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서대륙에서 여기까진 뭐 때문에 온 거랍니까?”

“공녀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돈이 마법을 빨리 보여 주지 않자 단주들의 의심이 호박 줄기처럼 줄줄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고요. 곧 마법을 보여 줄 겁니다.”

“제국어를 못 하는 것 같은데 공녀님과 의사소통은 잘되는 겁니까? 어떤 방식으로요?”

더 이상 미룰 순 없었다.

몸을 옆으로 틀고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채 돈에게 귓속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강력한 마법. 아무거나. 빨리 보여 줘.”

날 바라보는 돈의 두 눈이 당황으로 일렁거렸다.

돈은 내가 정령들을 부린다는 걸 모르니 본인에게 한 말인 줄 아는 것 같았다.

‘우리?’

‘우리한테 한 말인가?’

‘아니야. 주눅 든 왕강아지한테 속삭였잖아!’

‘그렇구나!’

‘근데 쟤 마법사 아니잖아.’

‘마법을 배웠나?’

‘왕강아지는 마력이 별로 없는데 강력한 마법을 어떻게 해? 임시 주인 바보인가?’

당장이라도 너희한테 한 말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정찬실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 그럴 수 없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돈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토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돈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도 서대륙어인 것 같았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생길까 봐 서대륙어 회화를 배워 두긴 했지만 아직 초급 수준이라 토번의 말 중 내가 알아들은 건 제일 처음의 ‘안녕하세요.’와 제일 마지막 문장인 ‘괜찮다면 ∼를 해 줄 수 있냐.’ 정도였다.

돈한테도 서대륙어 사전이랑 회화 책을 사다 주긴 했는데…….

토번의 말을 들은 돈의 짙은 눈썹이 움찔 떨렸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가만히 서 있긴 했지만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져 버렸다.

그때였다.

돈이 천천히 입을 열어 유창한 서대륙어로 토번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러자 토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끄덕거렸다.

긴말을 끝내고 잠깐 한숨을 내쉰 돈은 토번을 비롯해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매섭게 바라보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로 마하탐.”

나와 다른 단주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토번은 확실히 알아들은 듯했다.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고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눈가가 덜덜 떨려 왔다.

“무슨 뜻인가?”

“저 마법사가 뭐라고 한 거야?”

“토번. 왜 몸을 떠나?”

사람들의 눈길이 이제는 토번을 향했다.

지금이었다.

나는 몸을 그들에게서 완전히 돌려 작지만 확실한 어조로 명령했다.

“집중의 박수를.”

‘짝! 짝! 짝!’

‘확실해! 이번엔 우리한테 하는 말이야!’

“마법을 보여 줘. 확실하고, 강력한 거.”

‘응!’

‘맡겨만 줘!’

바닥이 미미하게 울리기 시작할 때쯤 토번이 입을 열었다.

“……원, 원수를 찾아 죽이기 위해 오래 도망을 다녔다고……. 스스로를 소개할 때 로 마하탐이라고 말하는 이는 건들면 안 됩니다. 삶의 목적이 그거 하나뿐인……. 그, 뭐랄까. 복수에 사활을 건 잔악한 이들이라서요.”

모두의 시선이 다시 돈을 향하는 순간 타이밍 좋게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창틀에 걸려 있던 양모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발겨지고, 창문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고 창문의 파편을 피해 몸을 웅크린 단주들이 탁자 밑으로 숨으려는데 정찬실의 긴 탁자가 순식간에 쩌저적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탁자는 양옆으로 쓰러졌고 바닥에 닿는 동시에 모래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찬실의 아름다운 대리석 바닥도 끝없이 요동쳤다.

그뿐 아니라 정찬실의 불이 미친 듯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다들 겁에 질려 차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는데, 마치 에코라도 넣은 듯 정찬실 안에 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로 마하탐.”

“로 마하탐.”

“로, 마하 탐.”

“로……. 마하, 탐.”

공포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토번이 제일 먼저 비명을 지르며 정찬실 밖으로 뛰쳐나가려 움직였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만! 나는 자네의 가족을 죽이지 않았어! 그만! 나가게 해 줘!”

토번의 비명 때문에 다른 단주들까지 패닉 상태가 됐는지 그들은 일제히 문으로 달려가 문을 부서뜨릴 듯 두드렸다.

“밖에 누구 없어요! 나가게 해 줘!”

“우린 아니라고!”

“이봐요! 여기 사람 있어요!”

“우란! 대체 왜 마법을 보여 달라 한 건가!”

“나갈래! 이봐! 거기 누구 없어!”

상황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입을 움직였다.

“그만.”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방 안에 울려 퍼지던 돈의 목소리도, 바닥의 울림과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까지도.

그리고 정찬실 안의 모습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양모는 여전히 창틀에 걸려 있었고, 창문도 금 간 곳 하나 없었으며 탁자 역시 멀쩡했다.

문을 두드리던 이들은 귀신에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주변을 둘러보곤 돈을 바라봤다.

돈 역시 적잖이 당황했는지 손끝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냉큼 두 손을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 버렸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얼른 말했다.

“오늘 일은 다들 비밀에 부쳐 주길 바랍니다. 들었다시피 내 마법사가 은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 정체가 밝혀지면 어찌 될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이분이 성질이 그리 유순하진 않아서요.”

단주들이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거만하게 턱끝을 들고 문을 가리켰다.

아마도 문을 열고 밖으로 꺼지라는 뜻 같았는데, 정령들이 아까보다 눈치가 생겼는지 지들 맘대로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토번과 다른 단주들이 우당탕탕 넘어졌다가 일제히 일어나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다들 꽁지가 빠지게 빠른 걸음으로 내달리듯 걸으며 저택 부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정찬실에 남아 있던 우란은 가만히 서 있다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확실하군요.”

“그럼요. 베르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데 허투루 하겠습니까.”

우란의 눈빛은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확신에 가득 찬 눈으로 돈과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우란은 ‘곧 계약서를 보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정찬실을 빠져나갔다.

모두가 나간 후에야 돈은 부릅뜬 눈에서 힘을 빼고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아가, 아가씨!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방금? 너무 무서웠어요! 아가씨 괜찮으세요?”

진이 빠진 내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빼내자 돈은 나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아가씨 마법사가 되셨어요?”

“사정이 있어서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엇비슷해.”

“우와.”

돈이 아래로 처진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올려다보기 목 아파. 앉아서 얘기하자, 돈.”

“네, 아가씨.”

돈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의자에 앉아야지. 왜 그래. 너 아직도 누가 노예 출신이라고 괴롭혀? 이젠 그러는 사람도 없잖아.”

“아. 이상하게 아가씨 옆에 있으면 마음이…….”

“당당하게 행동해.”

“네, 아가씨.”

히죽 웃은 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앤이 들어왔다.

“아가씨, 손님들이 가셨으니 정찬실을 치울…… 와우.”

앤의 눈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돈과 나를 빠르게 훑었다.

설마 이 자세로 돈이 노예 돈이라는 걸 알아채진 않겠지.

돈이 평소처럼 고고하게 서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자세 때문에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머리를 굴리는데 눈을 힘주어 뜬 앤이 큰 결심을 한 듯 주먹을 불끈 쥐고 물었다.

“……편한 옷을 준비해 드릴까요?”

“……나가.”

“넵.”

앤이 나간 후 돈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서대륙어는 언제 그렇게 공부한 거야? 통롤러 팔러 다닐 때는 남들 시선 때문에 마차에서 책을 읽을 수도 없었을 텐데.”

“방에 숨겨 놓고 밤에 매일 조금씩 공부했어요.”

“발음이 너무 자연스럽던데. 토번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건 어떻게 한 거야?”

돈은 부끄럽다는 듯 수줍게 웃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가, 꿈에서도 서대륙어 공부를 했어요.”

“……꿈에서도?”

“네. 저는 책상에 앉아 있고, 엄청 많은 사람들이 제 곁을 둘러싸고 서서 책에 적힌 내용을 읽어 보라고 시켰어요. 제가 문장을 읽으면 자기들이 다시 읽어 준 뒤 발음을 따라 해 보라 시키고, 발음을 따라 하면 똑바로 할 때까지 또 시키고……. 매일 밤마다 꿈에서 여덟 시간씩 그러니까 공부가 안 될 수가 없었어요.”

“그래? 신기하네!”

활짝 웃으며 대답하자 신이 난 정령들이 쫑알쫑알 떠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했지!’

‘주눅 든 착한 왕강아지가 서대륙어 공부하는 거 귀여워서 우리가 도왔지!’

‘매일 노력하는 게 안쓰러워서 도와줬어!’

‘모르면 알 때까지 시켰어!’

‘이해가 안 되면 외우라고 했어!’

‘외국어는 단어 싸움이야. 단어 시험도 쳤어!’

정령판 주입식 교육의 산물이 내 눈앞에 앉아 있구나.

자길 가르친 이들이 정령이라는 걸 돈은 꿈에도 모르겠지.

그런데 매일 밤마다 공부했다니. 귀엽고 대견했다.

“……혹시 그것도 아가씨의 마법이었나요?”

“아니.”

“아……, 저는 아가씨가 저 도와주시는 줄 알고, 실망 안 시켜 드리려고 열심히 했어요. ……물론 꿈이 아니었어도 열심히 했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로 마하탐은 어떻게 알았어?”

내 질문에 돈은 난처한 듯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황녀 전하께서 단번에 제가 서대륙 출신이 아닌 걸 알아채셨어요. 그런데도 이유는 묻지 않으시고 누가 귀찮게 하면 ‘로 마하탐’이라고 답하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하여간에 눈치 빠르고 치밀한 인간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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