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한참 싸운 둘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툰 어린이들처럼 불퉁한 얼굴로 저택으로 들어왔다.
그레이는 입술이 터져 있었고 옷도 엉망이었지만 빌에 비하면 멀쩡한 편이었다.
빌은 쌍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도 퉁퉁 부은 데다 씩 웃으니 아랫입술에서도 피가 흘렀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송장이었다.
“……그레이, 너 진짜로 죽자고 때렸구나.”
“야, 내가 진짜로 때렸으면 저걸로 안 끝나.”
툴툴대며 대답한 그레이는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안 그래도 인상이 날카로운 편인데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서인지 한층 더 무서워 보였다.
아까 결투 중에 꾀병 부린 것 때문에 화났나?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미간을 찌푸린 그레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너 아까 아프다며. 괜찮아?”
“어?”
내게 손을 뻗으려던 그레이는 제 손이 엉망인 걸 깨닫고는 손을 몇 번 툭툭 털어 버렸다.
“지금은 괜찮냐고. 아까 아프다고 했잖아. 어디 아픈데. 머리? 아까 머리 짚으면서 쓰러졌잖아. 햇빛이 너무 강해서 어지러웠나? 혹시 열도 나? 의사 부를까?”
몇 번을 털어 내도 손이 깨끗해지지 않자 포기했는지 그레이는 허리를 숙여 제 이마를 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열 안 나는데? 어디가 아픈데?”
“아, 그냥 잠깐 현기증…….”
“으이그. 멍청아. 뭐 좋은 구경이라고 피 터지는 걸 나와서 보고 있냐. 그러니까 현기증이 나지. 얘가 진짜 갈수록 마음이 약해져서 큰일이네, 큰일이야.”
걱정 섞인 핀잔을 줄줄 뱉던 그레이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잡더니 몸을 들어 올렸다.
아까 낮에 티온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또 목욕 도중 도망치다가 잡혀 온 강아지 꼴이 됐다.
그레이는 쪽팔리지도 않는지 그 상태 그대로 빌에게 말했다.
“빌. 의사 불러 줄 테니까 치료하고 가. 그리고 반지 도로 다 가져가고.”
“이왕 사 왔으니 정성을 봐서 하나 정도는 우정의 의미로.”
“있는 우정도 갖다 버리기 전에 가져가.”
“응. 챙겨 가야지.”
얼굴이 피떡이 되어서도 빌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레이는 빌을 향해 픽 웃어 보이고는 카라샤펠 황녀에게 말했다.
“전하, 솔레아가 아파서 이만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글쎄. 내가 보기엔 공자 얼굴이 더 아파 보이는데.”
“별거 아니에요. 솔레아가 현기증이 난대서요. 갑니다.”
그레이는 황녀에게 고개만 까딱 기울이고는 나를 든 채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이 굉장히 친해진 것 같아 의아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레이에게 들려 옮겨지는 건 너무 부끄러웠다.
나완 달리 그레이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지 대기하던 앤에게 아무렇지 않게 명령했다.
“솔레아가 마실 미지근한 물 좀 가져와.”
“예, 도련님!”
“그리고 얘 이마 닦아 줄 수건이랑 차가운 물도.”
“예, 도련님!”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활기차지?”
“전 항상 활기찹니다, 도련님!”
묘하게 평소보다 밝고 희망 찬 앤을 보며 그레이가 ‘이상한데? 들떴는데?’라고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절대 내 발로 땅을 디디게 할 생각이 없는지 그레이는 발로 문을 차서 열어젖혔다.
“……내가 손으로 열면 되는데 왜 문을 발로 차고 그래.”
“야, 됐어. 이런 거에 괜히 힘쓰지 마. 체력 딸려.”
그레이 놈아. 너는 머릿속에 솔레아밖에 없는 거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 매일 밖에서 너랑 운동을 하는데 햇빛 아래에 몇 분 서 있었다고 현기증이 오겠냐고.
그 전에 문 여는 게 왜 힘쓰는 거야.
혹시 나를 민망하게 하려는 고도의 전략인가.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나를 침대에 조심히 내려놓고 손수 구두까지 벗겨 준 그레이는 인상을 찌푸린 채 침대 옆에 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왜 쓰러졌지? 밥도 잘 먹고, 운동도 꾸준히 하는데.”
“오빠. 쓰러졌다기보다는 그냥 잠깐 어지러웠던 거야.”
“잠을 제대로 못 자나? 하, 안 그래도 심약한 애가 몸도 이렇게 약해서 어떡하지? 야, 이제 그냥 나 불러. 어깨에 지고 다니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떡하냐, 진짜. 문도 못 열고.”
“문은 네가 발로 차서 못 연 거지!”
“힘도 없는 애한테 어떻게 문을 열라고 하냐!”
이보세요. 저 커다란 세숫대야를 들고 들어오는 앤이 눈에 안 보이냐고요.
“도련님! 여기, 헉! 물이요! 이건 물수건이요! 이걸로 도련님 손 먼저 닦으시고요! 아가씨 이마에 올리실 수건은 대야 안에 들어 있어요! 도련님이 직접 하실 것 같아서 이렇게 준비해 왔어요! 아가씨께서 드실 물은 또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고마워.”
“도련님 드실 물도 같이 가져올게요! 많이 목마르시죠! 제가 빨리 갔다 올게요!”
“응.”
앤은 재빠르게 방을 나갔다.
앤이 가져다준 젖은 수건으로 손을 닦고 탁자 구석에 대충 올려 둔 그레이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왜 자꾸 아프고 그래. 아이고, 솔레아 아플 때마다 그레이 심장 떨어지네.”
“……나 진짜 그냥 잠깐 어지러웠던 거라니까…….”
진짜 믿는 건지 놀리는 건지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로 그레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 안 아파. 진짜야.”
“예, 예. 알았습니다. 그래도 어지러웠던 건 맞으니까 머리 좀 차갑게 합시다.”
그레이는 대야 안에 있던 수건을 꺼내 물기를 쭉 짜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물에 적셨다.
이번엔 수건을 적당히 비틀어 물기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곤 내 이마에 고이 올려 뒀다.
“쉬고 있어. 나 나가서 빌한테 인사하고 올 테니까.”
“나도 갈게. 사라한테 할 말이 있어서.”
“있어, 그냥. 할 말은 내가 대신 전해 줄게.”
“음……. 잘 부탁해요?”
“그래. 그대로 전할게. 그러니까 너는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 올 때 의사도 데려올 테니까.”
“나 진짜 괜찮다니까!”
“네, 알았다고요. 누워 있으시라고요.”
일어나려는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살짝 눌러서 도로 눕힌 그레이는 씩 웃으며 방을 나갔다.
몇 분 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앤이 들뜬 얼굴로 물었다.
“그레이 도련님은요?!”
“빌한테 인사하러 갔어.”
“헉! 정말요? 무슨 인사요? 이왕 오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세상에, 아쉽지도 않으신가.”
“앤, 조용. 생각 멈춰.”
“……넵.”
조용해진 앤은 꾸벅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그레이가 의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로 울상이 된 티온과 심각한 얼굴의 헤이먼, 까딱했다가는 사람도 칠 거 같은 공작님이 따라 들어왔다.
“그레이, 네가 어떤 친구를 사귀든지 그건 네 자유다. 다 컸으니 아비가 그런 것까지 간섭할 순 없지. 한창 피가 끓을 나이니 주먹다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동생 앞에서 싸움질을 해 애를 기절시켜야겠니.”
저는 기절한 적이 없습니다.
“……막내, 무서웠어?”
저는 무섭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부터 챙기라고 했잖아! 제발 다치지만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이게 뭐야.”
저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내가 계속 신경 쓰고 있었는데 햇볕이 뜨거워서 그랬나? 갑자기 픽 쓰러지더라고.”
여름은 끝나 가고 있습니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검붉은 와인이 가득 채워진 잔을 든 황녀까지 방으로 들어왔다.
“공녀가 많이 놀란 거 같던데. 순식간에 무릎이 꺾여서 내가 미처 잡을 새도 없었어.”
저 사람은 구라를 치고 있습니다.
그때 나랑 눈이 마주쳐서 내 표정 다 봤으면서.
황녀를 노려봤지만 그녀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내 안색을 살피던 의사가 이마의 온도를 재려는지 불쑥 손을 뻗었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손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흠칫 움츠러들었다가 살짝 눈을 떴다.
의사의 목뒤에 서슬 퍼런 검을 겨눈 티온이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내가 잘 놀란다.”
제가 한 번만 더 놀랐다가는 나라가 무너지겠어요.
잔에 든 와인을 찰랑찰랑 부드럽게 흔들며 창가 앞 의자로 다가가 앉은 카라샤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심해. 걸어 나가고 싶으면.”
양기²+양기+양기+양기+살기=공포
내 상태를 살피는 의사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고, 공녀님께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십니다.”
“다시.”
공작의 싸늘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의사가 아까보다 세심하게 나를 살폈다.
눈을 까뒤집어 보고, 이마의 열을 재 보고, 혀를 내밀어 보라 하고는 혓바닥의 색깔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 후엔 어지러운지, 속이 메스꺼운지, 본인이 보여 주는 글자가 잘 읽히는지 등등을 물었다.
물론 나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답했다.
당장 다음 주에 상단주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아파서 누워 있어야 된다고 하면 큰일이었다.
이 사람들 성격이라면 만남 자체를 뒤로 미룰 수도 있었다.
“고, 고, 공녀님께서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
공작의 번뜩이는 자안에서 살의가 물씬 느껴졌다.
난 의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전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나 진짜 괜찮다니까! 다들 왜 그래요!”
“야! 왜 일어나! 아까 어지러웠다며! 어디가 문제인지는 알아야지!”
“아깐 네가 결투하는 거 보고 놀라서 그랬어!”
“전에 결투하는 거 봤을 땐 기절까지는 안 했잖아!”
왜 아까부터 자꾸 기절을 했대!
답답해서 가슴을 퍽퍽 치자 헤이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력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멍 들면 어쩌려고 그래. 아프잖아.”
“마력 집어넣어! 나 안 아파요! 제발! 나 안 아파! 진짜야!”
“그럼 왜 그랬어?”
“슐로든은 싫었는데 빌이랑은 친하니까 그렇지!”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까 전 의사를 위협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냉기가 방 안을 감돌기 시작했다.
숨통을 조일 정도로 무거워진 공기에 눈치를 살피던 의사가 뒷걸음질로 방을 나가 버렸다.
왜 다들 조용해졌지,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공작님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으며 내게 물었다.
“우리 딸. 나사니엘 영윤과 친하다고?”
미소를 짓고 있긴 하지만 묘하게 서늘한 분위기였다.
응? 하며 다시 묻는 공작의 얼굴을 보아 하니 이대로 넘어가선 안 될 것 같았다.
“공작님. 아니, 아빠. 친하긴 한데 생각하시는 그런 친함이 아니라 파티에서 본 적 있고, 대화도 몇 번 해 봤다는 그런 의미예요. 절대 뭐 다른 쪽으로는 염두에 둔 적이 없고요. 네, 생각도 안 해 봤어요. 전혀. 훠우∼ 무슨. 절대. 에이, 아니에요.”
너스레를 떠는 내 모습에 공작은 의심이 풀렸는지 씨익 웃었지만 황녀는 아닌 것 같았다.
카라샤펠은 새파란 눈동자로 나를 직시하며 물었다.
“솔레아, 아까 보니 나사니엘 영윤과의 사이에 비밀이 있는 눈치던데, 혹시 오늘 그 반지가 원래 너한테 선물하려던 거였어? 뭔가 틀어져서 일이 꼬인 거야?”
상황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몇 가지 단어만 알아들었을 것이다.
솔레아, 나사니엘 영윤, 비밀, 반지.
아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문 그레이가 뒤돌아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순간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야! 나 눈 되게 높아!”
“뭐?”
쪽팔림을 무릅쓰고 랩하듯 퍼부었다. 내 꿈은 국힙원탑.
“나! 눈 엄청 높아! 아빠 너무 잘생겼고, 다정해! 아빠 동년배들 다 배 나왔던데 아빠는 아직도 핫가이! 다리 너무 길어요! 미끄럼틀 타도 되겠어요! 일하는 것도 멋있어! 자랑스러워! 아빠가 내 아빠라서 행복해! 뿌듯해! 사랑해요! 그리고 티온 너무 멋있어! 테, 테스토스테론이 흘러넘쳐! 귀여워! 듬직해! 기대고 싶어! 힘도 너무 세! 흉터마저 잘생겼어! 사랑해! 헤이먼 예뻐! 귀여워! 친절해! 다정해! 가끔 짜증 내도 예뻐! 처연미가 절절 흘러넘쳐! 사랑해! 그레이 냉미남! 너무 좋아! 틱틱대도 제일 많이 챙겨 줘! 다정다감의 의인화! 날이 갈수록 잘생겨져! 인간섹ㅅ, 아니 섹시! 사랑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 이런 가족들을 두고 내가 대체 누굴 만나겠어요. 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