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92)

81화

빌은 강건한 태도로 일관했다.

“아니! 미치지 않았어!”

“……차라리 미쳤다고 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그레이의 짜증 섞인 물음에도 빌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당당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서 눈만 끔뻑끔뻑 깜빡였다.

“당장 이유를 말할 순 없지만! 항상 같은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기에!”

“아아악!”

그레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두 발로 바닥을 쿵쿵 굴렀지만 매번 결투를 거절당한 빌은 별다른 데미지를 입지 않은 듯했다.

“네 손가락 크기를 정확히 몰라서 일단 있는 대로 다 사 와 봤어! 디자인도 원하는 걸로 골라!”

빌은 환한 얼굴로 바지 주머니, 재킷 안주머니, 바깥 주머니 등에서 온갖 종류의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저게 무슨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준비해 봤어.’ 같은 소리야.

나까지 골이 다 아프네.

저 행동의 의미가 결투 신청이란 걸 알면 그레이가 저렇게 싫어하진 않을 텐데.

나는 상황이 더 꼬이기 전에 사라와 함께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사라는 종종걸음으로 빌에게 달려갔다.

“오빠 왜 그래, 정말! 공자님께 왜 반지를 드리는 거야!”

민망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사라가 빌을 말리려고 했지만 황녀에게 저지당했다.

“영애, 그냥 둬. 반지를 준비해 온 남자의 마음을 쉽게 무시해선 안 돼.”

그동안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던 그레이가 처음으로 황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카라샤펠은 두 손바닥을 펼친 채 어깨를 으쓱하곤 사라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빌도 나이가 있는데 영애가 매번 그리 말리면 쓰나.”

“그, 그래도 반지는…….”

“쉿. 자네 오라버니의 진심을 그레이 공자가 알아줄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예, 그, 네?”

그레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이젠 내가 끼어들어야 했다.

“그레이! 오해하지 마. 빌이 딴마음 있어서 반지를 선물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너랑 결.”

“결투는 아니다! 이제 그건 욕심이 없어!”

내 조언대로 했다는 듯 빌이 나를 보며 윙크했다.

……야 이 빌청아. 눈치가 왜 그렇게 없어요.

우리 오빠 표정 안 보이냐고요.

어느새 카라샤펠 황녀와 사라까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결투가 아니면 뭐지?’ 하는 눈빛이었다.

황녀를 두려워하던 사라였는데 호기심이 공포를 이겼나 보다.

여전히 황녀에게 어깨를 잡혀 있는 사라가 까치발을 살짝 들더니 황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며 물었다.

비록 거실이 워낙 조용해서 다 들렸지만.

“‘결’로 시작하는데 반지를 주면서 청하는 게 뭐가 있죠, 황녀 전하?”

“자네 머릿속을 강렬히 스친 그거겠지.”

“아! 헙!”

입을 틀어막은 사라가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그레이와 빌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대로 놔두면 당사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두 집안에 혼담이 오가게 생겼다.

나는 두 사람 사이로 재빠르게 다가갔다.

“그레이, 오해가 좀 있는 거 같은데 빌이 반지를 준 이유는 그, 거시기, 그런 게 아니고.”

말을 하던 중에 황녀가 끼어들었다.

“공녀, 그리 꽉 막힌 사람일 줄은 몰랐어. 책도 많이 읽은 사람이 어찌 그래.”

“에잇, 아니라니까요!”

“방금 에이씨, 하려다가 에잇으로 바꾼 거 같은데?”

능글대며 내 말을 막는 황녀 때문에 빌을 변호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솔레아. 내가 물어볼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쉰 그레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야, 빌. 이유나 들어 보자. 왜 하필 반지야? 계속 장갑만 들이밀다가 왜 갑자기 반지를 주냐고. 너 괜히 장난이나 치는 놈은 아니잖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대련을 하자는 거야? 진심을 담은 결투 신청이라면 나 지금 가능할 것 같은데.”

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솔직하게 결투를 신청하는 거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말지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해. 그냥 말하세요.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그냥 말하시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강렬한 눈빛으로 어필했지만 빌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빌은 전에 내가 했던 조언들을 여전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장갑은 이제 그만 선물하시고, 결투 얘기도 그만하시라는 말.

하지만 그 두 조언이 이렇게 진화할 줄은 저도 몰랐거든요.

내가 이마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자 그레이가 나를 바라봤다.

“솔레아, 왜 그래? 머리 아파?”

“아니야, 나 안 아파. 괜찮아.”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그레이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질문했다.

“혹시 알고 있었어? 빌이 반지를 사 온다는 거?”

알고 있었다고 하면 그간 편지가 오가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았냐고 물을 테고, 그럼 몰래 저택을 빠져나간 것도 알게 될 텐데.

잠깐 갈등하는 사이에 빌이 호쾌한 목소리로 대답을 가로챘다.

“공녀님은 전혀 모르고 계셨어. 이건 나 혼자 결정한 거다! 네가 이 반지를 꼭 받아 줬으면 해!”

“야, 나와.”

“반지를…….”

“나오라고. 이기고 나서 얘기해.”

안 그래도 인상이 더러운 그레이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냈다.

스르릉, 검날이 우는 소리가 넓은 현관에 울려 퍼졌다.

“드디어! 결투인가?!”

빌이 해맑게 외치며 반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레이는 환하게 빛나는 빌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너 결투하고 싶어서 일부러 사람을 살살 갈구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결투 해 줄 테니까 따라 나와. 손모가지든 그냥 모가지든 썰어 줄게.”

빌은 신이 나 그레이를 쫄래쫄래 쫓아 나갔지만 사라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버렸다.

“우, 우, 우리 오빠가…… 정말로 죽으면 어떡해요. 아무리 그래도 결투하겠다고 일부러 그레이 공자님을 화나게 할 줄은 몰랐어요.”

황녀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사라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이렇게 죽으면 호상 아니겠니. 얼마나 영예로워. 간절히 바라 온 일이었잖니.”

사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멍하니 그레이와 빌이 빠져나간 저택의 문을 바라보던 사라는 두 사람의 뒤를 쫓아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빠,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사라까지 나가고 나니 현관엔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서 있는 나와 여전히 모든 것이 즐거워 보이는 황녀, 그리고 빌이 내팽개친 수많은 반지만 남았다.

아, 젠장.

“전하! 그것도 위로라고 하세요!”

“내가 뭘. 빌이 원한 건 처음부터 결투였잖아?”

“알고 계셨어요?”

“그럼.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그런데 왜 자꾸 그레이를 약 올리셨어요!”

“나도 공자가 저리 꽉 막힌 사람일 줄은 몰랐지. 로맨스라고 쳐도 나사니엘 백작가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황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혼돈의 프러포즈 때문에 나사니엘 백작가의 후계자가 죽게 생겼는데 뭐가 웃긴 거야.

쨍그랑!

손님들께 대접할 차를 들고 오던 앤이 트레이를 떨어뜨리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도, 도, 도, 도련님과 나사니엘 백작가의 영윤이…….”

“앤, 바닥에 떨어진 반지들 치우고 여기서 조용히 기다려. 찍소리도 하지 말고. 아니, 아무런 상상도 하지 마.”

“그래. 이런 건 비밀을 지켜 줘야지.”

“좀! 황녀님은 절 따라오시고요!”

앤에게 입단속을 시킨 뒤 황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두 사람이 향한 곳으로 걸어갔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는지 빌과 그레이는 검을 빼 들고 대치 중이었다.

사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애타는 사라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빌은 상당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야. 마지막으로 묻는다. 반지 왜 가져왔어.”

그레이가 긴 검으로 빌을 겨누며 물었지만 빌은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게 주고 싶었다!”

……그냥 생각이 없어 보였다.

“됐다. 그냥 덤벼.”

상대가 너무 해맑으니 화내는 것에도 지쳤는지 그레이는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하곤 두 손으로 검을 말아 쥐었다.

들뜬 얼굴의 빌이 검을 쥔 채 빠르게 뛰어와 그레이에게 덤벼들었다.

챙!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가까이 붙어서 힘을 겨루기 시작했다.

덩치는 빌이 더 컸지만 땅을 디디고 선 그레이의 두 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뿐하게 검을 밀어 내고 발로 빌의 복부를 가격한 그레이가 몰아치듯 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충돌하는 소리가 번개처럼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빌은 그레이의 공격을 겨우 받아 내고는 있지만 몸이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현격한 실력 차이였다.

“야! 이! 새끼야! 내가! 결투! 싫다고! 어?! 몇 번을! 말하냐!”

그레이는 이 긴급한 와중에도 박자에 맞춰서 말하며 빌에게 화를 냈다.

“그, 래도! 꼭 한 번! 다……시! 붙어 보고! 싶! 으악! 싶었는데!”

공격을 할 때마다 검의 각도를 바꿔 내려치는 그레이의 검술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저려 올 정도였다.

차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사라의 얼굴이 파랗게 물들어 갔다.

그레이가 짜증 난 건 이해하지만, 여기서 빌을 죽이면 나사니엘 백작가와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설마 진짜로 죽이기야 하겠어.”

내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황녀가 슬쩍 가까이 다가왔다.

“죽일 것 같은데?”

황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레이가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검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레이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빌의 옷이 찢어지며 베인 살갗이 드러났다.

“그냥 솔직하게! 친구 하자고 해라! 무슨! 진짜, 확 그냥! 어!”

“엇, 그럼 이거 끝나고 친구를…….”

그레이의 검을 막아 내느라 바닥에 거의 주저앉다시피 하고 있던 빌이 뜬금없이 친구라는 말에 반응했다.

움찔하는 빌의 검을 곧바로 쳐 낸 그레이가 그의 심장을 겨냥했다.

빌에게 겨눠진 예리한 검의 끝을 보는 순간 내가 벌인 각종 사업과, 오빠들의 명예 같은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때 한 문장이 머리를 스쳤다.

‘솔레아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거 잘 못 보거든요.’

나는 재빠르게 소리쳤다.

“솔레아 아파!”

황녀가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얼른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 옆으로 쓰러졌다.

“뭐? 어디가?!”

결투에 집중하던 그레이가 내게로 눈을 돌린 그 순간, 빌이 그레이의 검을 피해 있는 힘껏 그를 밀어 버렸다.

훌륭한 몸통 박치기가 끝난 뒤 빌의 칼끝은 그레이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하하! 방심을 하다니! 이번엔 내가 이겼, 악!”

몸을 비틀어서 빠져나온 그레이가 검을 집어 던지고서 빌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아니! 악! 결투 중에! 주먹을!”

“친구끼리는 싸우면서 크는 거야. 아까 친구 하자며.”

“악! 아니, 그래도 주먹은! 악!”

결국 빌도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고서 그레이와 주먹다짐을 하기 시작했다.

기사도는 검을 내려놓은 김에 갖다 버렸는지 둘은 마구잡이로 서로를 때리고, 발로 차며 연무장을 뒹굴었다.

뽀얀 흙먼지가 두 사람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반지를! 미친 새꺄! 왜 주냐고!”

“주고 싶어서 줬지!”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부를 때 한 번이라도 좀! 나오지! 상대도 안 해 주고!”

“그래서 반지를 들고 왔냐! 어!”

“그래! 이 나쁜……. 어, 이, 어, 나쁜, 무화과파이 같은 놈!”

제 오빠가 쥐어 터지고 있는데도 사라는 안 죽어서 안심했다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다행이야.”

“사라. 지금 빌 코피 터졌어요. 좀 있으면 박도 터지겠어요.”

“괜찮아요. 좀 맞아도 싸죠. 하, 너무 놀랐네. 정말 다행이에요. 안 죽어서.”

“……그런데 빌이 왜 그레이한테 무화과파이라고 한 거예요?”

사라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가 무화과파이를 싫어하거든요. 저거 욕이에요.”

아……. 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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