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 *
“얘들아. 오늘 이상하게 벌레 새끼가 많지 않아?”
“괜찮아! 임시 주인은 마력 빠따를 잘 휘두르니까!”
“맞아!”
됐다. 무슨 말을 하겠니.
늦은 밤까지 마력 빠따를 휘두르다가 겨우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눈알이 따로 돌아다니는 것처럼 뻑뻑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황녀가 있으니까 아침을 거를 순 없지.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의 시중을 받으며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자 또 벽이었다.
“티온.”
“가자. 식사하러.”
부드럽게 미소 지은 티온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들어 올렸다.
“……나도 다리 있어. 나 걸을 줄 알아.”
목욕시키려다 도망간 강아지 잡아 오듯 내 옆구리를 잡아서 그대로 들어 올린 티온은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응, 그래도. 여기, 융단을 바꿔서. 혹시 너 걸을 때 불편할까 봐.”
그러고 보니 내 방 앞 복도의 융단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어제 조쉬가 오줌 싸서 그렇구나.
“내가 새벽에 하인들한테 명령했어.”
“잘했어. 근데 나 융단 새거라고 못 걸어 다니진 않아.”
“아……. 그럼 계단까지만. 계단은 위험하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솔레아 방이 2층인데 그동안 계단을 몇 번을 오르내렸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나 원래 집도 달동네였다고. 거긴 계단을 안 타면 집에 갈 수가 없어요, 이 사람아.
하지만 티온은 정말 조심스럽게 나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 그리고 나 손이 다 나았어.”
“와, 그게 정말이야?”
신기하다는 듯 박수를 짝짝 치며 대충 대꾸했다.
당연히 나아야지.
그게 어디 보통 마력이니. 자연의 정령들이 힘을 써 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티온이 새끼손가락을 치료받으러 갈 거 같지 않아서 잠들기 전에 정령들에게 부탁했었다.
“응. ……다행이야.”
“왜. 안 아파서?”
계단을 다 내려온 후 나를 바닥에 내려놓은 티온은 날 보며 활짝 웃었다.
“네가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잖아.”
“하…… 우리 쁘띠 아가 불곰. 언제 이리 컸을까. 대견도 하지.”
“응?”
티온은 웃는 얼굴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지만 나는 대충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무 말도 아니야.”
“응.”
티온은 연신 싱글거리며 나를 데리고 정찬실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이구나, 솔레아.”
“네, 아빠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덕분에.”
황궁에서 이틀 밤을 새우고 돌아왔다던 공작님은 어제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그다지 낯빛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헤이먼도 무슨 일인지 표정이 영 구렸다.
이달론이 찾아올 때가 되어서 우울한 건가……?
이달론에게서 헤이먼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마법 관련 서적도 미친 듯이 파헤쳤지만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했다.
헤이먼은 그런 날 보며 쓰게 웃기만 했다.
자긴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라고.
괜히 기억을 떠올리니 기분이 구려졌다.
아끼는 사람에게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듣는 게 이렇게 빡치는 거였구나.
내 구려진 표정을 봤는지 그레이가 한마디 건넬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물고는 내 옆에 앉은 티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형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실실 웃어?”
저 새끼가 아침부터 시비를 거나?
난 당황한 표정으로 티온과 그레이를 봤다. 그도 그럴 것이 티온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냥한 눈빛으로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저런 말이 나올 법도 하네.
“티온. 그만 웃어.”
“솔레아. 고구마 맛있어. 이거 더 먹어.”
심지어 내 그릇 위에 자기 몫의 고구마를 올려 주기까지 했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황녀가 픽 웃더니 박수를 짝짝 쳐서 하녀를 불렀다.
“이봐, 공자. 먹던 걸 주면 쓰나. 우리 영애를 위해 소고기를 좀 더 구워야겠어.”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가 네! 하는 당찬 대답과 함께 냉큼 사라졌다.
“전하, 여긴 전하의 황궁이 아니에요. 남의 집 하인을 그렇게 제 사람 부리듯이 부려 먹지 마세요. 그리고 저 소고기 더 안 먹어도 돼요.”
“괜찮다. 다 내 백성들이니.”
“아, 진짜 대화가 어디부터 막혔는지 가늠도 안 가네.”
뭔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숙여 보니 내 그릇 위에 아스파라거스와 구운 가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레이.”
“식기 전에 빨리 먹어. 야채를 많이 먹어야 튼튼해. 소화도 잘되고.”
“아직 소고기는 안 됐나?”
“실비아, 솔레아의 물잔이 비었으니 얼른 채우거라. 식사 중 목이 막히면 큰일이잖니.”
“아버지까지 왜 그러세요? 이거 과보호예요.”
이 정신없는 와중에 티온은 스푼으로 직접 고구마를 뜨곤, 혹여나 떨어질까 한 손으로 받친 채 내 입 앞까지 들이댔다.
“고구마 뜨거워서 안 먹어……?”
“아, 됐다고! 그만!”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황녀와 그레이는 키득거렸고, 헤이먼은 미미하게 웃으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티온은 여전히 고구마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레아. 아무리 그래도 식사 중에 소리를 지르면 안 되지.”
“……네, 아버지. 죄송합…….”
“그러니 디저트는 둘이서 먹는 게 좋겠구나.”
아.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치고 겨우 좀 쉬나 했더니 뜻밖의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사라! 빌! 마침 가려고 했는데!”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공작저의 정문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계단을 내려가니 마침 빌과 사라가 저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공녀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기 토끼 사라가 내게 호다닥 뛰어오려던 찰나 황녀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저런. 윗사람에게 먼저 인사해야지. 그게 예법이잖아?”
“흐업.”
황궁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여기 계시지, 하는 혼란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카라샤펠을 올려다보던 사라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황녀 전하. 이, 이, 이리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사니엘 백작가의 사라, 아니 그 전에 제국의 작은 빛이 미천한 자를 뵈옵니…… 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사라가 말을 멈췄다.
카라샤펠 황녀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래. 영애는 확실히 작으니 작은 빛이라 치고, 평소에 나를 미천하다 여겨 왔나 보군.”
사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카라샤펠에게 작게 말했다.
“전하. 사람 놀리지 마세요. 긴장해서 실수한 거잖아요.”
“긴장해서 속마음이 나왔을 수도 있지.”
“랏샤.”
“알았어. 아, 거참. 까탈스럽기는.”
랏샤는 투덜거리며 사라의 뒤에 서 있는 빌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황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사라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내게 매달렸다.
“고, 고, 공녀님. 저 방금 황녀 전하께 무슨 소리를. 세상에. 저 내일 죽어요. 아니, 오늘 죽어요. 당장 죽어요!”
“안 죽어요. 죽게 안 둘게요. 전하가 장난기가 심하셔서 그렇지 사람 쉽게 죽이시진 않…….”
연회장에서 내 목에 검을 겨누던 황녀의 호위 기사들이 생각났다.
“쉽게 죽이시기는 하는데 그래도 한 번쯤 고려는 해 보시는 편이에요. 괜찮을 거예요.”
난 위로에 재능이 없는지 사라의 낯빛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어쨌든 사라가 온 김에 어제 시장에서 구해 온 「낙인」을 추천할 생각이었다.
함께 방으로 올라가던 중 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공녀님, 오늘 온 거는요. 아, 물론 전에 함께 놀러 가자 하셨던 것도 있지만, 그, 저기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편히 말하세요.”
“책 좀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책이요? 왜요?”
“독서 살롱에서 다음번 책 선정 해야 할 사람이 저거든요. 근데 마땅한 게 생각이 나지 않아서요. 공녀님은 책을 많이 읽으셨잖아요.”
이게 웬 떡이야. 아싸.
사라의 동글동글한 눈이 꼭 책을 추천해 달라는 듯 나를 간절하게 바라봤다.
펄쩍 뛰며 쾌재를 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나는 자연스럽게 책 더미 속에서 「낙인」을 꺼내 들었다.
“꽤 오래된 책이네요?”
“네. 무슨 내용이냐면…….”
결말 부분을 빼고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했다.
“……너무 슬픈 내용일 것 같아요.”
어쩐지 주저하는 것 같아서 나는 사라의 두 손을 꼭 잡고 나긋하게 속삭였다.
“인간이 인생을 고찰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비극이 닥칠 때랍니다.”
“아.”
사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때다.
마트 판매왕이었던, 팔이피플 시절의 나를 보여 주마.
부끄러움을 꾹 참고, 마치 연극을 하듯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한 손을 가슴 위에 얹고, 다른 한 팔은 쭉 뻗었다.
“삶은,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되뇌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이 소설처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사라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물론 화려한 온실 속에서 자란 사라가 인생의 쓴맛을 알지는 못하겠지만.
“좋은 교양서적들도 많습니다만, 소설이야말로 내가 살아 보지 않은 타인의 삶을 깊이 공감하게 해 주는 유일한 매개체가 아닐까요. 이 팍팍한 세상에서 말이에요, 사라.”
사라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고 고개를 끄덕이자 사라 역시 나와 눈을 맞추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어느새 「낙인」은 사라의 품에 꼭 안착해 있었다.
오늘도 완판했습니다. 매니저님.
아니, 그게 아니고 예. 네, 아무튼 완판이요.
책을 보물처럼 안고 있는 사라에게 조건을 덧붙였다.
“그런데 내가 추천한 건 사람들이 몰랐으면 해요.”
“엇, 왜요? 저는 공녀님이 책을 가리지 않고 많이 읽으시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말없이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는 사라를 힐긋 보다가 창을 향해 걸어갔다.
최대한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도록 창밖을 바라보며 애잔하게 말했다.
“아까 말했듯 남자 주인공이 조금, 오빠들이 고생했던 시절이랑 일부분씩 닮아 있어서요. 내가 추천했다는 걸 알면……. 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 봐…….”
“아.”
“난 우리 오빠들을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듯해서…….”
이때다 싶어서 고개까지 숙이자 놀란 사라가 폴짝 뛰며 내게 다가왔다.
그래 놓고는 내게는 손도 못 대고 뒤에서 종종거리며 나를 위로했다.
“말 안 할게요! 제가 읽어 보고 좋아서 들고 왔다고 할게요! 아니, 물론 읽어 볼 거지만! 공녀님 추천받은 거 아니라고 할게요! 정말로요! 아무도 공자님들을 연관시켜서 생각 안 할 거예요!”
아니. 사라. 이 책을 읽은 모두가 베르고의 공자들을 떠올릴 거예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남자 주인공의 인생에 대해 서글퍼하고, 슬퍼하고, 그의 삶에 공감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현실에서 그와 가장 닮은 베르고의 공자들을 떠올리겠죠.
남자 주인공과 오빠들의 공통점은 비루한 과거를 갖고 있음에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간다는 거다.
차이점은, 그는 죽었고 내 오빠들은 살아 있다.
책 속의 남주는 비루한 냉대 속에서 차갑게 죽어 시체조차 발견되지 못했고, 내 오빠들은 멀쩡히, 꿋꿋이 살아 내고 있다.
연민이 연정이 되는 건 순식간이에요.
그때, 밖에서 그레이의 소리가 울렸다.
“너 진짜 미쳤냐!”
얼른 문을 열고 사라와 뛰어 내려가자 카라샤펠 황녀가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고 그레이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화를 내는 중이었다.
빌은, 반지를 꺼낸 채였다.
“……할 말은 많지만! 일단 반지를 받아 줘! 내 마음이니까!”
“미쳤냐고!”
……빌. 차라리 결투 얘기를 꺼내지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