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92)

79화

같은 시각, 티온의 기사들은 넝마가 된 몸뚱이로 숙소에 널브러져 있었다.

씻으러 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다들 땀투성이가 된 채로 가만히 누워 천장만 보는 신세였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오늘 공녀님이 안 오셨으면 밤새도록 뛰었겠지?”

“그랬겠지……. 대장 화난 것 같았으니까.”

“우리 내일도 혼나려나…….”

“아까 공녀님이 용서하라고 하셨으니까 안 그렇겠지.”

“그래도 공녀님이 용서해 주셔서 다행이다.”

“아까 보니까 주먹으로 대장 막 때리시더라…….”

“대장 그냥 맞고만 있더라…….”

“……꼼짝도 못 하나 보더라…….”

“……우리도 이제 그냥 조용히 있자.”

“그래야지, 뭐…….”

다들 조용히 잠들려던 찰나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장은 자기가 전쟁 나가서 고생한 건 생각도 안 하나?”

침상에 앉아 있던 맬다가 땀에 전 웃옷을 벗어 던지며 씩씩거렸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맬다는 더 성을 내기 시작했다.

“내 말이 틀렸어?! 대장이 저렇게 구는 것도, 그 여자가 공작의 진짜 핏줄이라서 어쩔 수 없이 고개 숙이고 있는 거잖아!”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뭘 어쩌겠어. 대장이 그렇다는데.”

항상 맬다의 생각에 동조했던 사일린까지 시큰둥하게 답하며 등을 돌려 버렸다.

맬다는 이마에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침상을 걷어찼다.

“이 자존심도 없는 새끼들아! 너희가 진짜 대장을 위한다면 이딴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그 여자를 몰아내서, 대장이 자기가 고생한 거에 대한 정당한 값을 받을 수 있게 해야 될 거 아냐!”

“맬다! 좀 닥치고 자! 피곤해 죽겠으니까!”

다른 이가 베개를 던지며 욕을 하고, 조쉬까지 쌍욕을 퍼부었다.

“이 개자식아! 어쨌든 공녀님 아니었으면 우린 해 뜰 때까지 기합이었어!”

맬다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조쉬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넌 자존심도 없어, 이 새끼야?!”

“아까 오줌 쌀 때 나 그냥 보내 주시던 공녀님 보고 버렸다. 이 시발 놈아. 왜?”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조쉬의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맬다는 결국 아무 옷이나 챙겨 든 뒤 숙소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

닫히지 않는 문 사이로 동료들이 ‘저 새끼는 문이나 닫고 가지.’, ‘왜 맨날 성질을 못 이겨서 저 지랄이야.’ 등등 떠드는 게 들렸지만 이제 와서 다시 들어가 잘 수는 없었다.

맬다는 분을 삭이기 위해 공작가의 정원을 거닐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걷다가 벤치에 앉아 있으니 조금 차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공녀에게 무리하게 건방지게 군 건 사실이었고, 솔직히 그건 누가 봤더라도 혼날 만했다.

대장이 그걸 보지 않았다 해도, 황녀 앞에서 공녀를 무시했으니까.

그레이 공자가 봤으면 기합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기사단에서 퇴출당했을 거야.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화를 내 봤자 티온을 거스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 됐다. 무슨 의미가 있냐. 돌아가자.”

피곤이 몰려와 무릎을 털며 일어나려던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하녀장인 마르실라였다.

“어머. 티온 도련님 기사단의 기사님 아니십니까.”

“……예.”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 씻지도 못한 채 나와서 그다지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기에 맬다는 대충 대답한 후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마르실라가 가져온 차에서 유난히 좋은 향이 나서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오늘 꽤 고생하셨다고 들었어요.”

“그거야 그렇지만……. 대장이 이유 없이 혼내는 분은 아니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럼요. 도련님은 대단하신 분이잖아요. 모두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당연하죠!”

대장을 칭찬하는 말에 맬다는 강한 어조로 답했다.

마르실라는 고운 얼굴에 주름이 지도록 활짝 웃으며 들고 있는 차를 건넸다.

“피로에 좋은 차예요. 제가 한잔하려고 내렸는데 지금 보니 기사님께 더 필요할 것 같네요.”

거절하기엔 향이 너무 달콤했다. 그리고 왠지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맬다는 저도 모르게 선뜻 받아 들고 차를 마셨다.

뜨거움도 느껴지지 않아 단숨에 벌컥벌컥 찻잔을 비워 버렸다.

마르실라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찻잔을 다시 돌려받았다.

“갈증은 가셨나요?”

“네. 차가 아주 맛있네요.”

“그렇죠?”

마르실라는 공기가 좋으니 편히 쉬었다 가시라며 맬다를 두고 사라졌다.

좋은 밤이었다.

달도 휘영청 밝고, 공기도 선선하고, 찝찝하게 흐르던 땀도 말랐고.

……그런데 내가 여길 왜 나왔더라?

부드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맬다의 얼굴이 차갑게 굳기 시작했다.

아, 그래. 공녀를 패 버리려고 나왔었지.

맬다의 마음속에서 티온은 이미 공작님이었다.

유일한 군주였고, 그 어느 곳에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아야 하는 우두머리였다.

그런데 왜 그딴 힘없는 여자 하나 때문에.

“따지고 보면 오늘 기합받은 것도 다 그 여자 때문이잖아.”

근 열 시간의 기합이 고작 공녀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불처럼 치솟는 분노가 온몸을 태우는 것만 같았다.

공녀가 티온을 말리던 기억마저 맬다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다르게 재구성되었다.

멀쩡한 낯짝으로 마치 불쌍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건방진 눈이라니.

“……부모 잘 만난 게 무슨 대수라고.”

공녀가 사라지면 대장도 기뻐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기뻐할 것이다.

그 여자 입을 막고 다리를 분지른 다음에 저택 밖에다 던져 버려야지.

맞아.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어.

맬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을 쓰면 피가 튀니까 입을 막아서 기절시킨 다음에, 자루에 넣어서 끌고 나가야겠어.

섬뜩하리만치 잔인한 방법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버렸다.

맬다는 망설임 없이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공녀를 보기만 하면.

그 여자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눈에 띄기만 하면 곧바로.

이 시간이면 자고 있겠지.

저택으로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퍽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빼고 근처를 바라보니 셋째인 그레이였다.

‘이 야밤에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맞은편에는 커다란 숄을 두른 황녀까지 앉아 있었다.

‘……설마 두 사람 밀회를 즐기는.’

건가, 라는 문장을 채 끝까지 떠올리기도 전에 그레이가 목검으로 나무 허수아비를 강타했다.

그런데 허수아비가 마치 진검에 베인 것처럼 그대로 힘없이 풀썩 넘어가 버렸다.

‘……저게 무슨.’

들끓던 분노가 하얗게 가라앉았다.

황녀는 시큰둥한 말투로 그레이 공자에게 말했다.

“박살을 내서 터뜨렸어야지. 이리 곱게 베면 쓰나.”

“그게 쉬운 줄 아십니까.”

“누구든 공녀에게 손을 대면 머리통을 터뜨리겠다면서.”

“상하체를 분리시킨 다음에 머리통을 밟아 터뜨리면 되지요.”

“번잡스럽군.”

“아, 알았습니다! 아니, 그런데 진검도 아니고 목검으로 베라 해 놓고서는 이러시깁니까!”

“그럼 진검으로 저 나무를 베 봐.”

황녀는 태연하게 팔짱을 낀 채 아름드리나무를 가리켰다.

“저 정도야 식은 수프 먹기죠.”

그레이가 당당하게 걸어가려는데 황녀가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그레이는 황녀를 짜증 난다는 듯 노려봤다가 목검을 내려놓고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솔레아와 함께 시장에 갔을 때 웬 이상한 할멈이 선물했다며 그레이가 몇 주 내내 자랑한 그 검이었다.

오래된 것치곤 날이 빠진 곳도 없고, 내구도도 좋은 명검이었다.

그레이는 숨을 몰아쉬며 검을 다잡았다.

훔쳐보던 맬다도 괜히 숨을 몰아쉬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레이는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맬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행히 나뭇잎만 날렸을 뿐 나무는 미동도 없었다.

‘역시. 사람이면 그렇게는 못 하지.’

피식 웃은 맬다가 그대로 뒤돌아서 가려던 그때, 까드드득 소리와 함께 반듯하게 잘린 거대한 나무의 기둥이 비스듬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낸 맬다가 냉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레이는 검을 들고 아이처럼 신나 했다.

“아자!”

“검을 꽤 쓰는군.”

“제가 솔레아 건드리는 놈들은 모조리 사지를 잘라 버린다고 했잖습니까.”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강렬한 생의 의지에 맬다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일단 도망가자. 내일 생각하자.

하지만 그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자 다시 결심이 차올랐다.

아니야. 이왕 나온 거 끝내고 가야지. 공녀를 저택 밖으로 끌어내야 돼.

공녀의 방으로 올라가려던 순간 1층의 작은 거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를 휘두르는 소리였다.

이번엔 또 뭐야.

몸을 낮추고 살피니 붉은 머리를 높게 묶은 공녀가 보였다.

이 야밤에 운동을 하는 건가?

잘됐군. 잡아가서…….

붕, 하는 소리가 귀를 가득 메우는 것처럼 강하게 들려왔다.

이제 보니 공녀는 자기 허리까지 오는 길이의 검은색 방망이를 들고 휘두르고 있었다.

‘……철인가? 저 정도로 크고 굵은 걸 잡고 휘두른다고?’

방패병들은 방패의 무게 때문에 항상 따로 체력 단련을 하곤 했다.

그런데 저렇게 거대한 방망이는…….

맬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공녀를 유심히 지켜봤다.

마치 방망이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공녀는 그걸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휘둘렀다.

‘방망이를 휘두를 때 발목과 허리, 어깨를 고루 쓰고 있다……. 저건 하루 이틀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니야.’

때마침 공녀가 소리를 질렀다.

“오늘 쳐 죽일 거 진짜 많네! 피곤해 죽겠는데!”

‘……쳐 죽일 거? ……나?’

맬다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갑자기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끅!”

맬다는 황급하게 두 입을 틀어막고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어라? 누가 있나?”

땡그랑, 땡, 땡그르르랑.

방망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맬다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맬다, 정신 차리자. 넌 훈련을 받은 기사야. 공녀가 철 방망이를 휘두른다고 해서 질 이유가 없다고.

“여기 제대로 막아 놓은 거 맞아?”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는데 공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체내 마력이 일반인의 양을 넘으면 보일 수도 있다고? 에이씨. 진작 말했어야지. 조용히 하고 죽일걸.”

‘……뭐, 뭘 죽여? 뭘 죽였는데요.’

끕!

입을 막는 손의 힘이 조금 약해지자마자 다시 가슴팍이 울렁거리며 딸꾹질이 올라왔다.

공녀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들켰으면 어쩔 수 없지. 기절시킨 다음에 지워 버려야지.”

‘뭘 지운다는 거야? 세상에서 내 존재를……?’

오들오들 떨고 있는 맬다의 바로 근처까지 왔는지 공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기 큰 거 있네!”

들켰구나!

소리를 지르기 일보 직전 다시 한번 붕 소리와 함께 공녀가 방망이로 기둥을 부술 듯이 강하게 내려쳤다.

마치 벌레가 죽는 것 같은 끽! 하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지만 패닉이 온 맬다에겐 들리지 않았다.

“이제 벌레 새끼들 다 잡은 건가? 아직 남았나?”

공녀는 다시 멀어졌다.

‘다음은 나다. 내가 될 거야.’

무릎 밑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맬다는 절절 기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약해 보이는 공녀는, 아니 아가씨, 아니 솔레아 님은 매일 밤 자객을 직접 처리하고 계셨구나.

그것도 저렇게 무거운 철 방망이를 스푼마냥 가볍게 휘두르며.

대장에게 절대 밀리지 않을 사람이다.

아까 대장을 말리며 몇 번이나 주먹을 쓰던데 대장은 괜찮은 건가?

어느새 딸꾹질은 멈춰 있었다.

맬다는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솔레아 님께 대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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