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다행히 칼이 새끼손가락을 자르기 전 솔레아가 티온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하지만 워낙 빨랐고, 티온의 힘이 좋아서 새끼손가락은 이미 반이나 썰려 있었다.
티온의 왼손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뭐야. 왜 이래! 왜 그런 거야! 이 멍청아!”
티온은 여전히 방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자고 해서.”
“그게 그 뜻이 아니잖아! 아니, 그렇다고 쳐도 누가 남의 말에 자기 손가락을 이렇게 선뜻 자르냐고!”
피가 철철 쏟아지는 티온의 왼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솔레아가 티온을 붙잡고 일단 함께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칼을 찾아 옷을 잘라 낸 뒤 그걸로 손가락을 지혈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허겁지겁 땅을 살피는 솔레아의 귓가에 티온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네가 말했으니까…….”
“뭐라고?”
마침내 땅에 박힌 주머니칼을 발견하고 손을 뻗던 솔레아가 행동을 멈췄다.
솔레아의 자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넌 내가 말하면 뭐든 다 할 거야?”
싸늘하게 식은 솔레아의 목소리에 당황한 티온은 눈동자를 데굴 굴리다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응.”
“왜?”
“너는…… 공녀님이니까.”
“뭐라고?”
솔레아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낸 티온이 덜렁거리는 새끼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꾹 붙잡으며 이어 말했다.
“……손가락을 걸자는 게 이런 뜻이 아니었구나. ……미, 미안해. 무서웠지?”
고개를 푹 숙인 티온의 잿빛 머리카락 때문에 솔레아의 시선에선 더 이상 피도, 티온의 부자연스러운 미소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말이 없던 솔레아는 손을 뻗어 티온의 턱을 잡아 올렸다.
솔레아의 두 눈에 분노를 닮은 실망이 가득 들어찼다.
“너, 내가 공녀라서 잘해 준 거야? 우리가 가족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가족……으로 대해 주셔서 공작님과 부인께 항상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너는 차기 공작이고, 사실 내가 명목상으로는 장남이라……. 너한텐 걸림돌일 텐데……. 항상 친절하게 잘, ……대해 주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늘…… 충성하고 있어.”
띄엄띄엄 길게 말한 티온은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열없이 히죽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솔레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굳은 얼굴로 티온을 바라보던 솔레아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썅, 내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중간에 섞인 욕에 깜짝 놀란 티온이 고민하는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냥은 힘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티온의 입매가 다시 다부진 일직선으로 돌아갔다.
그의 입술 사이로 굳건한 음성이 단단하게 흘러나왔다.
“다음 전쟁에서 전사하면 베르고한테도 공이 돌아가니까 그때.”
티온이 배시시 웃었다.
“난 그때 죽을게.”
환한 얼굴에는 어떤 미련도 두려움도 없었다.
솔레아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 솔, 솔레아? 솔레아. 왜 그래? 웃었는데. 나 웃고 있어. 무서워? 피 나서 그래?”
티온이 허둥대며 급히 닦을 것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꾹 다물린 솔레아의 입술 아래 턱에 자글자글 주름이 졌다.
눈물이 쉴 새 없이 줄줄 흐르자 티온이 손을 뻗어 닦아 주려다 손이 피범벅인 걸 확인하곤 얼른 팔꿈치를 내밀어 조심스럽게 솔레아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왜 울어. 솔레아. 미안해. 놀랐지. 미안, 내가 잘 몰라서……. 무섭게 해서 미안.”
“멍청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솔레아가 두 주먹을 쥐고 티온의 드넓은 등짝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왜 죽어! 네가 왜 죽어! 누가 죽으래도 악착같이 살아야지, 왜 죽냐고! 내가 죽으라고 해도 죽지 말아야지! 가족끼리 싸울 때 죽으라고 욕해도 그게 진심이면 안 되는 거잖아! 하지 마! 그러지 말라고! 그런 말 죽어도 안 할 테니까 너도 죽는다는 말 하지 말라고!”
머리며 등이며 어깨를 가리지도 않고 퍽퍽 내려치는 통에 웅크리고 있던 티온은 솔레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뻗어 솔레아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때리지 마. 나 몸이 딱딱해서, ……너 아프잖아.”
“흐어엉. 멍청아.”
그치지도 않고 눈물을 줄줄 흘려보내며 다시 주저앉은 솔레아가 티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죽지 마. 행복했으면 좋겠어. 누가 죽으라고 욕하면 바락바락 대들고, 싸우고, 어떻게든 살아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지 마, 티온.”
“……응. 알았어. 안 그럴게.”
피가 흐르는 손 때문에 신경 쓰였는지 티온은 엉거주춤하게 팔을 내려놓았다.
“공녀 그딴 거 좀 신경 쓰지 말고. 흑, 동생이라며. 내가 너한테 동생이잖아……. 티온, 네가 내 오빠잖아. 오빠가 왜 죽냐고.”
“응, 네가 필요하면 안 죽을게. 끝까지 지켜 줄게.”
“아니야.”
“응?”
솔레아가 울먹임을 꾹 참고 티온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까 티온이 그랬던 것처럼.
“나 지금 네 동생으로 말하는 거야. 공녀로, 네 주군으로 명령하는 게 아니야.”
티온의 입에선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솔레아는 다시 한번 터질 것 같은 옛날의 기억들을 속으로 눌러 버렸다.
“죽으라고 말 안 할 거야. 오빠가, 내 오빠니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어…….”
티온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 아니라 짧은 신음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가만히 솔레아의 말을 되새기던 티온이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솔레아를 향해 고개를 틀고 물었다.
“……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솔레아가 아까 전의 티온처럼 히죽 웃었다.
“가족이잖아.”
혼란스러운 듯 티온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솔레아는 티온의 얼굴을 붙잡고 조금은 슬프게 미소 지었다.
“난 우리 가족은 그랬으면 좋겠어.”
왜인지 솔레아의 얼굴이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티온은 저도 모르게 바닥으로 늘어져 있던 두 손을 뻗어 솔레아를 힘껏 끌어안았다.
“응.”
“내 말 알아들었어? 티온. 오빠. 동생이 하는 말 알아들었냐고.”
귓가에서 울리는 먹먹한 목소리에 티온은 솔레아의 꾹 힘주어 안고서 묵직하게 답했다.
“알았어. 절대 안 죽을게. 죽는다는 말도 안 할게.”
“……진짜지?”
“응.”
티온이 달빛을 받아 환해진 얼굴로 말갛게 활짝 웃었다.
“내 동생.”
솔레아를 안은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티온이 솔레아를 잡고 있는 두 팔에 힘을 주며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의 얼굴에서 만개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내 동생이구나.”
손이 아프지도 않은지 솔레아를 품에서 떨어뜨려 높이 들어 올리곤 얼굴을 요리조리 살핀 뒤 다시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내 동생.”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가득했다.
“우리 막내.”
하필 달도 훤해서 티온의 얼굴이 잘 보였다.
언제나 무표정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티온의 화사하게 웃는 얼굴은 놀라우리만치 다른 사람 같았다.
심지어 흉터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생. 진짜 내 동생.”
티온에게 새끼 강아지마냥 들려서 이리저리 돌려지고 또 안겼다가 하늘로 번쩍 들렸다가 다시 품에 안기길 반복하니 솔레아의 두 뺨이 타오를 듯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저기 이제 그만하고. 티온? 오빠?”
하지만 티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겁지도 않은지 솔레아를 한 팔로 안아 올린 티온은 성큼성큼 연무장을 뛰듯이 걷다가, 솔레아를 내려놓고 얼굴을 붙잡은 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다 또다시 작은 몸을 꼭 껴안고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달빛을 등진 제 동생의 동그란 보라색 눈동자가 저를 내려다봤다.
“이런 기분이구나.”
울어서 그런 건지, 민망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솔레아의 귀와 목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가슴이 울렁이다 못해 터질 것 같아서 티온은 솔레아를 아예 하늘을 향해 휙 던져 버렸다.
“악!”
“내 동생!”
떨어지는 솔레아를 안정감 있게 붙잡은 티온이 또 참지 못하고 그녀를 꼭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워, 어지럽다고!”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티온은 한 팔로 솔레아를 안고 괜히 성큼성큼 또 걸었다.
솔레아는 결국 티온의 잿빛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잡고 쥐어뜯기 시작했다.
울음은 멈춘 지 오래였다.
“이제 그만하라고! 사람 말이 안 들려!”
“하하하! 내 동생!”
“야, 이 씨! 야! 동생이 말하면 들어야지! 내려놓으라고! 이 시키야!”
도통 들어먹질 않아서 주먹을 쥐고 머리랑 어깨를 퍽퍽 치기도 했지만 신난 티온은 높은 담장 벽도 타 넘을 기세였다.
“이런 기분이었어! 그렇구나!”
“귀가 막혔냐고! 야!”
그 이후로도 하늘로 몇 번이나 내던져진 솔레아의 비명 소리와 솔레아를 안고 연무장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티온의 웃음소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시발, 꺼져.”
“동생 자는 거 보고 있을래.”
“꺼지라고!”
기어코 솔레아의 방 안까지 그녀를 안고 옮겨 준 티온은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서도 갈 줄을 몰랐다.
“동화책 읽어 줄까?”
“나이가 몇인데 동화책이야! 꺼져!”
“귀엽다.”
연신 생글거리는 티온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제 그냥 좀 가. 가서 손 치료해.”
“괜찮아. 내버려 두면 붙어.”
그게 무슨 참신한 개소리냐는 듯 솔레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네가 도마뱀이야?”
“괜찮아.”
결국 솔레아는 침대 옆에 있던 베개를 들고 티온을 퍽퍽 쳐 댔다.
“말 좀 들어! 아니, 말 듣지 말라고 한 번 말했더니 왜 갑자기 아예 들어 처먹질 않아! 좀 들으라고! 말 들어! 치료를 해! 하라고! 아이고! 답답해!”
커다란 베개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티온은 방긋방긋 웃었다.
“하나도 안 아파. 그냥 너무 좋아.”
“꺼지라고!”
솔레아가 꽥꽥 소리를 지르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베개 싸움이야. 나도 끼워 주든가.”
언제 가져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솔레아의 잠옷을 입은 황녀가 들어왔다.
티온은 황녀를 향해 돌아서더니 아, 하는 짧은 신음을 뱉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앉아 있던 솔레아를 또 번쩍 들어 올렸다.
마치 새로 산 로봇을 자랑하는 아이 같았다.
“전하! 제 동생입니다!”
들뜬 목소리가 유난히도 밝았다.
큰오빠에게 대롱대롱 들린 솔레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지만 정작 그 큰오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황녀가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기뻐 보이는군.”
“예.”
티온이 또 다시 솔레아를 공중으로 휙 던졌다.
하지만 아까는 연무장이었고, 여긴 실내였다.
물론 보통 저택에 비하면 층고가 높았지만 티온은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쿵! 소리와 함께 천장에 정수리를 박은 솔레아가 악! 소리를 지르며 떨어졌다.
두 팔로 솔레아를 받친 티온이 안절부절못하다 바닥에 앉고는 품 안에 있는 솔레아의 정수리를 매만졌다.
“어, 어떡해……. 미안해. 솔레아. 미안, 내가 들떠서. 미안…….”
더 이상 참지 못한 솔레아가 주먹으로 티온의 정수리를 퍽퍽 내려쳤다.
“그만하라고! 내가, 썅!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시발! 그만하라고 했는데! 말 좀 들으라고! 그만!”
“응. 이제 안 할게. 혹 안 났어?”
주먹으로 맞은 정수리가 아프지도 않은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솔레아를 살피던 티온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 안 아파. 그러니까 이제 좀 가. 피곤해. 자고 싶어.”
“……응.”
시무룩해진 티온이 솔레아를 번쩍 들어 침대에 눕혀 주곤 이불까지 덮어 준 뒤 황녀와 함께 방을 나섰다.
“전하, 안녕히 주무십시오.”
곱게 휜 반달눈 사이로 보이는 적색 눈동자는 더 이상 핏방울처럼 보이지 않았다.
황녀는 흥미롭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웃으니 꽤 미남이네. 앞으론 좀 웃고 다녀.”
“예.”
티온은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을 맞으며 시원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