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92)

77화

솔레아는 정령들에게 두 가지를 명령, 아니 부탁했다.

첫째, 양모를 독점 판매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던 단주들이 동시에 찾아오도록 할 것.

둘째, 소설 「낙인」을 쓴 사람을 찾아 줄 것.

“그거면 돼?”

“정말 그거면 돼?”

“너무 간단해서 조금 놀랐어.”

“응, 왜냐하면 임시 주인 얼굴은 단주들을 동시에 죽일 것 같았는데!”

“응, 소설을 쓴 사람도 찾아 죽일 것 같았는데!”

“맞아.”

가차 없는 평가에 솔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언제까지 이 얼굴 험악하게 생겼다고 그럴 거야. 솔레아가 햇빛을 못 봐서 좀 하얗고 말랐을 뿐이지, 거울 보니까 그렇게 못되게 생기지도 않았던데. 티온이 제일 무섭게 생겼지.”

문밖에서 쿵, 소리가 들렸다.

놀란 정령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솔레아가 냉큼 방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벌컥 열자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어?”

자세히 보니 벽이 아니라 가슴이었다.

더 자세히 보니 티온이었다.

하긴 이 저택에서 가슴이 이 정도로 광활한 사람은 티온뿐이지.

솔레아는 고개를 들어 티온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쩐 일이야?”

하지만 티온은 말없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만 있었다.

“티온 왜 그, 악!”

침울하게 처져 있는 티온의 바로 옆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사, 사, 사람을 죽인 거야?”

“……아니.”

티온은 허리를 숙여 기절해 있는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입을 벌린 채 침까지 줄줄 흘리고 있는 남자는 낮에 솔레아를 위협했던 조쉬였다.

티온은 조쉬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쉬.”

조쉬는 파드득 떨며 눈을 뜸과 동시에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어?”

당황한 솔레아의 얼굴을 본 조쉬는 여기가 어디인지 제대로 분간이 안 가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티온에게 잡혀 몸이 공중에 떠 있는 상태라 팔다리가 맥없이 흔들렸다.

악몽이라도 꾸다가 깬 것처럼 조쉬는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로 연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티온이 다시 조쉬에게 속삭였다.

“조쉬. 사과.”

티온은 그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마치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사냥감을 내팽개치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서 있을 힘도 없는지 조쉬는 복도에 털썩 주저앉더니 숨을 몰아쉬며 솔레아에게 사과했다.

“아가씨, 헉, 흐, 죄, 죄송합니다. 아까는 제가 너무 건방졌어요.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솔레아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티온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솔레아를 향했다.

“……모자라?”

“응?”

얼이 빠져서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은 거였는데 티온은 그걸 ‘응.’이라고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있던 조쉬의 뒷덜미를 다시 붙잡아 올렸다.

“가자, 조쉬.”

“잠, 잠깐, 잠깐만요. 아가씨!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 제발요!”

“조용.”

인상을 찌푸린 티온의 흉터가 일그러졌다.

마치 저승사자에게 끌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쉬는 허망하고 슬픈 얼굴로 눈물을 주륵주륵 흘려 댔다.

천천히 눈을 감는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로 유언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기다려, 티온!”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솔레아가 다급하게 복도로 뛰쳐나갔다.

웬만한 아이 허벅지만 한 팔뚝으로 조쉬를 끌고 가던 티온이 우뚝 멈춰 섰다.

“조쉬, 알았어. 용서해 줄게.”

그제야 티온이 조쉬를 내려놓았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진 조쉬가 얼른 다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진짜,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씨. 너무 감사합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조쉬가 손을 뻗어 솔레아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티온이 조쉬의 손목을 살짝 지르밟았다.

힘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조쉬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손은 대지 말고.”

“……죄송합니다.”

허둥거리며 손을 빼낸 조쉬가 티온과 솔레아의 눈치를 살피다가 주춤주춤 일어섰다.

“조쉬.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가 봐.”

솔레아의 말에도 조쉬는 티온의 눈치를 살피며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티온의 얼굴이 전에 없이 일그러졌다.

부릅뜬 두 눈과 악문 턱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가라고 하잖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 조쉬는 멍하니 놀란 눈으로 티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짝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왜 자꾸 사람을 겁줘!”

솔레아가 티온의 팔뚝을 때렸다.

티온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솔레아를 바라봤다.

“티온. 아니, 큰오빠. 내가 뭐라고 했어? 너 이목구비 때문에 조금만 인상 써도 엄청 무섭게 생겼다고 했잖아.”

티온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응.’ 하고 대답했다.

“조쉬가 물론 잘못했지만! 물론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말리지 않고 히죽거리던 네 기사들 다 잘못했지만!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곤죽이 될 때까지 혼내면 어떡해.”

“……응.”

“전우라며. 같이 전쟁도 나갔다 왔는데 귀하게 여겨야지. 아니, 뭐 물론 나도 사과받았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어, 티온 알아들었어?”

“……조쉬가 잘못한 거고, 내 사병이니까 벌준 건데…….”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트라우마 생길 정도로 괴롭히면 안 돼. 얼마나 무섭겠어. 이거 봐. 조쉬 지금 오줌 싸고 있잖아!”

아, 참은 줄 알았는데.

저도 모르게 힘이 풀렸는지 어느새 조쉬의 바지가 척척하게 젖어 있었다.

조쉬를 돌아본 티온의 흉터가 한 번 더 흉하게 구겨졌다.

“감히, 누구 방 앞에서…….”

짝!

솔레아가 다시 티온의 등짝을 후려쳤다.

“또, 또! 또, 눈 그렇게 뜬다! 사람 겁주지 말라니까! 오빠는 덩치도 크고, 무섭게 생겨서 사람들이 겁먹는다고!”

“……그래도, 얘가…….”

“이거야 그냥 사람 불러서 치우면 되지!”

“네 방 앞이잖, 솔레아?”

솔레아의 두 눈에 투명한 물이 잠깐 일렁였다.

놀란 티온이 손을 뻗으려 하자 솔레아는 움찔 놀라 버렸다.

티온이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티온, 난, 인상 쓰면서 말하는 남자가 너무 무서워. 그래서 난 오빠가 그런 사람이 안 됐으면 좋겠어.”

진심을 담아 또박또박 말하는 솔레아의 말에 티온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굳게 닫혀 있던 티온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이제 웃을게. 그러니까 울지 마.”

티온이 손을 뻗어 솔레아의 머리를 어색한 손길로 툭툭 도닥이다가 살짝 허리를 숙여 솔레아를 살폈다.

“……무서워?”

솔레아는 티온을 살포시 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다정하고 착한 사람인 거 아니까 그렇게 무섭게 하지 마. 알았지?”

솔레아의 머리를 쓰다듬느라 팔을 뻗은 그대로 굳어 버린 티온이 고개만 세차게 끄덕거렸다.

“사람들 겁주면 안 돼. 난 정말로 위압적이게 소리 지르고, 인상 쓰는 남자가 싫어. 무서워.”

티온이 빳빳하게 굳은 목을 겨우 움직여 끄덕거리는 동안 솔레아는 살짝 머리를 움직여 티온의 뒤에 서 있는 조쉬에게 손짓했다.

가.

가라고.

‘가! 좀 가! 가라고!’

겨우 솔레아의 입 모양을 본 조쉬가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크게 몸을 떨더니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곤 도망치듯 사라졌다.

솔레아는 그제야 티온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숨을 참고 있었는지 티온이 긴 숨을 몰아쉬었다.

“조쉬는…….”

“조쉬 내가 보냈어. 왜?”

“아, 매달려 있는 애들 풀어 주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사람을 매달아 놨어?”

놀란 눈으로 솔레아가 올려다보자 티온이 두 손을 짤짤 흔들며 급히 덧붙였다.

“아니야! 웃으면서 매달았어!”

사람을 웃으면서 매달았다고?

솔레아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가만히 보고만 있자 티온이 발을 종종거리다가 조심히 물었다.

“……보러 갈래?”

“사람 매달아 놓은 걸 보러 가자고?”

“……네가 너무 무서워하니까…….”

쿡 찌르면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티온이 시무룩해진 탓에 솔레아는 어쩔 수 없이 티온의 뒤를 따랐다.

티온의 기사들은 한여름처럼 땀을 흘리며 아직도 연무장을 돌고 있었다.

피구에 참여했던 이들은 거대한 나무 기둥 꼭대기에 매달려 있었다.

“멈춰.”

티온의 짧은 명령에 연무장을 돌던 이들이 겨우 멈추고는 흙바닥으로 쓰러졌다.

“내려.”

티온이 나무 기둥을 가리키며 다시 명령하자 물 위로 건져 올린 참치처럼 가쁘게 숨을 쉬던 이들 중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기둥 아래로 갔다.

도르래를 줄줄 돌려서 사람들을 내리자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적거리다가 이내 솔레아를 발견하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진짜, 진짜로 죄송합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사과가 줄줄 이어지는 동안 티온은 솔레아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티온……. 사람을 매달아 놓고 웃으면 어떡해.”

솔레아의 말에 티온의 눈꼬리가 다시 아래로 힝구 내려갔다.

“그래도, 날 위해서 화내 줘서 고마워.”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티온이 눈을 반짝 뜨고 솔레아를 바라봤다.

“그래도 다음엔 이렇게 화내면 안 돼. 다들 너랑 같이 힘든 전쟁을 다녀온 사람들이잖아.”

“응.”

“오늘은 좀 심했어.”

“그래도…….”

“심했어.”

“……응.”

기사들이 아까의 조쉬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솔레아가 티온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손짓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했는지 그들은 눈을 끔뻑이며 티온을 보고 있기만 했다.

“사람들 가서 쉬라고 해도 되겠지?”

“……그래도 아까 다들 안 말렸고…….”

“쉬라고 해도 되겠지?”

“……응.”

“웃으면서 보내 주자. 용서해 주자. 티온 착하고 다정하잖아. 한 번만 봐주자.”

“응.”

티온이 몸을 돌려 부하들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들 가서 쉬어.”

하지만 아까 솔레아에게 보여 준 미소와는 달랐다.

웃고 있지 않는 두 눈의 번뜩이는 붉은 안광은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용서는 오늘뿐이라고.

지친 몸을 겨우 일으킨 기사들은 두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난 사람들이 오빠를 너무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응.”

“진짜지? 손가락 걸어.”

솔레아가 무심코 아까 황녀에게 했던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하자 티온의 두 눈동자가 마구 요동쳤다.

“내가…… 할게.”

“뭘?”

티온이 왼쪽 안주머니에서 작은 주머니칼을 꺼냈다.

“칼을 왜 꺼내?”

“손가락 걸고 약속할게.”

“어, 그런데 칼을 왜 꺼내냐니까?”

“……입으로 하면 조금 징그러워서……. 너 무서운 거 싫어하니까.”

주머니칼을 칼집에서 빼낸 티온은 근처의 커다란 나무로 걸어갔다.

“티온.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입으로 뭘 하겠다는, 악!”

왼손을 쫙 펼쳐 나무에 댄 티온은 약지와 소지 가운데에 칼끝을 꽂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지 쪽으로 칼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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