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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76/192)

76화

넓은 식탁 위에는 세 명분의 식사만 준비돼 있었다.

솔레아는 식당에 서 있는 하녀에게 물었다.

“공작님은?”

“공작님은 업무가 바쁘셔서 집무실에서 식사를 하고 계세요.”

“라트엘이랑?”

“예, 보좌관님도 거기서 함께 밀린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티온이랑 헤이먼은?”

“티온 도련님은 아직 연무장에 계시고, 헤이먼 도련님은 피로하신지 쉬겠다고 하셨어요.”

“아니, 그래도 사람이 밥은 먹어야지.”

솔레아가 둘을 데려오려고 몸을 돌렸지만 금방 황녀에게 잡히고 말았다.

“티온 공자는 너 겁준 놈들 벌주고 있으니 내버려 두고, 헤이먼 공자는……. 내가 와서 긴장했나 보지.”

“전하 언제 궁으로 돌아가실 건데요?”

“섭섭하게 왜 이래.”

솔레아의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친 황녀가 식탁으로 걸어가자 그레이가 실수인 척 황녀에게 발을 걸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솔레아가 어, 하고 소리를 내려던 순간 카라샤펠은 아무렇지 않게 그레이의 발을 폴짝 뛰어넘었다.

“시비를 걸 거면 머리를 써, 공자.”

“제 동생 때리지 마세요.”

“애정의 손길이지.”

“두 번 좋아했다가는 목 치시겠습니다.”

“그러게. 이렇게 된 김에 공자를 두 번 좋아할까 봐.”

“한 번도 좋아하지 마십시오.”

어라, 둘이 친한 게 아닌 건가.

솔레아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그레이 한 명만 있어도 시끄러운데 카라샤펠 황녀까지 더하니 정신이 없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버섯을 먹어, 솔레아. 이거 몸에 좋아.”

“버섯은 됐으니 고기를 먹어, 영애.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지지.”

“고기 다 지방이야. 그건 조금만 먹고 버섯이랑 야채 챙겨 먹어. 버섯이 단백질이야. 내가 책에서 봤어.”

“기력이 없을 땐 고기가 최고야. 입 열어. 내가 먹여 줄 테니.”

“레아. 오빠 말 들어.”

“영애도 다 컸는데 오빠한테 잔소리 듣고 싶진 않지?”

“나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감자도 좀 먹고. 오늘 왜 이렇게 못 먹어. 먹여 줄까? 자, 아 해.”

“먹여 주는 건 내가 할 테니 공자는 나가 있는 게 어때.”

“전하는 이만 환궁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악!”

더 이상 참지 못한 솔레아가 두 사람의 손을 쳐 냈다.

“왜들 이래요, 진짜! 체하겠네!”

“체하면 내가 밤새 등을 두드려줄게. 걱정 말고 입 벌려.”

“전하는 환궁 안 하십니까?”

“뭐 어때. 여자인 친구끼린 잠옷 입고 함께 밤도 보낸다더라고. 난 엄한 집안에서 자라 그런 건 못 해 봤지만.”

솔레아가 황당하다는 듯 황녀를 바라봤다.

그게 집이 엄해서겠어요. 그냥 당신이 황녀라서 그런 거지.

이 와중에 그레이가 끼어들었다.

“등 그거 내가 두드려 줄게.”

“다 큰 오빠가 동생 방에 들어와서 함께 밤을 보내겠다고? 세상에. 피가 안 섞였다고 아주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군.”

황녀가 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말하자 그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그딴 농담 아주 싫어합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요.”

“있으면 큰일이지. 안 그래, 앤?”

시중을 들고 있던 앤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물을 한 바가지 엎지르고는 사라졌다.

솔레아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마를 짚었다.

“전하. 앤은 또 왜 부르셨어요. 정신없어 죽겠네.”

“내가 네 등을 밤새 두드려 주겠다고 할 때부터 목이 시뻘게져서 힐끔거리더라고. 좋아하는 분야가 확고한 친구인 거 같던데.”

솔레아가 앤이 사라진 방향으로 잠깐 눈을 부라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얼른 다시 번쩍 얼굴을 들고 말했다.

“전하! 아니, 랏샤!”

갑작스레 불린 애칭에 황녀가 놀란 눈으로 솔레아를 바라봤다.

“어, 나? 왜?”

“랏샤는 저녁만 드시고 이만 돌아가세요.”

“며칠 있고 싶었는데 하루도 안 재워 주고 돌려보내는 거야? 너무 야박하네.”

“랏샤가 제 옆방에 있으면 신경 쓰여서 못 잘 거 같아요.”

“날 신경 쓰고 있었어?”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말을 하는 도중에 의자가 드르르륵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어라, 하며 돌아보니 그레이가 위기감을 느꼈는지 솔레아가 앉아 있는 의자째로 제 쪽으로 당긴 거였다.

그레이가 조용히 솔레아의 어깨를 뒤에서 감아 안으며 황녀를 노려봤다.

“내가 여동생을 물어 가기라도 하나. 짐승마냥 보기는.”

황녀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도 자고 갈 거야. 친구네 집 놀러 왔는데 그 정도는 하고 돌아가야 나도 보람이 있지.”

“……그럼 진짜로 내일은 돌아가세요.”

“알았어.”

“약속했어요.”

“알았다고.”

“손가락 걸어요.”

솔레아의 어깨에 놓인 그레이의 두 팔이 움찔 떨렸다.

그러고 보니 나이프로 고기를 자르던 황녀의 두 손도 멈춘 상태였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솔레아는 새끼손가락을 내민 상태로 두 사람의 동태를 살폈다.

몇 초 뒤 황녀는 꽤나 비장한 눈으로 솔레아가 내민 새끼손가락을 보다가 시선을 올려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알았어. 내일까지 방을 비우지 않으면…… 내 손가락은 네게 주지. 그거 없다고 업무에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예? 그게 무슨…….”

“됐어. 난 약속은 반드시 지키니까.”

카라샤펠은 꽤 진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담대하군. 황녀에게 손가락을 내놓으라고 하다니.”

뭔가 오해가 생긴 듯했지만 그냥 내버려 둬도 될 것 같아 솔레아는 일단 식사를 재개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식사를 마친 솔레아는 냉큼 방으로 올라가 책을 읽었다.

가독성도 좋고 몰입도도 높아 읽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귓가가 요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재밌다!’

‘나 쪼끔 울었어!’

‘난 쪼끔 많이 울었어!’

‘이거 꼭 아가 불곰 얘기 같아!’

‘남자 주인공 자존감이 낮은 거 보니까 분홍 머리 같은데?’

‘아니야! 슬픈데도 애써 웃는 걸 보면 꼬마 호랑이 얘기 같아.’

‘바보들아. 노예 얘기니까 주눅 든 왕강아지잖아!’

“너희 언제 왔어. 그리고 주눅 든 왕강아지가 누구야?”

‘마법사인 척하는 노예 얘기지.’

아, 돈.

솔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별명이 왜 다 그런 식이야? 아가 불곰, 꼬마 호랑이, 주눅 든 왕강아지.”

‘아가 불곰은 우리보다 한참 어리니까 아가지!’

‘맞아!’

“그럼 꼬마 호랑이는? 그건 누군데. 설마 그레이?”

‘응. 꼬마 호랑이는 몸에 흉터가 많으니까 꼬마 호랑이!’

‘몸이 큰데 항상 축 처져 있으니까 주눅 든 왕강아지!’

자기네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별명이었는지 정령들은 귓가에서 한참 ‘맞아, 맞아.’ 하며 떠들었다.

“……애런 황자가 어떻게 처형된 거야? 난 설마 처형까지 갈 줄은 몰랐어.”

‘어떻게냐고?’

‘공작이 목을 쳤지!’

‘검을 꺼내는 것도 안 보였어!’

‘엄청 빠르게!’

‘휘잉, 하고!’

‘맞아. 휙! 하고!’

“공작님이 애런을 직접 처형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긴 거야? 그게 가능이나 해? 공작가는 무사해?”

잠깐 조용하던 정령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우리는 많은 걸 하진 않았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뱉도록 했어.’

‘응. 그게 다야.’

‘공작이 엄청 크게 화를 냈어!’

‘분노가 눈에 보일 정도로 왕 크게 일렁거렸어!’

‘그래도 참았어!’

‘맞아! 참았어!’

‘황녀가 막았거든!’

‘황녀가 안 막았으면 황제도 죽였을 거야!’

‘황궁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걸 죽였을 거야!’

‘주인 잃은 마력들이 모두 자연으로 돌아갔을 거야!’

‘다행이야, 황녀를 성공적으로 길들여서.’

‘축하해. 임시 주인!’

‘이제 황녀는 네 거야!’

황녀가 제 것이라는 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이었지만 정령들의 말로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음침한 개런이 공작가를 무시하는 말을 했겠지.

그에 화가 난 공작이 애런을 죽이려 했고, 황녀가 막고, 아마 정식으로 재판이 끝난 뒤 공작이 직접 처형을 집행했을 것이다.

생각을 끝낸 솔레아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공작님이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긴 하지만 나 때문에 황자가 죽다니. 난 어쨌든 돌아가야 하는데.”

갑자기 정령들이 뿅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뽀얀 얼굴들이 순식간에 울상이 됐다.

“임시 주인! 돌아가?”

“가지 마!”

“여기 있어!”

손가락과 팔, 어깨, 양 볼로 포르르 날아와 찰싹 달라붙은 정령들이 칭얼대기 시작했다.

마치 이렇게 붙잡고 있으면 솔레아가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 두 눈까지 질끈 감은 채였다.

“가지 마! 임시 주인!”

손바닥만큼 작은 정령들이 볼이 짓눌릴 정도로 꼭 붙잡고 말을 하자 솔레아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렸다.

“가야지. 내 자리도 아니잖아. 그리고 너희들 말처럼 난 임시고.”

정령 중 하나가 울먹거리며 솔레아의 눈앞으로 날아왔다.

“우리 주인 곧 깨어날 것 같아. 그럼 우리가 주인한테 물어볼게. 임시 주인도 우리 주인이니까 여기 있으라고 말할게.”

“뭐?”

솔레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너희 주인이 깨어날 것 같다고? 자고 있다며?”

“응. 그런데 느껴져. 주인이 아주 쪼오끔 움직였어.”

다른 정령들이 엉덩이를 좌우로 둥실둥실 흔들며 대답했다.

“맞아! 우리 주인 일어나면 다 같이 파티하자!”

“그러자!”

“임시 주인의 양모에 마력을 넣어서 모두 따듯하게!”

“통롤러도 많이 만들어야지!”

“여기 영지 사람들 다 튼튼해지라고 행복한 마력 잔뜩 넣어야지!”

들뜬 정령들과는 달리 솔레아의 얼굴은 다소 무거워졌다.

“남의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진짜 주인이 돌아오는구나.”

침울한 솔레아의 말투가 신경 쓰였는지 정령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리 주인도 너를 좋아할 거야.”

“왜? 자기 자리를 뺏은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솔레아의 말이 의아한 듯 정령들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왜 모두가 임시 주인을 미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마력은 없지만, 안이 텅 비었지만 그래도 임시 주인은 따듯한 사람이야.”

“맞아!”

“우리 심심할까 봐 책도 꺼내 주고!”

“주인이 잠든 동안에 우리가 잊히지 않도록 목소리도 들어 주고!”

“무서워하지 않고 웃어 줘!”

“물론 조금 무섭게 생겼지.”

“에이. 많이 무섭게 생겼지.”

“그건 그래.”

“맞아!”

저들끼리 까르르 웃는 모습을 보아 하니 방금 전의 걱정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솔레아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랍 속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아무리 봐도 쾌락 어쩌구 황녀처럼 보이지 않았다.

솔레아는 일기장을 펼쳐 아직 반절이나 넘게 남은 하얀 종이를 보며 그들에게 말했다.

“일단 돌아갈 방법은 있으니까 그날이 오기 전까지 노력할게. 상단들이 까탈만 안 부리면 좋을 텐데.”

“우리가 도와줄까?”

“단주들의 정신을 빼앗아 임시 주인의 말 한마디면 죽을 수도 있는 인형으로 만들어 줄게!”

“응! 우리가 해 줄게!”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 정령들을 보며 솔레아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내 힘으로 할 수 있어. 해낼 거야.”

어라, 이 말…….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생각하던 솔레아는 결국 포기하고는 일기장을 읽으며 키득거리는 정령들에게 말했다.

“단주들을 인형으로 만들 필요는 없는데, 해 줬으면 하는 건 있어.”

“뭔데?”

“뭐야?”

“알려 줘!”

때마침 정원에서 마력으로 조명을 밝혀 솔레아의 얼굴에 비스듬히 그림자가 졌다.

입꼬리를 올려 웃는 솔레아의 얼굴이 악랄하기 그지없어 해맑게 묻던 정령 중 하나는 겁에 질려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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