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92)

75화

책 제목은 「낙인」이었다.

“무슨 내용이에요?”

“에이, 그건 알려 주면 재미없지.”

“에이, 설정만 말해 주세요.”

책을 건네받은 앤의 친구가 곰살맞게 웃으며 물어 오자 사장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남자 주인공이 후작가에 입양되었는데, 양자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후작이 잃어버렸던 친아들을 찾아.”

“그래서요?”

“돌아온 친아들은 제 자리에 다른 소년이 있는 걸 보곤 몰래, 아니 이걸 말해도 되나?”

“괜찮아요! 말해 주세요!”

“후작 몰래 그놈을 노예로 팔아 버려. 소년은 가족들이 자길 버린 거라고 생각하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왼쪽 가슴에 노예의 낙인이 찍히는 그 장면은, 아. 내가 눈물이 나네.”

“세상에나.”

앤이 데려온 손님은 감성이 풍부한 듯했다.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내리까는 걸 보니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사장은 제가 쓴 책도 아닌데 괜히 뿌듯해졌다.

“그러다가 자기를 팔아 치운 게 후작이 아니란 걸 알게 돼. 그래서 희망을 갖고 후작가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떻게든 다시 그 땅을 밟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만큼 고생하면서 모든 고통을 참아 내지.”

“여자 주인공은 누군데요.”

“그 노예의 주인이야.”

“와우.”

“주인이라기보다는, 남자 주인공을 사서 제 옆에 둔 거지. 왜냐하면 죽을 뻔한 위기에서 넝마를 뒤집어쓴 노예가 자길 구했거든. 여자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남자 주인공의 사정을 알게 되고, 사랑에 빠져서 어떻게든 그를 후작가로 돌아가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데…….”

“하는데?”

“그 왜, 친아들이 있댔잖아. 그 빌어먹을 놈이 여자 주인공한테 청혼을 해.”

“아니, 무슨 그런 삼각관계가.”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 때문에 여자 주인공과 자기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도망쳐.”

“아이고, 어쩌면 좋아.”

“그러다가 여자 주인공한테 청혼한 상대가 자기를 팔아 치운 그놈인 걸 알게 되고…….”

이야기에 집중했는지 주름이 질 정도로 망토를 강하게 움켜쥔 손님의 모습을 보자 사장 역시 신이 났다.

맘 같아서는 계속해서 줄거리를 1부터 100까지 떠들면서 손님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 장사꾼이라면 여기서 참는 거지.

사장은 애서가의 욕망을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이다음은 직접 읽어 보렴.”

“……한 줄로 요약하신다면?”

눈을 빛내며 묻는 손님의 질문에 사장은 천천히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았던, 한 남자의……. 아니, 감히 동정조차 할 수 없었던 인간의……. 그, 뭐랄까. 애잔하고, 서글프고, 낙원인 줄 알았던 곳마저 바닥이 무너지고…….”

“굉장히 슬프겠네요. 해피 엔딩인가요?”

사장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혀를 깨물어서라도 그 남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니까.”

어라? 손님이 잠깐 웃은 거 같았다.

사장은 눈을 의심하며 다시 망토 속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정말, ……정말 슬프겠어요. 감정 이입도 잘되겠군요.”

“그럼. 그걸 보고 나면 인류애가 솟아나서 가만있을 수가 없지.”

다른 신파 소설도 몇 권 더 추천받은 망토 아가씨는 앤과 함께 들뜬 발걸음으로 서점을 나섰다.

손님들이 저렇게 새로운 이야기에 설레어 하는 모습을 보면 사장 역시 마음이 조금씩 부풀곤 했다.

“하, 정말 재밌는 책인데. 저 손님이 홍보라도 해 줘서 잘 팔렸으면 좋겠네.”

하지만 누가 이런 후미진 서점까지 와서 옛날 책을 사겠어.

조금은 자조적으로 웃은 사장은 책장 위에 쌓여 있는 먼지들을 털어 냈다.

그리고 그는 딱 석 달 뒤, 서점 건물을 샀다.

저택으로 돌아간 솔레아는 빠르게 제 방으로 올라갔다.

“아가씨, 저녁은 안 드세요?”

“어, 방으로 갖다줘. 이 책들 좀 읽게.”

“흠,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열린 방문 너머에 서 있는 카라샤펠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그녀의 뒤에 그레이까지 서 있었다.

“나도 솔레아랑 저녁 같이 먹고 싶은데.”

두 사람의 강력한 아우라에 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말씀 나누세요.’라는 말을 남긴 뒤 빠르게 사라졌다.

책상에 앉으려던 솔레아는 엉거주춤 선 채로 말을 더듬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왜, 왜 어쩌다 둘이 친해졌어? 설마.”

카라샤펠은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레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생각보다 마음이 잘 통하더군. 그래서…….”

“그래서……?”

책을 쥐고 있는 솔레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차피 1년이 되기 전에 돌아갈 생각이었고, 여기 사람들은 진짜 가족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소중히 대해 준 사람들인데. 저 무시무시한 황녀에게 넘겨도 될까. 그레이는 정말 괜찮은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황녀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무서운 사람인 건 확실했다.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아아. 아, 아. 아, 놀랐잖아요!”

안도의 한숨을 몇 번에 나눠 뱉은 솔레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황녀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그리 안심하는 모습을 보니 서운하네. 그레이 공자, 혹시 아직 마음에 둔 사람이 없다면 나와…….”

“에벨레벨레우와아악. 안 들린다. 으어어억. 못 들었습니다. 전하. 에베베베. 우워어어.”

두 귀를 퍽퍽 때리며 솔레아의 방으로 들어간 그레이는 솔레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책을 빼냈다.

“독서는 나중에 하고, 저녁 먹으러 가자.”

“아니, 둘이 어쩌다 친해진 건데. 아니, 전하. 전하는 왜……. 왜 우리 오빠를……?”

“걱정 마라. 랏샤라 부르라고 허하진 않았다.”

“제가 지금 그 말씀 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그레이에겐 어깨동무를 당하고, 황녀에겐 손목을 붙잡힌 상태로 솔레아는 정찬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어떻게 친해졌냐고 물었지만 둘은 말이 없었다.

몇 시간 전, 정원을 거닐던 랏샤는 혼자 책을 읽고 있는 그레이를 발견했다.

“공작가 사람들은 다들 책을 좋아하나 봐.”

“아, 전하. 이건 재활에 관련된 건데 솔레아가 오래 누워 있어서 여기저기 굳은 근육이 많은지라……. 설마 솔레아의 책을 보셨습니까?”

“어떤 책. 책상 위에 즐비하게 늘어놓은 각종 교양서적과 학문서들? 아니면…… 침대 옆 서랍에 있는 음란 서적?”

그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것만으론 부족했는지 큰 손으로 적갈색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기까지 했다.

“전하. 솔레아가 어릴 때 많이 아파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그, 다양한 호기심이 조금, 과한 것뿐이지. 크게 문제 있는 애는 아닙니다.”

“오, 자네도 읽어 봤나 본데. 책 주인이 공자인가?”

그레이가 저도 모르게 질색하는 눈으로 황녀를 노려봤다.

“……솔레아가 읽어 달라고 해서 낭독을 해 줬을 뿐이지. 제 손으로 그런 걸 사 읽은 적은 없습니다.”

“그럼 빌려 읽은 적은 있고?”

“전하. ……말을 거신 이유가 있으실 거 아닙니까.”

“까칠하긴.”

살짝 웃은 황녀는 다시 차분한 눈으로 그레이를 바라봤다.

멀뚱멀뚱 회색 눈동자를 깜빡이는 젊은 청년에게선 독기라곤 1g도 느껴지지 있지 않았다.

황녀는 다시 장난기 어린 얼굴로 그레이에게 물었다.

“헤이먼 형이 좋아, 솔레아가 좋아?”

“……다섯 살 난 애한테 묻듯이 질문하십니까. 제겐 다 귀한 형제들입니다.”

“공작과 비슷한 답을 하는군.”

안일하게도.

황녀는 아까 하녀가 방으로 가져다줬던 차를 마시지 않았다.

사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는 습관이 있어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그 하녀가 나간 순간부터 그녀의 얼굴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누가 개수작을 부리고 있구나.

들고 있던 찻잔을 입에 갖다 대기 직전에 카라샤펠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손수건에 찻물을 부어 적신 후 창을 열어 내밀자 어둠 속에서 나타난 손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독이냐?”

냄새를 맡은 뒤 살짝 혀를 대 본 소년이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아닙니다.”

“……이상한데.”

“메리에게 가져가 볼까요?”

“마력이란 뜻이냐?”

“독이 아닌데 전하께서 괴이하다 느끼셨다면 마력일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까.”

“메리에게 답을 듣자마자 곧장 돌아와라.”

그리고 산책을 나오기 직전에 황녀는 답을 받았다.

「불길한 마법에 휩싸여 있으나 목숨이 위험한 정도는 아닙니다. 자세한 것은 더 알아봐야 합니다. 날이 밝기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황녀가 쪽지를 확인하자마자 글자들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이내 종이마저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카라샤펠은 창문을 통해 공작저의 너른 정원을 살폈다.

나를 노리는 게 아니다.

나를 통해 솔레아를 쳐 내려는 것이다.

대체 누가, 왜 솔레아를 노리는 거지? 공작가의 공녀일 뿐 아직은 아무런 입지도 없는데.

황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만 있을 뿐이다.

솔레아를 노리는 이가 있다.

황녀는 가만히 머리를 굴리며 손톱 끝을 테이블에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는 솔레아의 곁에 딱 붙어서 모두의 목에 검을 겨누고 의심해야 한다.

망설임 없이 단번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공작은 살아온 날만큼 의심이 두텁겠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엔 부적합하다.

차에 마력이 담겨 있던 걸로 봐선 헤이먼 공자도 완전히 무관하다고 판단할 순 없었다.

티온 공자는 건방진 제 부하의 목도 치지 못하는 심약한 자니 제쳐 두고.

카라샤펠은 그레이를 노렸다.

“그레이 공자.”

“예, 전하.”

“누군가 내게 독이 든 찻잔을 줬어.”

“……누가 솔레아를 노립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황녀가 흥미롭다는 듯 그레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전하가 솔레아를 곁에 두고 싶어 할 만큼 아끼신다는 건 최근에 사교계에 조금이라도 들락거린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을 텐데 굳이 우리 집에 오셨다가 변을 당하셨다면, 꼭 솔레아가 의도하고 전하께 접근한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걸 노리고 차에 독을 탄 거겠죠. 아니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황녀가 갑작스러운 침묵에 고개를 드는 순간 노란 머리카락이 금실처럼 눈앞에 산들거리며 떨어졌다.

그레이가 뽑아 든 칼이 황녀의 앞머리를 살짝 자른 것이었다.

“전하가 베르고를 잘라 내기 위해 꾸미신 일일 수도 있지요.”

황녀는 생글거리며 제 목을 겨누고 있는 그레이의 검을 손가락으로 톡 쳐 냈다.

“확실한 것은 솔레아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조력자가 이 집 안에 있다는 거다.”

“……그걸 제게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황녀는 가만히 그레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보거든.”

랏샤는 태연하게 그레이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사람의 목을 겨누는 데 거리낌이 없군. 전쟁엔 자네가 나갔어도 됐겠어.”

“제겐 저의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레이는 제 검을 만지작거리며 스스로에게 말하듯 되뇌었다.

“솔레아를 지키는 것. 그게 이 저택에서의 제 일입니다.”

카라샤펠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공작이 있는 방을 올려다봤다.

“공작이 들으면 울겠군. 꽤 귀하게 키운 것 같았는데.”

“이게 은혜를 갚는 길입니다.”

“……상대가 누구라도?”

“누구라도.”

그레이의 회색 눈이 고요히 빛났다.

황녀는 흡족하게 웃으며 그레이에게 악수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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