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후원이 싸늘한 공기로 가득 찼다. 티온의 기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가 조쉬를 들고 티온을 따라 나갔다.
싸해진 분위기에 남은 기사들은 황녀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합니다, 전하.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솔레아가 무덤덤한 얼굴로 사과하자 황녀가 태연하게 답했다.
“저자는 앙탈을 꽤 도발적이게 하네.”
솔레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진짜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감히 황녀의 얼굴을 흘겨보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라 솔레아는 주변에 남아 있던 그레이와 기사들의 등을 밀어 냈다.
“오늘 피구 여기까지만 합시다! 다 돌아가요!”
“황녀 전하께서 보고 계신데 이렇게 내보내도 됩니까, 아가씨?”
“솔레아! 야, 그냥 같이 있자. 오늘 오전 운동 이제 겨우 시작인데.”
황녀는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남아 있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얼른 가요! 그레이 너도.”
“그레이 공자는 가족에게 굉장히 다정하군. 흠. 다정한 국서라…….”
느긋하게 뱉는 황녀의 말에 그레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남아 있는 기사들의 등을 퍽퍽 쳐 대며 밀었다.
“가자. 우리 그냥 가자. 가서 우리끼리 훈련합시다.”
“도련님까지 왜 이러세요.”
“남아 있으면 내가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 빨리 가자.”
모두 사라진 후 황녀는 시무룩한 척 어깨를 늘어뜨렸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나를 그다지 반기질 않네. 모두 피하기만 하고. 곁에 남은 건 솔레아뿐이잖아.”
“전들 좋아서 남았겠어요. 청혼받을 가능성이 없으니 남았지.”
“전보다 더 솔직해졌네.”
“솔직한 게 좋다셨잖아요.”
“근데 내게 불가능이란 없어. 영애.”
“아, 진짜! 전하!”
“하하하!”
카라샤펠이 파란 눈을 반쯤 접어 웃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손잡을까?”
“으. 아니요.”
“그리 질색하지 말고. 네 양모 장사에 내가 도움을 좀 주겠다는 말이지. 물리적으로 잡는 것도 뭐, 나쁘진 않지만.”
“아, 그거요?”
뒷말은 싸그리 무시한 채 솔레아가 눈을 빛내며 황녀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도와주실 건데요? 벌써 파티에서 큰 도움을 주셨잖아요. 귀족들이 염색 양모 가격이며, 판매 시기 같은 것들을 다 물어보고 갔거든요. 여러 상단에서 편지도 많이 왔고요.”
“그걸로는 부족하지. 영지 전체를 붕 띄우려면.”
“그럼 어떻게 할까요?”
“글쎄……. 그건 진짜 손이나 잡으면 말해 줄까 싶어.”
“됐어요. 알아서 할게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뭔 농담을 못 하겠네. 나사니엘 영애와 꽤 친한 것 같던데. 맞지?”
시큰둥하던 솔레아의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전하. 저는 전하랑 가능하면 잘 지내고 싶어요. 하지만 제 친구 관계까지 쥐락펴락하시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요. 사라는 그냥 조금 귀엽고 상냥한 아이라고요.”
“내가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나 봐. 아쉽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 귀엽고 상냥한 사라를 좀 이용하라는 거지.”
“사라를요?”
“나사니엘 영애가 책을 꽤 좋아한다더라고. 자주 참석하는 살롱이 있는데 꽤 힘센 귀부인들이 멤버로 있는 곳이야. 네 말대로 어딜 가나 귀엽고 상냥한 사라는 그곳에서도 잘 어울리지.”
“……독서 살롱을 이용하라는 거예요?”
“참고로 다음 달엔 귀여운 사라가 책을 선정할 차례야. 좋은 책이 있으면 좋을 텐데.”
카라샤펠이 넌지시 던진 말에 솔레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차피 제국 전체를 상대로 장사를 하려면 황녀 하나만 잡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물건에는 조금의 흠도 없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은근히 꺼리는 건 그게 베르고의 물품이기 때문인데.
아무리 상단을 앞세우고 장사를 해도 꺼려지는 마음이야 당연히 남아 있겠지.
그 한 톨의 망설임을 누를 만한 다른 감정이 뭐가 있을까.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이미 생각이 단단히 굳어 있어 직접적으로 말해 봤자 불쾌감만 느낄 뿐이야. 은유적으로 다가가.”
황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솔레아가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여긴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거 없나?! 신분 격차! 비극 그런 거!”
“이제 나랑 말도 트려고? 난 좋지만 남들 앞에선 신경 좀 써야 할걸.”
“아니, 전하께 그런 게 아니라요. 저, 저 일단 서점 좀 다녀올게요!”
“그래. 다녀와.”
“전하! 밖은 위험하니까 저택 내에 계세요! 아셨죠? 알았죠?”
“응. 생각해 보고.”
“우리 오빠들 괴롭히지 말고요! 아셨죠?”
“응, 그것도 고민 좀 해 보고.”
“랏샤!”
“알았어.”
솔레아가 헐레벌떡 저택으로 들어가자 혼자 남은 카라샤펠은 느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아까 그자는 어찌 되었지?”
허공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따라온 걸 알고 있으니 대답해.”
그제야 나무 뒤 수풀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온 공자가 데려간 뒤 그자를 포함하여 기사들 모두에게 기합을 주고 있습니다.”
“저런. 마음이 그리 약해서야. 주인을 몰라보고 대드는데 따끔하게 목을 쳐야지.”
“……처리할까요?”
“됐어. 솔레아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만 가 봐. 아, 솔레아가 서점 가는 길에 누가 따라붙진 않는지, 위험하게 하는 이는 없는지 살펴보고.”
“저는 전하를 지킵니다.”
“그래, 내 벗도 겸사겸사 지켜.”
카라샤펠은 돌아오는 답을 듣지 않은 채 저택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오, 그대는 저번에 봤던 그 마법사 아닌가.”
복도를 지나던 돈이 단단한 황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카라샤펠은 반질반질한 돈의 머리를 보다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거 아나? 서대륙 마법사들은 모두 죽었어.”
온몸을 움찔 떨며 놀란 돈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황녀를 향했다.
“그리고 서대륙의 마법사들은 죽기 전까지도 머리를 함부로 숙이지 않았지. 황족들에게도 말이야.”
평이한 목소리로 말한 카라샤펠은 돈의 어깨를 다독이며 더욱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 누가 정말 서대륙에서 왔냐고 물으면, 그냥 노려봐. 그것만으로 충분할 테니. 허리 펴고.”
돈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떨리는 눈으로 황녀를 내려다봤다.
카라샤펠의 푸른 두 눈이 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서대륙 마법사들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지도 않아. 동대륙 생활에 적응했다고 하면 설명이 되겠지만, 너는 설명을 잘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으니.”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던 돈이 황급히 손을 풀었다.
“앞으로 누가 의심하면서 시비 걸면 ‘로 마하탐.’이라고 답해. 따라 해 봐.”
돈이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로 마하탐.”
“잘했어.”
그대로 뒤돌아 가려는 황녀의 뒤에 서서 우물쭈물하던 돈이 조심스럽게 황녀의 옷깃을 잡았다.
휙 돌아본 황녀의 푸른 눈을 마주하는 순간 겁을 집어먹을 뻔했지만 서대륙의 마법사들은 도도하게 굴었다는 말이 생각나 죽을힘을 다해 눈을 마주쳤다.
“저, 무슨 뜻인지…….”
“로 마하탐. 도망자라는 뜻이야. 그런데 그냥 도망이 아니라, 원수를 찾아 죽이기 위해 오래 도망을 다녔다, 뭐 그럴 때 쓰는 말이지. 평소엔 아무도 안 쓰니 이름처럼 써먹진 말고. 누가 물어보면 그 검은 눈 부릅뜨고 대답하라고.”
돈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는 제 옷을 잡고 있던 돈의 손을 매끄럽게 쳐 내곤 긴 복도를 뚜벅뚜벅 걸었다.
준비된 게스트 룸으로 들어가자 꽤 나이가 많은 하녀가 트레이에 차와 쿠키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미천한 자가 제국의 작은 빛을 뵙습니다.”
짧은 인사를 건넨 하녀는 창가의 테이블 위에 간식거리들을 올려놓았다.
“전하. 솔레아 아가씨가 전하께 차를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향이 좋군. 가 봐.”
카라샤펠은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고 게스트 룸을 빠져나가는 하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아좍씨!”
“왁! 깜짝이야. 누구십니까! 아니, 앤 아니냐! 다다음 주까진 휴일이 없어서 못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
꽤 친한 단골인지 서점 사장은 앤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빠져나왔다.
둘은 두 손을 맞잡고 얼씨구절씨구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춰 댔다.
“우리 귀하신 고객님. 오늘은 또 무슨 책을 사 가려고 오셨습니까∼”
“으항항. 오늘도 우리 사장님 추천을 받으려고 왔지요∼”
서점 사장은 허허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빼낸 뒤 앤을 뒤쪽 서고로 이끌었다.
“안 그래도 어마어마한 게 잔뜩 들어왔다. 저거 읽으면 두 눈이 시뻘게져서 아마 다음 날까지도 잠을 못 잘 거야.”
앤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지만 오늘은 그런 책을 사러 온 게 아니었다.
“앤.”
서점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앤은 펄쩍 뛰며 뒤돌았다.
“네! 아니, 어! 지금 찾고 있어!”
“누구야? 친구랑 같이 왔냐?”
“예……. 친구가 베르고에서 제일 다양한 책을 많이 취급하는 서점에 가고 싶대서요.”
“으하하하! 당연하지! 내 가게가 좀 오래되긴 했어도 책 권수로만 따지면 아마 베르고에서 제일 많을 거다!”
큰 소리로 웃은 사장은 앤의 머리를 크고 거친 손으로 휘휘 쓰다듬고는 서점 밖에 서 있는 아가씨를 향해 걸어갔다.
“들어와! 자, 얼른!”
거침없이 손목을 잡아 안으로 이끈 사장은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쓴 여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춥니? 아직 초가을인데. 옷을 두껍게도 입었구나. 모자는 벗어도 돼.”
사장이 손을 뻗어 모자를 벗기려는 순간, 앤이 책장 옆에 쌓여 있던 책을 무너뜨렸다.
“아.이.고.책.이.무.너.졌.네.어.쩌.면.좋.지.”
“으이구, 이놈아. 너 공작가에서도 이렇게 일하면 잘리겠다, 앤.”
사람 좋게 웃으며 앤에게 다가간 사장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책을 한 권씩 다시 쌓아 올렸다.
그러느라 앤이 베이지색 망토를 쓴 여자의 옆에 가서 무어라 속삭이곤 온 사지를 써서 매달리듯 말리는 건 하나도 보지 못했다.
정리를 마친 사장이 허리를 툭툭 치며 일어섰다.
“같이 온 친구는 낯을 많이 가리나 보구나. 보고 싶은 책 종류가 있니?”
안경을 쓴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사랑 이야기요. 차라리 심장을 쥐어뜯고 싶을 만큼 비극적이면 좋겠어요. 다 읽은 다음엔 책을 덮어 버린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슬픈 이야기요.”
사장의 눈이 고요히 빛났다.
“그러니까……. 책을 덮어 버린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서 혼자 도망쳐 버린 무책임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가슴이 저미다 못해 오히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먹먹한 이야기를 찾는구나?”
“네. 바로 그거예요. 신분 격차가 있거나, 한쪽이 사회적 냉대에 시달리는 거면 좋겠어요.”
“딱 맞는 게 있지.”
사장은 맨 위 칸까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는 책장 사이로 들어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몇 분 뒤 사장은 책 더미 사이에서 한 권의 책을 뽑아 들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