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아침 식사를 마친 황녀는 안내받은 방이 아니라 솔레아의 방 앞까지 따라갔다.
“전하, 왜 따라오세요?”
“마음이 가까운 벗과 몸도 가까우려고.”
“아, 말씀 좀 그렇게 하지 마세요!”
“매몰차네. 그럼 하녀들을 오들오들 떨게 만든 티온 공자의 방으로 가 볼까.”
황녀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솔레아의 눈이 커졌다.
아직도 솔레아와 대화할 때 잔뜩 긴장하는 티온인데 황녀는 오죽할까.
“전하! 제 방으로 오세요!”
“왜? 티온 공자가 대공이 되면 국가 안보는 문제가 없을 거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 국가 안보에 그렇게 신경 쓰셨다고요.”
“그럼 둘째로 할까? 난 헤이먼도 괜찮은데. 곱상하니 앙칼지게 잘생겼잖아.”
“제발. 전하. 그냥 제 방으로 오세요.”
“그럴까?”
“오신 김에 친해집시다! 빨리요. 괜히 오빠들 괴롭히지 마시고 제 방으로 오세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라샤펠은 솔레아의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솔레아는 다급히 책상을 정리하려 했지만 카라샤펠이 한발 빨랐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었나?”
“네.”
“왜? 황궁에서 일하려고? 재무 장관이 늙어서 오늘내일하고 있으니 그 빈자리가 좋겠네.”
“그런 게 아니라 저희 영지를 좀 살피려고요.”
“영지를?”
황녀는 모른 척 눈썹을 올리며 솔레아에게 이어 물었다.
“아하. 그래서 일부러 통롤러도 만들어서 팔고, 염색 양모에 자수까지 놓아서 귀족들의 눈을 홀린 거군. 자체 제작 하는 상품이 생기면 영지의 힘이 세질 테니까. 다른 영지들 눈치를 안 봐도 되고?”
“알면서 왜 물으세요.”
“근데 더 빠른 방법이 있는데 왜 그런 수고스러운 일을 해.”
“……뭔데요?”
카라샤펠은 책이 한가득 쌓인 책상에 엉덩이를 기대고 서서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공작을 밖으로 끌어내.”
“……우리 아버지를, 왜요?”
“아무리 양자들이라지만 제국의 공신가인 베르고를 멋대로 씹어 대는 놈들이 왜 생겼겠어. 지금 베르고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그렇지. 특히 젊고 어린 것들은 그 시절을 모르니 더더욱 그럴 테고.”
베르고가 전쟁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고, 제 손으로 새로운 황제를 앉혔던 시절은 수십여 년 전이었다.
멋모르는 어린것들은 베르고가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인 줄 알겠지.
카라샤펠은 싱긋 웃었다.
금황은 나약하나 베르고와 척을 지지 않을 만큼은 영리했다.
하지만 베르고를 제 손에 넣을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진 못했고.
카라샤펠의 생각이 끊긴 건 솔레아가 웃옷을 벗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란 카라샤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을 밖으로 끌어내라고 했더니 옷을 벗네.”
“우리 아버지는 영주민들 살피는 게 더 좋으시대요. 그리고 저 오전 운동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황녀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나?”
“아예 홀딱 벗은 것도 아니고 겉옷만 갈아입는 건데 왜 그러세요. 바지는 안 벗었잖아요.”
“이제 아예 예의는 안 차리기로 결심한 거야?”
“네. 예의 차리면 재무 장관 시킨다고 하실까 봐요.”
“하, 참.”
헛웃음을 지은 황녀는 방 안을 둘러보며 솔레아에게 물었다.
“무슨 운동을 하는데?”
“그레이랑 같이 뛰고, 근력 운동을 상하체 나눠서 하고, 스트레칭하고 그래요.
“그럼 나도 옷 하나 줘. 같이하게.”
“……전하도 하시게요?”
“같이 있는 게 싫으면 공작에게 가지, 뭐. 난 공작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대공이라……. 강제적으로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
“무슨!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진짜 뭔 말도 안 되는! 옷 아무거나 고르세요! 세상에! 아니, 친구 되자고 하셨잖아요! 친구가 아니라 새어머니가 되고 싶으신 거였냐고요! 아, 너무 싫어! 진짜!”
정말 싫었는지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인 솔레아는 옷장 안에서 온갖 옷들을 꺼내 책상 위로 내던졌다.
“아무거나 골라 입으세요!”
“안타깝게도 황족은 제 손으로 옷을 갈아입지 않아.”
“하녀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럼 하녀가 오기 전까지 이 책이나 읽을까. 뻔히 침대 옆에 놓여 있는데 자극적인 제목이라 눈길이 가네.”
카라샤펠이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집어 들고 조용히 읊조렸다.
“‘황녀, 쾌락에 길들여지다? 작가 렘샤 부인.’ ……너 꽤 대담한 걸 읽는구나.”
“악!”
깜짝 놀란 솔레아가 황녀에게 달려들어 책을 뺏어 들곤 책상 옆 서랍을 열어 그 속으로 책을 집어 던졌다.
쿵 소리와 함께 서랍이 닫히고 솔레아는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작게 중얼댔다.
“……썅, 제목에 일관성도 없어.”
전날 디에르고 공작이 돌아오길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일기장과 한바탕 씨름하고서 서랍 안에 넣어 두는 걸 깜빡한 탓이었다.
솔레아는 통한의 한숨을 흘리며 카라샤펠 황녀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운동하실 거면 옷 갈아입으시고, 옆에 그냥 계실 거면 그대로 오세요.”
카라샤펠은 더 이상 책에 대해 묻지 않고 당당하게 두 팔을 벌렸고, 솔레아는 이를 악문 채 황녀의 옷을 갈아입혔다.
“팔다리는 쭉쭉 뻗었는데 체구가 이리 작다니. 마음이 아프네. 솔레아.”
“더 큰 옷을 드릴까요?”
“누구 것으로 줄 건데?”
“……그냥 좀 끼게 입으세요.”
황녀는 계단을 내려가 후원으로 걸어가는 동안 꽤 진지한 얼굴로 솔레아에게 물었다.
“혹시 나를 길들이고 싶었어?”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귀를 퍽퍽 때리며 솔레아는 빠르게 앞서 걸었다.
“황족보다 앞서 걷다니 어쩜 저리 불충할까. 알았어, 솔레아. 길들여지는 거에 대해 생각해 볼게. 일단 일정부터 맞춰 보자.”
“맞추긴 뭘 맞추시겠단 거예요!”
아웅다웅 다투며 후원으로 들어서자 그레이가 둘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천한 자가 제국의 작은 빛을 뵙습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렇게 인사를 할 건가요, 공자? 너무 속상하네요. 동생 친구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해.”
하나도 안 편한데.
그레이는 솔레아를 힐긋 바라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황녀를 왜 데려왔냐는 뜻이었다.
솔레아는 카라샤펠의 뒤에서 온 얼굴을 찌푸리며 울상을 지었다.
대충 어쩔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남매가 우애가 정말 좋네. 황녀를 사이에 둔 채 둘이 다투고 말이야.”
“……솔레아와 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저쪽에 앉아 계시겠습니까?”
“나도 운동을 좀 하려고. 매일 통롤러로 몸을 풀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 것 같아서.”
생글거리는 황녀의 눈치를 살피며 그레이는 불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오늘의 운동 일정을 알려 줬다.
“스트레칭을 한 후에 후원을 다섯 바퀴 달리고, 한 시간 동안 맨몸 운동을 할 겁니다.”
“그래? 별다를 게 없네.”
그레이의 짙은 눈썹이 움찔 떨렸다.
“……피구를 아십니까, 전하?”
“피구?”
“아. 피구는 상하 관계 없이 완전히 평등해야 가능하니까 힘들겠군요.”
그레이가 일부러 입술을 쭉 늘어뜨리며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라샤펠이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었다.
“장단 좀 맞춰 달라는 것 같으니 들어주지. 그래, 피구인지 뭔지 해 봐.”
그레이는 냉큼 기사들을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솔레아는 저도 모르게 황녀의 두 어깨를 잡고 짤짤 털며 물었다.
“전하! 피구를 하시게요? 공 던지는 게임인데요. 남이 던진 공에 맞는 거라고요.”
“재밌겠네. 여태 내게 말조차 함부로 던진 이가 없었으니까. 내 인생 처음으로 받는 냉대겠어.”
이윽고 그레이가 신난 표정으로 기사들을 데려왔다.
누가 봐도 억지로 따라온 듯 기사들은 죽을상이었다.
“……아, 도련님. 황녀 전하한테 어떻게 공을 던집니까.”
“벌써 반역이야.”
“……아버지, 저 곧 가요. 이따 만나요.”
하지만 들뜬 표정의 기사들도 있었다.
티온과 함께 전쟁에서 돌아온 기사들이었다.
“황녀 전하를 이리 가까이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저희는 물란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겨 제국을 지켜 냈습니다!”
갑작스러운 팬 미팅에도 황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그들을 응대했다.
“그래, 물란시아는 어린 마물들을 납치해 길들인 다음에 전쟁 무기로 쓴다지. 고생이 많았습니다.”
황녀의 한마디에 기사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반색했다.
잠시 후 황녀에게 룰을 설명하고 카라샤펠 팀과 솔레아 팀으로 인원을 나눴다.
전쟁을 치르고 온 기사들은 모두 카라샤펠의 팀이 되길 원하는 듯 대놓고 황녀의 뒤편에 서 있었다.
솔레아는 이전에 피구를 몇 번 같이한 적이 있는 익숙하고 친한 기사들을 골랐고, 카라샤펠은 제게 우호적인 기사들을 골랐다.
그레이는 심판을 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게임 시작 전, 솔레아는 황녀에게 확답을 받았다.
“황궁으로 돌아가신 뒤에 그 어떤 보복도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어딘가에서 전하의 개인 호위 기사들이 보고 있다가 저희를 죽이는 건 아니죠?”
“아마 아닐 거야. 걱정하지 마.”
“공에 맞았다고 던진 사람을 죽이셔도 안 돼요. 게임은 게임일 뿐입니다.”
“알았다니까. 사람을 뭘로 보고.”
게임이 시작됐다.
첫 판은 기사들이 대놓고 서로를 겨냥해 공을 던졌다.
힘은 비등비등했지만 피구를 좀 더 많이 해 본 저택 내의 기사들이 패스를 더 매끄럽게 했고, 팀워크가 좋아 금세 앞서 나갔다.
카라샤펠 팀엔 이제 황녀와 기사 둘만 남았다.
“꽤 기대했는데 아무도 내게 공을 던지질 않네.”
카라샤펠이 일부러 실망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공을 들고 있던 솔레아 팀의 기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풀썩 무릎을 꿇고 고했다.
“……황녀 전하. 미천한 자가 제국의 작은 빛을…… 작은 빛을 공격하려 합니다.”
“맘대로 해. 작은 빛 정도야 뭐, 꺼져도 상관없지.”
무슨 그런 불경한 말씀을 지 입으로 하세요.
그레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황녀를 봤지만 카라샤펠은 당당했다.
기사는 있는 힘껏 공을 던졌지만 너무 정직하게 던진 탓에 공은 정확히 황녀의 몸 정가운데로 날아갔다.
카라샤펠은 몸을 낮추고 마치 몇 번이나 공놀이를 했던 사람마냥 능숙하게 공을 받아 냈다.
그러곤 순식간에 공을 던져 솔레아의 무릎을 맞혔다.
“간단하네.”
너무 빠르게 공격을 당해서 그런지 잠깐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던 솔레아는 비소를 머금으며 수비 라인의 가운데로 가 섰다.
“……우리 저택 팀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자! 삼각형 수비!”
“우워어어어!”
솔레아를 잃고 주춤했던 저택 팀은 다시 투지를 불태우며 정신없이 공을 던졌다.
수비 라인과 공격권 안에 있는 이들이 빠르게 공을 주고받는 탓에 황녀 팀 내부의 기사들은 공을 피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 몇 바퀴씩 공을 돌리던 중, 솔레아가 공을 받자마자 제 앞에 있던 기사의 발을 맞혔다.
그레이가 호루라기를 불며 ‘조쉬 아웃!’이라고 외쳤지만 그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벌게진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조쉬, 아웃이라니까?”
“땅에 튕겼습니다.”
조쉬가 위협적으로 솔레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공을 제대로 던지셔야죠. 땅에 닿고 튕겼다니까.”
조쉬는 솔레아를 내리깔아 보며 이죽거렸고, 그의 곁으로 다가온 다른 기사들은 말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저택 내의 기사가 솔레아의 앞을 막아섰고, 그레이가 달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공이 날아와 조쉬의 머리를 맞혔다.
퍽이 아니라 펑 소리가 나며 공이 터지고, 조쉬는 그대로 기절했다.
후원 입구에 서 있던 티온은 흉터가 일그러질 정도로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