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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192)

72화

궁을 나서려던 공작의 마차를 황궁의 기사들이 막아 세웠다.

“멈추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고 겁먹은 기색을 애써 감춘 기사가 입술에 힘을 주며 말했다.

“디에르고 폰 베르고 공작에게 황녀 전하의 손에 자상을 입힌 죄를 물을 것입니다.”

“됐다. 보내 드려라.”

마차 뒤에서 들려온 카라샤펠 황녀의 목소리에 기사는 벙찐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 허리를 깊이 숙였다.

“허나 황녀 전하. 전하의 손에 깊은 자상이…….”

“아무 일도 없었다.”

황녀는 제 깨끗한 손을 기사에게 내보이며 다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도 기사가 물러나지 않자 황녀는 기사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네놈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서 온 게 아니지?”

“……예?”

“죽은 죄인의 친모인 퀴렐 황비 전하가 보낸 게 아니냐. 윗사람의 명령을 따를 뿐이라곤 하지만, 베르고 공작을 잡아 둔 이후에 이 황궁이 어찌 될지 생각은 하고 움직이는 거냐.”

“……조, 존귀하신 황족의 손에 피를 낸 자를 그냥 보낼 순 없습니다.”

“황제 폐하도 아시는 일이냐.”

기사들이 대답하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끼익, 소리와 함께 마차에서 공작이 내렸다.

“됐습니다. 이번엔 내가 감옥에 들어가겠군요.”

“이대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황녀 전하께 빚을 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모두 물러가라. 베르고 공과 독대하겠다.”

황녀의 명에도 기사들이 물러가지 않자 그녀 뒤에 서 있던 개인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다른 기사들을 위협했다.

“제1 황녀 전하의 명이다. 따라라.”

모두 멀찍이 떨어진 후 둘만 남게 되자 공작은 조금은 지친 눈으로 황녀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손을 깔끔하게 치료하셨군요.”

“예, 그런데 조금 늦은 탓에 세 번째 손가락부터는 감각이 없습니다.”

“그럼 저를 벌하셔야지요. 이번 일을 빌미로 우리 집안을 괴롭히실 게 아니라면.”

황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주변을 둘러봤다.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땅과 하얗게 빛나는 황궁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카라샤펠은 고개를 돌려 다시 공작을 바라봤다.

“나는 이런 집에서 태어난 탓에 제 자식 귀한 줄 모르는 아비를 가졌습니다.”

“딱히 동정을 원하지도 않으시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가면서 얘기하실까요?”

“어디를…….”

디에르고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황녀는 당당하게 걸어가 공작의 마차에 올라탔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시녀들이 당황한 눈빛으로 황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태연했다.

“정말로 공작에게 나를 시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나는 며칠 뒤 시체가 되어 돌아오겠지. 내 직접 공작의 무죄를 입증하겠다. 공작, 타시죠.”

“전하! 어찌 부리는 이 하나 없이 가십니까!”

시녀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카라샤펠은 막무가내였다.

“내가 아무도 안 데리고 가야 공작이 마음 놓고 나를 시해할 것 아닌가. 정말로 내 심장을 뚫을 것이라면 말이야.”

황녀의 기행을 시녀들마저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로빈, 메리. 따라오지 마. 기사들 역시. 사람을 붙이지도 말고.”

디에르고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마차 문을 잡고 말했다.

“전하와 마주 앉아 가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정 제 집에 오시고 싶으시면 다른 마차를 타십시오.”

“베르고 공. 나는 그저 공을 집에 보내 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진지한 황녀의 목소리엔 어떤 꾸밈도 없었다.

디에르고는 다소 짜증 섞인 눈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적당히 하십시오. 저는 남은 날을 조용히 살고 싶으니.”

카라샤펠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씩 웃더니 마부와 통하는 작은 창을 똑똑 두드렸다.

“출발하지. 내가 배가 고파서.”

황위 후계자를 태운 마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공작가의 요리사가 실력이 아주 출중하다 들었는데요.”

“황궁만 하겠습니까.”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온 가족을 모욕한 자를 깔끔하게 보내 줬으면서.”

“전하가 꾸미신 일입니까?”

“내가?”

카라샤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디에르고를 바라봤다.

“제정신이 박혀 있으면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안 했겠죠. 정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는데 황녀 전하를 밀어드리는 꼴이 됐지 않습니까.”

“글쎄. 평소에도 덜떨어진 놈이었으니 갑자기 미쳐서 그랬을 수도 있지요.”

“애런 황자의 죽음으로 득을 보는 자가 있다면 황녀 전하뿐이십니다.”

“작위를 박탈했는데도 황자라 불러 주다니. 듣던 대로 다정하십니다.”

황녀는 생글거리며 디에르고를 바라봤다.

공작은 연일 밤을 새운 탓에 피로한지 눈가를 문지르며 긴 숨을 내뱉었다.

“됐습니다. 저희 집에서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마음껏 가져가십시오. 베르고의 이름이 필요하시다면 그리하시고요.”

“그대의 딸은?”

멈칫한 디에르고의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자안이 번뜩였다.

마차 안이 순식간에 숨 막히는 공기로 가득 채워졌다.

황녀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공작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농도 짙은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공이 베르고의 안전을 위해 업무를 살피는 동안, 그대가 직접 거둬 키운 자식들은 은근한 무시를 받고 있었답니다. 걱정을 끼쳐 드리기 싫다고 공자들이 모두 적당한 선에서 숨긴 것 같긴 하지만요.”

디에르고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황녀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군대를 강하게 키우고, 영지 내에 굶는 이가 아무도 없어도 고깝게 보는 이는 있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 덕에 황자의 목을 직접 치고도 이리 무사한 거지만.”

“뭘 원하십니까.”

“그대의 베르고가 아니라, 솔레아의 베르고를 원한다.”

“작위는 가장 알맞은 아이에게 줄 것입니다.”

“그게 솔레아가 되겠지. 내 눈은 틀리지 않아.”

“솔레아를 아끼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아직 심약하고, 이제 겨우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아이입니다. 헛된 말로 등을 떠밀지 마십시오.”

“세상 밖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폭풍이 몰아치는데 다시 아이를 가둬 키울 건가? 새장 속에서?”

“……상처가 크다면 그리하겠지요. 더러운 꼴을 보게 하며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저런.”

카라샤펠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차마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 심약한 영애가 하고 있지 않습니까.”

공작은 아무 말이 없었다. 카라샤펠은 그림처럼 앉아 있는 디에르고의 핏줄 돋은 손을 보며 말했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꽤나 깔끔합니다, 공.”

마차는 조용히 공작저로 달려갔다.

카라샤펠은 하인이 문을 열자마자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억, 황, 황……!”

“그래. 황녀 전하다. 공작저는 밝은 낮에 보니 더욱 아름답군.”

놀란 하인이 말을 더듬으며 카라샤펠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다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달려. 달려서 내가 왔다고 알려.”

“예!”

하인이 재빠르게 저택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디에르고가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베르고 공. 나와 피가 섞인 동생을 죽이고 돌아왔어도 에스코트는 해 주셔야죠. 내가 홀로 걸어 본 적이 없어서.”

고개를 돌린 디에르고가 성가시다는 듯 황녀를 바라보곤 팔을 내밀었다.

“피가 섞인 동생을 죽인 자에게 참 속 좋은 소리를 하십니다.”

“공의 말대로 내 정적을 죽여 줬으니 내게는 은인인데 뭘 그럽니까.”

카라샤펠은 생글거리며 공작에게 살짝 팔짱을 낀 후 나란히 공작저로 걸었다.

“어린 시절 제 얼굴 기억나시죠? 눈이 마주쳤을 때 참 선하게 웃어 주셨잖아요. 물론 그땐 전쟁에서 사람을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고 돌아온 후라는 걸 몰랐지만요.”

“아이들이 듣습니다.”

“누가 보면 아이들이 세 살 난 어린애인 줄 알겠습니다.”

“……그래도 가족을 죽였는데 제가 원망스럽진 않으십니까? 인간적으로 말입니다.”

황녀는 정면을 보며 표정의 변화 없이 느긋하게 답했다.

“내가 그리 인간적인 환경에서 자라진 못해서.”

놀란 얼굴로 뛰쳐나온 솔레아와 세 형제를 본 카라샤펠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인간적이고 가족적인 베르고 공작가에서 좀 쉬다 가겠습니다. 레아∼ 나 왔어!”

“공, 아빠!”

멀쩡하게 돌아온 디에르고를 본 솔레아는 신발이 벗겨진 것도 모른 채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옆에 선 황녀는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솔레아를 품에 안은 디에르고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우리 공딸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밥은 챙겨 먹었고?”

“아빠는요, 잠을 아예 못 주무신 거예요? 괜찮으세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침에 애런이 처형당했다는 얘긴 들었는데. 아버지는요. 아빠는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었어. 말했잖니. 괜찮을 거라고.”

티온과 헤이먼, 그레이도 안심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와 디에르고 앞에 섰다.

“내게 인사를 해야지.”

“……전하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영 띠꺼운 표정으로 묻는 그레이를 향해 황녀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한 번만 더 건방지게 말하면 네놈에게 청혼해서 집을 발칵 뒤집어 주마.”

“전하!”

디에르고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황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그레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디에르고의 뒤로 주춤거리며 숨었다.

“황족의 청혼을 받으면 다른 황족이 청혼할 때까지 거절도 못 하는데. 하하하! 세 아들에게 번갈아 청혼해서 베르고의 대를 끊어 주겠다!”

황녀는 마치 제집처럼 저택으로 들어갔다.

“솔레아의 방이 어디지. 나는 그 옆방을 쓰면 좋겠는데. 물론 같은 방을 써도 좋다.”

“미천한 자가 제, 제국의 작은 빛을 뵙습니다.”

“일단 아침 식사를 먼저 준비해라. 허기가 지는군. 그동안 잠깐 쉬어야겠는데. 며칠 머무를 거니 하녀도 몇 명 붙여 주고.”

하인들에게 명령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솔레아와 오빠들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공작을 바라봤다.

“화, 황녀 전하를 왜…….”

‘왜 데려오셨어요?’라는 말은 너무 놀란 탓에 꺼내지도 못했다.

공작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저래 봬도 베르고에 도움을 주고 계시니 친절히 모셔라. ……청혼받지 않게 조심하고.”

황녀를 마치 역병처럼 설명한 공작은 아이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전쟁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미, 미, 미천한 자가…….”

“응, 제국의 작은 빛을 코앞에서 뵈니 떨리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물을 따르는 데도 이리 떨면 어쩌지.”

카라샤펠의 빈 잔에 물을 따르던 하녀가 오들오들 떨다가 황녀의 드레스에 물을 튀기고 말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사람 쉽게 안 죽여요. 공작이라면 모를까.”

“전하!”

아침을 먹던 공작이 카라샤펠을 찌릿 노려보자 황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드레스에 튄 물을 대충 탈탈 털었다.

“왕년에 꽤 화려하게 살았다, 그 말이지. 티온 공자도 전쟁을 끝내고 막 돌아오지 않았나. 그런데 왜 티온 공자에겐 다들 멀쩡히 대하면서…….”

말을 하면서 살펴보니 티온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호달달 떨고 있었다.

“아니네. 티온 공자는 얼굴 표정을 좀 선하게 바꿀 필요가 있겠어.”

카라샤펠에게 한 소리 들은 쁘띠 아가 불곰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인사를 바꿔야겠어. 자꾸 미천한 자라고 하니까 더 떠는 거 같잖아. 이 집에서라도 ‘멀쩡한 자가 제국의 대충 그냥 빛을 뵙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건 어떨까?”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집은 아무도 농담을 할 줄 모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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