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92)

71화

“애런!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황제의 노기 띤 음성에도 애런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알현실에 서 있던 시종과 호위 기사들마저 당황한 눈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진짜입니다. 공작도 봤을 텐데요! 제가 그 공자들에게 천박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히끅! 당연한 거 아닙니까!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것들이! 히끅! 얼굴 좀 반반하게 생겼다고 공작가에 들어와서 으스대는, 끅! 꼴이라니!”

“전하!”

진노한 베르고 공작의 천둥 같은 괴성이 알현실을 뒤흔들었다.

금방이라도 애런의 목을 썰어 버릴 것 같았다.

“내가 틀린 말 했습니까! 뭐, 공작 부인도 알 만하지. 하고많은 버려진 애새끼들 중에 잘생긴 것들만 주워 왔으니. 예쁘고 좋은 것들만 데려다 놓은 그 알량한 봉사 정신이란 게 상스럽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아쉽게 됐습니다. 히끅! 남자들 우르르 데려다 놓고 하렘이라도 만들고 싶으셨나 본데 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베르고 공작은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다만 성큼성큼 걸어가 검을 꺼내 들 뿐이었다. 아이들을 모욕한 것도 모자라 죽은 아내까지 들먹인 놈을 살려 둘 수 없었다.

“베르고 공작! 기다리게!”

감히 황제의 앞에서 검을 빼 든 탓에 알현실에 있는 모든 기사들 역시 검을 뽑아 공작을 겨눴다.

“폐하께서 저를 반역죄로 처형하셔도 저는 제 아내와 아이들을 욕한 자를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핏대가 서 있던 몇 분 전과는 달리 공작의 얼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검 역시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오직 애런만을 향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가만히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며 공작과 대치했다.

그런 와중에도 애런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솔레아 그년도 야박하지. 내가 지한테 관심 있는 걸 뻔히 알면서. 황비가 되면 지한테도 좋은 일이지. 안 그렇습니까. 폐하.”

어느새 딸꾹질을 멈춘 애런이 말끔하게 말을 뱉어 냈다.

“애런의 입을 막아라! 어서!”

황제의 명령에 시종이 애런 황자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애런은 그를 뿌리치곤 손을 힘껏 깨물었다.

“아악!”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폐하. 폐하도 베르고는 상대하지 말라 하셨잖습니까? 예? ……왜 자꾸 솔직한 말이 나오는 거지? 아무튼 진심입니다!”

공작의 가라앉은 자안이 황제를 향했다.

황제는 목을 죄어 오는 살의를 선명하게 느끼며 저도 모르게 목을 어루만졌다.

“베르고 공. 오해가 있는 것 같네. 내가 애런에게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폐하께서 베르고는 건들지 말라 하셨잖아요. 근데 뭐, 하긴. 그럴 만도 하십니다. 떨거지들을 모아 놓은 땅이니. 억!”

황제의 말을 끊은 애런은 건들거리며 줄줄 말을 뱉어 내다 디에르고의 발에 걷어차여 기절해 버렸다.

애런의 가슴팍을 발로 찬 디에르고는 쓰러진 그의 목 위에 검을 똑바로 겨눈 채 황제를 응시했다.

“그리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공작. 그게 아니라 베르고 공작가는 심지가 곧은 이들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거였어. 이봐. 검을 치우게. 이러다 내 아이가 죽겠어.”

“제국의 위대한 빛은 발아래에만 비추는군요.”

공작은 무심한 말투로 말한 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찍었다.

그러나 애런의 목을 꿰뚫기 전, 다른 이의 손이 먼저 끼어들었다.

“꺄악! 황녀 전하!”

뒤늦게 달려온 시녀의 비명 소리가 찢어질 듯 울려 퍼졌다.

알현실의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온 카라샤펠은 공작의 검이 향하는 방향 아래에 선뜻 손을 가져다 댔고, 그녀의 손은 공작의 검에 곧바로 꿰뚫렸다.

공작은 고요한 눈으로 끼어든 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황녀는 공작의 검이 제 손을 관통했음에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공작. 내 반드시 이놈을 처형하겠습니다. 허나 지금 공작의 손으로 죽이면 이는 반역입니다. 돌아갈 집이 있으니 이만하시지요.”

“가족을 모욕한 자를 두고 돌아갈 곳은 없습니다.”

“허면 황궁에 머무시지요. 제 궁에 마침 빈방이 많습니다. 처형을 기다리시면 될 일 아닙니까.”

공작이 말없이 황녀를 바라보는 동안 아연실색한 황제가 카라샤펠에게 소리쳤다.

“랏샤! 뭐 하는 짓이냐! 제멋대로 끼어든 걸로도 모자라 네 입으로 동생을 처형하겠다니!”

“이젠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셔야 할 때입니다. 제국의 안녕을 위하여.”

카라샤펠의 푸른 눈이 황제를 올려다봤다.

황제는 마른침을 삼키며 기절한 애런과 공작, 카라샤펠을 번갈아 바라봤다.

알현실 안에 시종들과 수많은 기사들이 있으니 오늘 일을 비밀에 부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지금 처형을 약속하지 않으면 공작은 황녀의 손을 꿰뚫은 걸로도 모자라 더 깊숙이 검을 내리꽂아 기어코 애런의 목숨을 끊을 작정인 듯했다. 설령 이 자리에서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자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강성한 제르노아를 위해 베르고의 선선대 공작에서부터 전쟁터를 돌며 몇 번이나 공을 세웠던가.

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이면 그다음은?

베르고의 장자, 티온이 며칠 전 전쟁에서 승리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베르고의 군대는 제국 내에서 보초나 서며 훈련받는 일반 기사들과는 다르다.

마음먹고 내전을 일으키면 얼마든지 황가를 멸족시키고 황위에 올라설 자다.

황궁을 피로 물들이고, 설령 나라가 없어진대도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모두를 죽일 것이다.

“……일단 애런을 감옥에 가두게.”

공작이 검을 고쳐 쥐었다.

손잡이의 윗부분을 손바닥으로 누르는 모양새를 보아 하니 수 초 안에 그대로 검을 찍어 내릴 작정인 듯 보였다.

“황자의 작위를 박탈하겠다! 지금 애런 황자의 작위를 박탈하겠다! 그, 그리고 정당하게 재판을 거친 후에! 그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그땐 제 손으로 하겠습니다.”

“뭐?”

“작위가 박탈됐으면 더 이상 황족도 아닌데 제 손으로 처형한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공작은 단숨에 황녀의 손에 꽂혀 있던 검을 빼냈다.

“으윽!”

살을 파고들었던 검이 빠져나가는 게 꽤 고통스러웠는지 카라샤펠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움켜쥐었다.

기사들이 몰려와 황녀를 부축하고, 애런을 일으키려는데 공작이 그들을 막았다.

“내가 옮기겠다. 손대지 마.”

황제의 명령만을 따라야 할 기사들은 공작의 기에 눌려 저들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죄인이 도망갈지도 모르니 제가 간단히 조치하지요.”

그러곤 피가 묻은 검을 휘둘러 단번에 애런의 발목을 잘라 냈다.

“으, 아아악!”

깨어난 애런이 괴성을 지르자 공작은 그의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었다.

“쉿. 폐하께서 놀라시지 않느냐.”

하얗게 질린 황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대충 인사를 올린 공작은 그대로 기절한 애런의 뒷목을 잡아끌고 알현실의 긴 복도를 걸어갔다.

하얗던 복도 바닥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감옥이 어디냐.”

“지, 지하에……. 이쪽, 그러니까…….”

입구에 서 있는 시종이 애런의 피가 만들어 낸 붉은 길을 힐끔거리며 말을 더듬거리자 공작은 허리를 숙여 그와 눈을 맞췄다.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짙게 가라앉아 있던 보라색 동공이 느리게 움직였다.

“감옥이 어디냐고 물었다.”

“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시종이 아래턱을 덜덜 떨며 발을 움직였고 알현실의 문이 쿵, 소리와 함께 닫혔다.

내부는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황제는 멍하니 서 있다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이런. 이런 망할. 랏샤! 네가 끼어드는 통에!”

시녀가 급히 갖다준 천으로 손을 묶어 지혈한 카라샤펠이 황제를 바라봤다.

“베르고 공작이 반역죄로 처리됐으면 알현실에서만 피를 흘리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무어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황제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주인 잃은 발 두 짝을 보다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치워라!”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황제는 긴 망토도 내던지고 알현실의 옆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얼굴이 희게 질린 시종 몇몇과 여전히 공작의 기에 눌린 채 꼼짝도 못 하고 선 기사들, 그리고 카라샤펠이 알현실에 남았다.

랏샤는 빈 황좌를 보며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식보다 저 자리가 더 중하다는 거지.”

그녀는 몸을 돌려 알현실을 나가며 시녀에게 명령했다.

“공작은 처형 전까지 감옥을 지킬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 머무를 방을 준비해 둬. 신경을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고.”

“예, 전하. 그리고 의술사를 부르겠습니다. 당장 치료하시면 곧바로 나을 수 있습니다.”

“됐어.”

“예?”

“베르고 공작은 지금 황궁의 사람들을 전부 다 죽이고 싶을 거다. 그러니 내가 멀끔히 치료받아선 안 돼.”

“하지만 전하. 흉터가 남습니다. 손을 더 이상 못 쓰게 되실 수도 있고요.”

“지금은 안 돼. 치료를 받는 건 처형이 끝난 후다.”

황녀는 이를 악물며 제 궁으로 향했다.

꼬박 이틀 동안 애런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고, 디에르고 역시 감옥 앞 의자에 앉아 꼼짝도 않고 그를 지켜봤다.

황녀는 비공개 재판이 진행되기 전날 밤 감옥에 찾아갔다.

과다 출혈을 막기 위해서 애런의 상처를 불로 지져 놓은 듯 살 타는 냄새가 아직도 지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카라샤펠은 양쪽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깍지를 낀 채 철창과 마주 앉아 감옥 안을 응시하고 있는 디에르고에게 걸어갔다.

“공작. 내일이 재판입니다.”

“예.”

“원한다면 공개 재판으로 바꾸겠습니다. 모든 이 앞에서 애런의 목을 치고 황궁이든, 공작저든 공작이 원하는 곳에 매달아 두어도 괜찮습니다.”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런은 누워 있는 와중에도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줄줄 뱉어 내고 있었다.

“저딴 말을 내 아이들 귀에 들어가게 할 순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디에르고는 묵묵히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날이 밝자마자 애런의 비공개 재판이 시작됐다.

애런은 재판장에 가서도 똑같이 말했다.

“베르고 영애가 안 받아 줬다고요! 그 거지 같은 새끼들은 괜히 시비나 걸고! 가죽 공장에서 무두질이나 하던 새끼가 검 좀 잡는다고 온갖 폼은 다 잡지를 않나. 둘째 이름이 헤이건이랬나? 헤이먼인가? 그놈은 불쌍해서 데려온 애완동물 같은 거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공작? 셋째가 누구더라. 아, 그래. 그레이. 난 걔가 제일 싫어. 길바닥에서 컸으면 도둑질이나 했겠지. 퉤.”

애런을 직접 재판장까지 끌고 올라온 공작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애런의 곁에 서서 검집에 손을 올린 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마력으로 농간을 부린 걸 수도 있으니 확인……을 하겠소. 억지로 조종당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빤히 바라보는 공작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늙은 마법사가 애런의 앞에 마주 섰다.

하지만 어떤 인위적인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높은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애런 황, ……죄인 애런은 아무런 조종도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저 말을 다 제정신으로 뱉었단 말인가.”

황제의 물음에 마법사는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예. 폐하.”

황제는 한숨을 짙게 내쉬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윽고 애런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 즉시 판결이 집행됐다.

화창한 아침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