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92)

70화

나도 모르게 애런의 목뒤 옷깃을 잡아채 휙 당겼다.

그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검들 따위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깜짝 놀란 황자는 맥없이 내 쪽으로 휙 딸려 왔고, 나는 그의 옷깃을 놓지 않은 채로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물었다.

“천박?”

“공……!”

“천바악……?”

잡고 있는 옷깃을 더 힘 있게 말아 쥐며 다시 한번 묻자 애런이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감히……! 황족의, 커헉! 목을 틀어쥐고! 예쁘다, 예쁘다, 큭! 봐줬더니, 이게!”

애런이 오른손을 들어 올려 내게 뻗으려는 순간, 검 한 자루가 그의 손목 앞으로 날아들었다.

서늘한 살기를 느꼈는지 애런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만약 그가 그대로 손을 뻗었다면 손목이 잘리고도 남았을 위치였다.

애런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디에르고 공작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애런의 손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내 딸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갖다 대면, 내전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전하.”

“공작!”

“저는 농담을 하지 않습니다. 썩 유쾌한 성격이 못 되어서.”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습니까? 공녀가 먼저 감히 내 몸에 손을 댔는데?!”

“먼저 공녀님의 팔을 움켜쥐신 건 전하시잖아요!”

멀찍이 서 있는 누군가가 소리쳤다.

사라의 목소리 같았지만 사람들 무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장의 여파는 꽤 컸다.

지켜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탓에 모두들 한마디씩 말을 얹어 댔다.

“……그러고 보니 전하가 먼저 그레이 공자의 말도 끊으시고 말이야.”

“공자님, 인마. 공자님이라고 해야지.”

“그, 그레이 공자님의 말도 끊으시고 말이야.”

“게다가 공녀님을 다그치셨다면서.”

“아까 공녀님이 악! 하고 소리 지르시는 걸 들었는데.”

“……아까 공자님들께 천박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세상에나. 베르고의 파티에 와서 천박하다는 소릴 하시다니.”

애런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변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내 팔을 거칠게 뿌리치곤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외쳤다.

“그럼 황궁에 가서 판단하지! 내전을 하든, 반역죄로 죽든!”

주춤거리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검들을 피한 애런이 일부러 그레이의 어깨를 퍽 치고 나갔다.

그러나 오히려 자기가 뒤로 밀려 나갔다.

잠깐 씨근덕대던 애런은 다시 그레이의 어깨를 치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공작은 그제야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레아, 많이 놀랐지. 세상에. 애런 황자 전하께서 저리 난폭하신 분일 줄은 몰랐구나. 땀을 흘리고 있구나, 내 딸.”

언제 시퍼런 살기를 내뿜었는지도 모를 만큼 공작은 다정하고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괜찮아?”

“레아. 팔뚝에 멍이 들진 않았어? 내가 마력을 넣어 줄 테니 잠깐만 기다려. 잡아당긴 손가락은? 손가락이 아프진 않고? ……빌어먹을. 왜 하필 널 건드려서.”

“너 안 다쳤어? 야. 우리 어제 삼두 했잖아. 에라이. 왜 하필 삼두를 잡냐. 야, 엄청 아프지? 에이씨. 확 그냥 진짜로 반역해 버릴까? 어, 레아. 괜찮냐고. 말 좀 해 봐.”

오빠들까지 나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 댔다.

“난 괜찮아. 그런데 황자 전하를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버지. 어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공작은 나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더니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우리 딸. 아빠가 금방 다녀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렴.”

“혼자 가신다고요? 안 돼요!”

공작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결심한 듯 그의 미소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가야지, 그럼 누가 가니.”

“혼자 가지 마세요, 큰일 나면 어떡해요! 황족의 목에 칼을 겨눴는데 어떻게 될 줄 알고 혼자 가신다는 거예요. 공작님, 제발!”

“어허. 따님. 아빠한테 어리광 부리지 않습니다. 아빠는 괜찮습니다.”

이런 때마저 공작은 내게 장난을 쳐 댔다.

“혼자 가지 마세요. 위험하잖아요! 어, 오빠. 말려 봐. 아버지 좀 말려 보라고!”

그레이의 팔을 붙잡으며 말하자 그가 얼른 공작의 곁에 가 섰다.

“검을 겨눈 건 저희도 마찬가지니까 함께 가요.”

“저도 마력으로 그를 위협했으니 아버지를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공작의 뜻은 완고했다.

“다 가면 솔레아의 곁은 누가 지키니. 혼자 다녀오마. 괜찮을 거다.”

강건한 그의 표정은 사망 플래그 같았다.

“저도 갈게요. 아빠, 저도 같이 갈게요. 제가 황자의 옷깃을 잡아당겼잖아요. 그가 팔을 움켜쥔 것도 저고요. 제가 다녀올게요.”

황족의, 그것도 황제의 아들의 목에 칼을 겨눴는데 넘어갈 리가 없었다.

공작을 이대로 보냈다가 죽으면 어떡해. 진짜도 아닌 나를 감싸려다 그가 죽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공작의 손을 잡고 빌듯이 말했지만 공작은 따사로이 웃으며 내 손을 떼어 냈다.

“너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내가 가는 거란다. 집 잘 지키고 있으렴.”

“아빠! 공작님! 제발. 아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간 공작은 옆에서 따라가던 라트엘까지 손을 내저어 쳐 냈다.

연회장 안이 침묵에 잠겨 버렸다.

“……어떡해.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무슨 소리야. 그 황자가 먼저 우릴 무시했잖아. 괜찮아. 솔레아. 아버진 금방 돌아오실 거야.”

“못 돌아오시면 어떡해.”

“아버지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실 분이 아니다.”

흔치 않게 티온이 긴 문장을 막힘없이 말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일단 방에 올라가서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기다리자. 너 요 며칠 무리했으니까 음식도 먹고. 응?”

그레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지만 눈앞이 빙빙 돌아서 내 방까지 올라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비틀거리자 그레이가 곧장 나를 안아 들었다.

“형. 나 얘 올려 주고 올 테니까 파티 정리 좀 해 줘.”

“나 괜찮아, 걸어갈게.”

“네가 잘도 걷겠다.”

내 말을 무시하고 연회장을 나서려던 그레이가 입구에서 휙 돌아섰다.

나를 안아 올린 상태로 그레이가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귀한 공녀님이 진짜로 심약해서 이만 갑니다. 귀한 걸음 해 주신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자, 솔레아. 너도 안녕, 해.”

이 상황에 뭔 농담을 해.

공작님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이 판국에.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레이가 나를 고쳐 안듯 공중에 휙 던졌다 다시 받으며 재촉했다.

“자! 빨리. 손님들한테 안녕, 해. 손님들도 솔레아 안녕∼ 해 주세요.”

“뭐 하는 거야!”

방금 베르고 일가의 살의 넘치는 장면을 본 탓인지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하하. 안, 안녕……히 가십시오, 공녀님.”

“손님들도 했어. 너도 해.”

“아니, 그러면 바닥에 내려놓고나 시켜!”

“힝. 내 동생 연약해서 내려놓을 수 없는뎅. 그레이 마음이 아파.”

“너 왜 이래! 이런 날까지!”

“얼른, 솔레아, 안녕∼ 해.”

“하…….”

한숨을 내쉰 후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왼손을 들어서 소심하게 흔들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들 속상하시게 왜 그래. 더 크게 안녕! 해 드려.”

“이게 진짜!”

결국 두 손을 들어 그레이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었다.

“그만하라고 했지! 내가!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아악! 아! 여러분! 솔레아는 괜찮다네요! 악!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악! 아파! 야, 놔라! 하나, 둘, 셋! 아악! 놓으라고! 너 떨어뜨린다! 하나아악! 둘! 으아악! 야!”

그레이는 내게 머리를 잡혀 소리를 지르면서도 나를 내 방까지 옮겼다.

침대에 내려놓은 뒤 구두를 벗기고, 이불까지 덮어 준 그가 앤을 부르러 가고서야 알았다.

패닉이 와서 무너지려는 내게 일부러 가벼운 장난을 쳐 준 거라는 걸.

난 참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구나.

‘주인! 괜찮아!’

‘방금 회색 눈 머리 뜯는 거 보니까 진짜 괜찮아 보이던데!’

‘멍청아! 마음이 아프잖아!’

‘주인! 우리가 도와줄까?’

‘임시 주인이라도 주인은 주인이지! 우리가 도와줄게!’

“아가씨, 저 들어갈게요!”

“들어오지 마! 나 잠깐 혼자 있을게!”

때마침 방에 들어오려는 앤을 저지한 후, 정령들에게 명령했다.

“가서 공작님을 도와줘. 나 너희 믿어. 진짜 온 마음을 다해 믿을게. 제발 도와줘.”

정령들이 비눗방울 터지듯 공중에서 뿅뿅 나타나더니 짧은 팔다리를 쭉 뻗으며 크게 외쳤다.

“응! 우리 믿어! 주인!”

“우리를 믿어! 주인!”

“우리만 믿어!”

“나만 믿어!”

“왜 너만 믿냐! 이 나쁜 놈!”

“아무튼 믿어 줘!”

“다녀올게!”

정령들은 일제히 사라졌다.

이젠 공작님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디에르고는 알현실의 높은 계단 위,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의 앞에 서서도 당당했다.

여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머리를 조아려 본 적이 없었다.

먼저 출발한 탓에 미리 도착한 애런은 황제에게 이미 고자질을 끝낸 이후였다.

황제는 디에르고보다 고작해야 열 살 많은 나이임에도 그의 아버지뻘은 될 정도로 늙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베르고 공작.”

“제국의 위대한 빛을 뵙습니다.”

“고루한 인사는 됐네. 황자의 목에 검을 겨눴다지?”

디에르고가 대답하기 전 애런이 얍삽하게 끼어들었다.

“예, 폐하. 제 목에 난 상처를 보십시오. 그리고 손목에도 검을 갖다 대는 바람에 하마터면 손목이 잘릴 뻔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위대하고 영원한 빛, 폐하의 핏줄인 제가 피를 흘렸습니다.”

애런은 목을 쭉 뺀 채로 옷소매를 걷어서 황제에게 보였다.

그의 목과 손목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를 악문 디에르고의 목에 핏대가 섰다.

“얘야. 그만하고. 공작. 오늘 일은 내 넘어가겠네. 자네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검을 꺼낼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고. 응, 그러니까 넘어가지.”

“폐하! 그게 무슨.”

“어허!”

억울한 듯 애런이 옆에서 칭얼댔지만 황제는 큰 소리로 그의 입을 막았다.

노쇠한 몸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의 커다란 음성이었다.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자는 황제의 말에도 디에르고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어두운 자안이 다시 살기로 번뜩였다.

“저는 제 딸의 몸에 손을 대고, 제 아들들에게 천박한 것이라 욕한 황자를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을 묻으신다면 폐하께 충성을 다 바친 베르고에게 등을 돌리신 거라 알아듣겠습니다.”

“……뭐라?”

황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곧 그의 시선이 곧장 애런을 향했다.

“너, 베르고의 공자들에게 천박한 것이라 했느냐.”

제 아들을 보는 것치곤 심히 무감한 눈이었다. 오히려 분노마저 담겨 있었다.

“폐,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지금 저자가 폐하를 협박했잖습니까! 감히 폐하를요!”

계단 아래에 있던 애런이 다급한 마음에 두 칸씩 뛰어올라가 황제의 앞에 무릎 꿇었다.

“감히 폐하 앞에서 저리 오만하게 구는데 어찌 가만 듣고 계십니까!”

“이놈!”

황제가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들어 애런의 귀싸대기를 휘갈겼다.

“……폐, 폐하.”

얼굴 반쪽이 빨갛게 변한 애런은 놀란 눈으로 황제를 바라봤지만 그는 디에르고 공작만을 보고 있었다.

“공작. 내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켰네. 허나 그쪽 아이들도 황자인 내 아이에게 검을 가져다 댔으니 이쯤에서 마무리하지.”

하지만 디에르고는 미동도 없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따귀를 맞는 게 아니라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고, 또 직접 사과를 받고 싶습니다. 그러실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 여기서 제 목을 치시지요, 폐하.”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자꾸!”

분노를 참지 못한 황제가 의자 팔걸이를 주먹으로 쿵 친 순간, 애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꾹질을 하며 말을 마구 내뱉기 시작했다.

“제가 베르고의 공녀랑 어떻게 한 번 잘해 보고 싶어서, 히끅! 근데 그 기집애가 자꾸 튕겨서요! 히끅! 저한테만 통롤러 안 주고! 그래서 따지려고 했는데 허끅! 원래 출신이었으면 저랑 말도 못 섞을 천박한 새끼들이 방해를 했습니다! 히끅!”

황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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