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하하하. 네. 당연히 그러셨겠죠.”
“예, 그럼요. 하하하. 공자님들이죠, 공자님들. 하하하하하.”
공자라는 말을 꺼냈던 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녀 전하의 파티에 가서도 질 나쁜 놈들에게 욕을 하고 왔으니.
내 집에서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 듯 모두들 오빠들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지 않고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하긴, 정말로 베르고를 고깝게 보는 귀족들이라면 애초에 이 파티에 참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티온의 귀환 파티에 왔다는 건 베르고의 눈치를 살핀다는 뜻이었고, 적어도 카라샤펠 황녀가 눈독 들이고 있는 베르고와 겉으로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거겠지.
방금 내가 맹견처럼 으르렁거린 탓인지 다들 새로운 대화 주제를 꺼내지 못하고 주춤거리다가 조금씩 흩어졌다.
이제 내 곁에 남은 건 오빠 셋과 빌과 사라, 그리고 비교적 또래인 귀족가 자제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쉽사리 말을 걸어오진 못했다.
내 얼굴이 그렇게 무섭나? 아니면 황녀가 아까 겁을 주고 가서?
그것도 아니면 내 뒤에 서 있는 쁘띠 불곰 때문인가.
나는 몸을 돌려 티온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조금 거칠어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선명하게 각진 턱선,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까지.
사람이 아니라 거목처럼 보였다.
게다가 새빨간 눈동자 아래에 깊이 팬 흉터는 그의 인상을 더욱 흉흉하게 보이도록 했다.
웬만한 아기 머리만큼 큰 주먹을 꾹 쥔 채 바짝 굳은 걸 보아 하니 낯선 사람이 많아서 긴장한 것 같았다.
티온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티온, 네 파티인데 기사들은 왜 안 왔어?”
“……다들 바쁘다고 해서……. 집에도 가 봐야 한다고…….”
집에 가 보긴 개뿔.
오늘 마련된 이 자리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티온의 무사 귀환을 기념하는 파티니 티온뿐 아니라 그의 휘하 기사들도 주인공이었다.
그런데도 안 왔다는 건 티온만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가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유유자적 꿀 빨았던 ‘후계자 아가씨’는 무시하겠다는 거지.
“다들 서운하겠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 괜찮을 거야. 내가 잘, 말할게.”
“그런데 안경 안 써도 나 잘 보여? 왜 안경 안 써?”
“아까 안경 쓰고 보니까 여기 빨간 머리는 너밖에…… 없어서. 안경, 계속 끼고 있다가…… 혹시 부서질까 봐.”
말을 하는 티온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뒤에 한 말은 거의 듣지 못했다.
“응? 안경 끼고 있으면 뭐 어쩐다고?”
“부…….”
“부?”
“부…….”
“괜찮아, 천천히 말해.”
티온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애런 황자님이 여긴 어쩐 일이시지?”
누군가 고개를 쭉 빼고 입구 쪽을 바라봤다.
애런 황자가 왔다고? 언뜻 들려온 말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확 찌푸리자 나를 보고 있던 티온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의미로 티온의 손목을 꾹 잡았다 놓고 연회장 입구를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티온과 하인이 동시에 크게 소리쳤다.
“애런 베일리 드 제르노아 황자님께서 입장하십…….”
“부순다고!”
애런을 부수겠다고?
애런 황자의 입장을 큰 소리로 알리던 하인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티온? 오빠.”
“왜 그래, 형.”
나와 헤이먼과 그레이가 동시에 티온을 바라봤다.
우리뿐 아니라 근처에 있는 이들과 입구에 서 있는 애런 황자까지 모두 티온을 바라봤다.
“황자님을 부순다고?”
“입장하면 부수겠다는 뜻인가?”
“베르고는 확실히 황녀님을 지지하는가 보군…….”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티온은 입술을 뭉갤 듯이 깨문 채로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진 걸 보아 하니 부끄러워하고 있구나.
나는 티온에게 더 가까이 붙어서 작게 물었다.
“안경이 부서질까 봐 못 쓰겠다고?”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티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랬구나. 그래도 이왕 선물한 거니까 안경 써 줬으면 좋겠어. 혹시 부서지면 내가 또 사 줄게. 그땐 같이 사러 가자, 오빠. 알았지?”
주먹을 불끈 쥔 티온이 내 어깨를 짚고선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가 이내 내리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떡해! 아가 불곰이 긴장해서 예쁘게 못 웃겠대!’
‘아가 불곰이 자기한테 관심이 집중된 게 너무 힘들대!’
‘아가 불곰 조금 슬퍼!’
‘아가 불곰 부끄러워!’
정령들이 돌아왔는지 귓가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얘들아. 불곰은 알겠는데 왜 아가 불곰이야. 이 거대한 사람이 어딜 봐서 아가라는 거니. 난 너희들의 미적 감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냥 불곰도 때려잡게 생겼는데.
‘아가 불곰 슬퍼해!’
‘아가 불곰 잉잉 울지도 몰라! 임시 주인! 빨리 달래 줘!’
잉잉이라니.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티온에게 말했다.
“티온, 많이 긴장되면 방으로 올라갈래? 나랑 다른 오빠들이 마무리할게.”
“그래, 형. 낯빛이 어둡다. 좀 있으면 사람 죽일 거 같아.”
“그레이. 전쟁터에서 사람 썰고 온 형님께 사람 죽일 거 같다니. 말조심해라. 형님, 이만 들어가시죠. 아버님도 아까 라트엘과 함께 먼저 올라가셨습니다.”
티온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앞에 서 있는 다른 귀족들의 얼굴을 눈에 새기듯 지그시 응시했다.
어린 영애가 흠칫 떨더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아가 불곰이 자기가 주인공인데 끝까지 자리를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속상해하고 있어!’
‘손님들한테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부끄러워해!’
정령들은 티온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안절부절못했다.
티온이 선하고 마력이 깨끗하다더니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지만 티온의 속마음과는 달리 사람들은 억지로 미소를 띠며 고개를 까딱 숙이거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럴수록 티온도 주눅이 드는지 눈빛이 더욱 시무룩해졌다.
이목구비 때문에 슬픈 야수 같았지만.
나는 티온의 팔을 잡아 다독이며 사람들에게 최대한 다정하게 웃음을 띤 채 말했다.
“우리 첫째 오빠가 몸이 안 좋아서 이만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한 분 한 분 끝까지 배웅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네요.”
어떻게 알았냐는 듯 티온의 눈이 약간 커졌다.
“아하하. 그러셨군요. 하하, 공자님. 다음에, 좋은 기회가 있으면, 그때 뵙겠습니다.”
아르탄 백작이 악수를 청하자 티온은 선뜻 그의 손을 잡으며 짧게 답했다.
“……예.”
묵직한 목소리가 그르렁거리는 하울링처럼 울렸다.
“어이구, 무서워라. 아니, 그게 아니고……. 예. 예, 그럼 다음에…….”
아르탄 백작과 그의 부인은 도망치듯 서로의 손을 잡고 티온보다 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다른 이들도 하하, 웃으며 티온에게 눈인사를 건네곤 서서히 멀어졌다.
그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한 애런 황자가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 참. 너도 있었지. 우리 아가 불곰 신경 쓰느라.
“여긴 황족이 왔는데 주인이란 자들이 인사도 안 하나?”
이제 처음 만났을 때의 정중한 언행은 갖다 버리기로 했는지 거만하고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이미 그의 건방을 질리도록 느낀 나와 헤이먼, 그레이는 서로의 눈을 보며 조금씩 인상을 찌푸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린 지금 속으로 개(런)새끼를 욕하는 중이었다.
재수 없기가 한결같은 새끼.
티온이 황자의 앞에 똑바로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자 전하. ……티온입니다.”
황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도도하게 올라가 있던 애런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
티온의 가슴께에 있던 애런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머리를 한껏 쳐들어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물론 애런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티온이 워낙 큰 탓이었다.
“아, 티온 공자. 자네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네. 그래. 응. 수고하고.”
대충 인사를 받아 준 애런은 곧바로 휙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영애. 오랜만입니다. 내가 보낸 편지를 받지 못했나 봐요? 그대가 답이 없길래.”
“글쎄요? 제게 오는 편지가 워낙 많아서. ……잊었나?”
머리를 갸웃거리며 그레이를 바라보자 그 역시도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네가 워낙 바빠야 말이지. 황자 전하. 요새 솔레아가 통롤러라는 걸 판매…….”
“왜 그걸 내겐 선물하지 않았지? 카라샤펠 전하께만 드린 거로 알고 있는데.”
애런이 그레이의 말을 끊고 나를 바라봤다.
그는 내 표정이 싸늘하게 식은 걸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천연덕스럽게 주둥아리를 놀렸다.
“나무 쪼가리 만들어서 파는 게 뭐 대단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황족에게 붙어서 알랑대면 꿀이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말이야. 내겐 왜 그걸 선물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네.”
“황자 전하께서 오셨군요.”
중후한 목소리가 애런 황자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디에르고 공작과 라트엘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급한 일이 있어 잠깐 업무를 보고 왔더니 그사이 황자 전하께서 이리 방문을 해 주셨군요. 늦었지만 제 아들의 파티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었지만’이 본인이 감사를 전하는 말이 늦었다는 건지, 아니면 개런이 파티에 늦게 도착했지만 뭐, 어쨌든 와 주셨으니 일단 감사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티온과 다른 오빠들이 아버지의 옆에 가 서자 마치 한 폭의 명화를 보는 것처럼 눈이 화사해지는 기분이었다.
양기+양기+양기+양기=베르고
“아……. 늦, 늦었지만, 예. 공자. 축하합니다.”
역시 기에 눌렸는지 애런 황자는 말을 더듬거리며 어색하게 굴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니?”
디에르고 공작이 인자하게 웃으며 그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요 몇 달간 내게 보여 주었던 다정한 미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웃고 있는 입과 달리 두 눈 안의 보라색 눈동자는 은근한 적대감을 표하고 있었다.
“영애가…….”
“황자 전하께서 왜 본인에겐 통롤러를 주지 않았냐며 레아를 다그치시던 중이었습니다.”
황자의 말을 냅다 끊어 먹은 그레이가 짐짓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적의로 불타오르는 그의 선명한 자안이 황자를 향했다.
“……다그쳐?”
“아, 공작.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제 딸을 다그치셨습니까?”
공작이 이를 악물자 선하게 보였던 하관에 힘이 들어가 각이 살아났다.
핏줄이 선 이마와 부릅뜬 눈을 보아 하니 금방이라도 앞에 서 있는 애런의 숨통을 비틀어 죽일 것 같았다.
오죽했으면 애런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아까 내가 세운 공식이 틀렸구나. 양기를 네 개 더하면 베르고가 아니었다.
양기²+양기+양기+양기=베르고
이거였네. 이게 맞네.
애런이 두 손을 들어 휘휘 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그치다니! 말이 심하군.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영애! 말해 봐! 내가 널 다그쳤어? 다그쳤냐고!”
다급해진 애런이 몸을 틀어 내 팔뚝을 거칠게 잡고는 짤짤 흔들었다.
“아!”
나 어제 삼두 운동 했다고.
근육통 때문에 아픈 곳을 잡힌 탓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아프…….”
다고 말하려던 찰나, 애런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보인 건 애런에게 겨눠진 검 세 자루와 그의 목을 틀어쥔 노란 안개였다.
“이, 이건 반역이야! 이보, 이보시오! 공작! 내게 검을 겨누다니! 그리고, 이 천박한 것들까지 감히 이 몸에게 검을!”
……천박?
‘아이고, 임시 주인 또 화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