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나는 귀부인에게 온화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저런…….”
“텐티넘 아카데미의 설립자인 바헨 텐티넘의 저서 중 제국의 역사, 대수학의 개념과 원리, 마법학 심화 과정까지만 읽었거든요. 그 외에도 심심풀이로 하이난의 역사서와 제왕학을 읽기는 했지만요. 아, 참. 하이난의 제자인 비르뎅 박사가 저술한 지리와 역사의 관계도 재밌다 하기에 그것도 최근에 읽었습니다.”
부인께서 껌뻑 죽는 그 아드님이 텐티넘 아카데미에서 곧 배우게 될 과목의 책들이에요.
라는 말은 속으로만 했다.
귀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꽤 놀란 목소리로 답했다.
“대단하시네요! 역시 공작가에선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는군요!”
“네, 아버지의 서재에 좋은 책이 정말 많은데 제가 읽는 속도가 조금 더디네요.”
“어유, 공녀님도 참 겸손하시네요. 베르고 공작님께선 든든하시겠어요. 이리 명석하신 후계를 두셔서.”
귀부인은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했지만, 소란스럽던 장내는 마치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잠깐 조용해졌다.
아마 아까 황녀가 ‘베르고의 공녀는 마음이 약해서 가문을 욕보이는 자가 있으면 주먹을 날린다.’고 했기 때문이겠지.
어색한 분위기가 길어지지 않도록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제 위로 든든한 오빠들이 있어 제가 이리 마음 편하게 책도 읽고, 물건을 만들어 장사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전 참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내 대답이 귀부인의 생각과는 달랐는지 그녀는 눈썹을 팔자로 모으며 나를 위로하려 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공작님이 설마 공녀님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작위를 주시겠어요?”
“아버지께서 워낙 건강하셔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아직 이르네요.”
생글거리던 웃음을 멈추고 귀부인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에브라돈 후작이 얼른 끼어들었다.
“공작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부인, 이만 갑시다.”
“당신도 참. 얘기하는 중인데. 베르고가 어디 보통 가문인가요. 제국의 공신가인데.”
“그러니 더더욱 그분의 뜻이 맞는 거지요. 그만합시다. 하하, 공녀님. 즐거웠습니다.”
에브라돈 후작은 부인의 어깨를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뭘요.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제 첫째 오빠인 티온인데요.”
“음?”
후작 부인이 뒤돌아서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에브라돈 후작은 얼른 몸을 돌려 티온에게 걸어갔다.
“공자님. 처음 뵙는군요. 에브라돈 후작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티온은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에브로돈 후작과 그 곁에 선 후작 부인을 한참 노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들어 올리며 수줍게(내가 보기엔 수줍어 보였다) 답했다.
“감사합니다.”
“허, 허허! 역시!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신 분은! 하하! 뭐가 달라도! 다르시군요! 부인. 갑시다.”
“아니, 여보. 우리도 얘기를 좀 하다 가요.”
“갑시다. 얼른.”
에브라돈 후작이 부인을 끌고 연회장을 나가며 내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활짝 미소를 띤 채 안녕히 가시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연회장을 떠나자 내 곁에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방금 내가 읽었다고 말한 책의 목록에 딴지를 걸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말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으셨습니까?”
“대수학을 바로 이해하셨어요?”
예, 한국에선 초등학교 때 사칙 연산을 다 가르치거든요. 구구단을 아실랑가 모르겠네.
“네, 대수학은 그리 어렵지 않더라고요.”
“우와. 제국의 역사는 책이 엄청 두껍지 않나요?”
“예. 그래서 겔링거 출판사에서 출간한 영지별 특산품의 역사와 함께 읽었습니다. 더 이해가 잘되더라고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매일 밤마다 퍼질러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내며 머리에 집어넣은 것들이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사라가 작은 두 손을 앙증맞게 모으고선 나를 올려다봤다.
“공녀님! 멋있어요! 저번에 노예에 대해 얘기하실 때도 느꼈지만 정말, 정말! 멋있어요!”
“고마워요, 사라.”
들떴는지 사라가 발을 종종거리며 말하자 그녀의 곱슬거리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통통 튕겼다.
너무 귀여워. 집에 싸 가고 싶어.
사라의 사랑스러움에 흠뻑 빠져 있을 때, 누군가 거만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저도 비르뎅 박사의 지리와 역사의 관계를 읽었습니다!”
“네. 대단하십니다.”
어쩌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자신에 대한 소개도 않고, 남자는 이죽거리며 질문했다.
“영주의 정치 성향이나 영지의 제도보다 기후가 영주민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견해가 흥미롭더라고요. 그 부분 기억하시나요?”
“글쎄요.”
내 대답에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의 어깨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거봐라는 식의 태도였다.
나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비르뎅 박사가 쓴 지리와 역사의 관계가 아니라 그의 부인인 코델리아 박사가 쓴 기후와 역사의 관계에 나오는 내용 아닌가요?”
“……아.”
“헷갈리셨나 봐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나는 그를 보며 안쓰럽다는 듯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뜬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씩씩거리며 연회장을 나갔다.
그 이후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끊이질 않았다.
“공녀님! 저는 조르딘 헤임입니다. 아버지는 폴제 헤임 백작이고요.”
“네, 안녕하세요. 헤임에선 베르고로 항상 질 좋은 약초와 효과 좋은 약들을 보내 주시죠. 만나 봬서 기쁘네요. 매번 감사합니다.”
“우리…… 영지에서 약초가 가는 것도 아세요?”
“그럼요.”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공녀님. 의술사의 마법이 있는데 왜 약을 쓰십니까? 약은 평민들이나 하인들이 쓰는 거지요.”
다른 귀족들의 눈빛도 똑같았다.
아프면 의술사를 부르면 되지, 뭣 하러 약을 쓰냐는 표정이었다.
내가 마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건 디에르고 공작이 의술사의 입을 막아 비밀에 부쳤다고 했으니 다른 귀족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권력을 즐기는 게 타당하고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라니.
나는 그들을 향해 태연하게 답했다.
“가문의 재산은, 영주민들이 피땀 흘려 일하며 모은 돈으로 낸 세금이니까요. 이젠 건강해졌으니 매번 의술사를 부를 필요는 없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여태 저를 치료하는 데 쓴 의술사 비용이 엄청나거든요.”
“공작님이…… 공녀님께 쓰는 돈을 아까워하실 리 없는데 왜 그러세요?”
의술사가 있는데 왜 약을 쓰느냐고 질문했던 청년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혹시 바케도니아 왕국의 홀드브룩이라는 자가 저술한 제왕학을 읽어 보셨나요?”
내 맞은편에 서 있는 이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케도니아 왕국의 발전 양상에 따라 새롭게 해석된 부분이 많아서 재밌습니다. 거기에 ‘왕은 신의 뜻으로 왕좌에 올라서지만, 거룩한 왕은 오직 백성의 뜻으로만 기억된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점점 근처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얘들아. 내가 마트 판매직 알바 할 때 주말마다 완판시켰던 말발의 기적을 보여 주마.
“백성이 진정으로 우러러보는 왕이 되어야 거룩한 왕으로 남는다는 뜻입니다. 공포나 위압감을 조성하여 무릎 꿇릴 수도 있습니다만, 진짜 내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그들의 삶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해야겠죠. 제겐 고작 의술사 한 명의 치료값이지만 영주민들에겐 열심히 돈을 벌어들여서 낸 세금입니다. 영주민들의 피와 땀이 섞인 돈을 저 하나를 위해 쓸 순 없어요.”
공작님과 비슷한 연배의 귀족들이 깊이 감명받았는지 입을 벌린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 지금 내 손에 바케도니아 왕국의 제왕학 책이 있었다면 품절시켰을 텐데.
아쉽습니다. 출판사 사장님.
쐐기를 박기 위해 다시 한번 말했다.
“저는 존경하는 제 아버지가 영주민들에게도 두려운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영주민을 위하는 영주로 평가받길 원합니다.”
“영주를 평가하는 영주민들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평가합니다. 권력의 크기, 외양, 출신 등으로요. ……아닌가요?”
정곡을 찔렀는지 귀족들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자에겐 낮은 곳, 그늘진 곳까지 살피고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잖아요?”
“그건 너무 공상적인 개념 아닙니까?”
“꼭대기에 있는데도 공상적이라고 하는 건 그저 핑계 아닌가요?”
그때, 누군가가 나를 보며 히죽거리다 비꼬듯 물어 왔다.
“공녀님, 책을 꽤 많이 읽으셨네요. 저도 매일 누워 있었으면 지금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을 거 같아요.”
저런 싹수없는 새끼.
비꼬려고 입을 여는 순간 그레이가 청년의 뒤로 다가가 섰다.
평소처럼 사람 하나 금방 죽이고 온 것 같은 싸늘한 얼굴이었다.
그레이는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그 청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제 동생이 마음이 약해서 그런 말을 잘 못 듣습니다. 저와 대화하시겠습니까?”
그러곤 허리춤에 채워진 내가 선물한 검을 만지작대는 걸 보아 하니 새 검의 이름도 대화인가 보다.
청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느새 내 옆에 헤이먼이 와서 섰다.
“피곤하면 그만 대답하고 방으로 올라가자, 솔레아.”
“아니. 난 괜찮아. 모처럼 안 싸우고 사람들 관심 받는데, 뭐.”
갑자기 내 얼굴에 그늘이 졌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을 가릴 정도로 덩치가 큰 쁘띠 큐티 불곰 티온이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낮은 목소리였지만 저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살기가 느껴졌다.
이번엔 내 착각이 아니었는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귀족들이 흠칫거리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아이고, 왜 그래! 사람들이랑 얘기하는데.”
티온의 팔뚝을 찰싹 치자 시무룩한 얼굴로 내 뒤로 가긴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내 뒤를 흘깃거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뒤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나 보네.
헤이먼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독여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를 향한 게 아니라 앞에 마주 선 이들을 향한 경고 같았다.
‘내 동생이다.’ 하는 것 같은?
헤이먼의 얼굴을 살피려고 슬쩍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레이가 내 오른편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보통 팔짱은 여자가 남자한테 끼잖아. 이 오빠야.
하지만 다정한 행동과 달리 그레이는 냉기 서린 얼굴로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우리 동생, 오빠들 빼놓고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해? 목소리까지 높여 가면서.”
“……싸웠어?”
티온이 조용히 덧붙였다.
사람들은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쳐 댔다.
“싸우, 싸우다니요.”
“공녀님과 감히 누가요.”
“워낙 해박하셔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하다.
구릿빛 피부에 얼굴에 큰 흉터를 가진 새빨간 눈의 티온, 온화하게 생겼지만 아까부터 자꾸 노란 안개를 퍼뜨리며 마법으로 위협하는 헤이먼, ‘대화’라는 검을 자꾸 만지작거리며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려는 것처럼 쏘아보는 그레이…….
이 화상들아.
내 미래의 고객들이란 말이야. 위협하지 말라고.
“거, 공자들이 참, 성격이 화통하시네. 하하.”
거슬리는 말이 들리자마자 웃음이 멎었다.
나는 말을 꺼낸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머리를 까딱 기울였다.
“……공자들?”
“제, 제가요? 공자‘님’들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깡마른 사내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레이가 팔짱을 끼고 있는 팔을 제 쪽으로 당기며 내 정수리를 도닥였다.
“참자, 솔레아. 참자. 우리 레아는 착한 동생이지. 사람을 패지 않지. 아이고, 예쁘네.”
내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네. 그레이가 팔짱을 낀 게 나 때문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