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돼요?”
“심약한 베르고 영애가 되지.”
카라샤펠 황녀는 여전히 얄미울 만큼 능청스러웠다.
“그나저나 솔레아. 나 섭섭한데.”
“뭐가요?”
“나사니엘 영애는 사라라고 부르면서 왜 나는 랏샤라고 안 불러 주는 거야. 나도 이름 있어.”
“그거야 전하는 전하잖아요!”
내가 아무리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왔다고 해도 계급 관계는 안다고.
미친 듯이 빡쳐도 사장실 들어가서 ‘박창곤 나와!’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
대한민국, 멀리서 보면 평등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철저한 계급 사회거든요.
하지만 카라샤펠 황녀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황금빛 속눈썹이 아래로 축 늘어지며 파란 눈동자가 우수에 젖어 들었다.
살아 있는 예술품처럼 보이는 가련한 미모였지만 목소리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베르고의 공자는 내게 첫 번째로 춤 신청을 하지도 않고, 공녀는 나를 무시하니……. 어쩌면 좋지. 너무 서운하네.”
“그, 전하. 티온이 낯을 가려서 그래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랑 춤추셨잖아요?”
“솔레아 혼자 춤추는 게 버거워 보여서 내가 직접 공작에게 가서 같이 추자고 한 건데…….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네. 나 그냥 황궁으로 돌아갈까 봐. 네가 선물한 통롤러도 두고 갈래.”
“유치하게 왜 이러세요. 황녀 전하!”
“황녀는 집에 갈래.”
“전하.”
“전하는 집에 간다니까.”
정말 돌아갈 심산인지 황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뒤에 서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가자. 다신 공녀와 만나지 않을 거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어.”
“그러는 전하도 다른 사람들한테 제 흉을 보고 다니셨잖아요!”
“네가 나를 한 번도 안 보니 서운해서 그랬지. 너의 전하는 이제 갈 거야. 로빈, 이만 가자.”
“예, 전하.”
황녀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시녀가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등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베르고 공작가의 첫째 티온.
입양아의 전쟁 귀환 파티에 황녀가 참석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얼굴만 비치고 가 버린다니.
이건 티온을 위해서도, 베르고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많이 팔아야 할 나의 통롤러와 염색 양모를 위해서도.
썅. 저 사람 무서운데.
나는 내 안의 쎄이다를 애써 무시하며 황녀에게 빠르게 걸어갔다.
“……랏샤.”
“음? 안 들리는데?”
“랏샤. 가지 마요.”
언제 슬픔에 젖었냐는 듯 황녀가 커다란 눈을 빛내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사냥감을 입에 물고 득의양양하게 돌아온 맹수 같은 눈빛이었다.
나 무서워. 나야말로 집에 가고 싶다. 17억아. 엄마 무섭다.
“다시 말해 줘. 솔레아.”
“랏샤가 이렇게 금방 가 버리면 베르고가 무슨 소릴 듣겠어요. 이왕 와 줬는데 조금만 더 있어 줘요.”
황녀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완벽한 균형을 가진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장착되었다.
“난 네가 솔직해서 좋아. 내가 좋으니 남아 있어 달라는 말은 절대 안 하지.”
“……전하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전하는 집에 간다니까?”
“랏샤. 좀 앉아 있으세요.”
“그럴까, 그럼?”
황녀는 흔쾌히 내 손목을 잡고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소파로 향했다. 나와 나란히 앉은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소파 뒤에 서 있던 로빈이 살짝 허리를 굽혀 황녀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괜찮아.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까. 나를 약 올리는 애런도 없고, 옆에는 솔레아가 앉아 있고.”
“저기요. 전, 랏샤.”
“내 이름은 전랏샤가 아닌데.”
“랏샤.”
“응. 레아.”
“저한테 왜 이러세요.”
황녀에게 손목을 잡힌 채 연회장의 화려한 조명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꾸 인생에 회의감이 드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나…….
“아까 말했잖아. 친구가 되고 싶은 거라고.”
“누가 친구한테 이렇게 강압적으로 굴어요. 정떨어지게.”
내 손목을 잡고 있는 황녀는 말이 없었다.
옆을 돌아보려는 순간 황녀가 입을 열었다.
“치워.”
“네? 뭘요?”
고개를 돌리자 내 뒤에 서 있던 기사가 검집에 뭔가를 집어넣는 게 보였다.
눈이 저절로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나를, 지금 나를, 죽이려고 했, 했어요? 저를……. 왜요?”
“미안. 내 기사가 성질이 급해서. 퀴온. 나가서 기다려.”
갑옷을 챙겨 입지는 않았지만 서 있는 폼이나 걸음걸이가 누가 봐도 잘 훈련받은 기사였다.
황녀는 퀴온이 나간 뒤에도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정면을 바라보다가 잡고 있던 내 손목을 천천히 놓아 주었다.
“……내게 정이 떨어져?”
“네?”
황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내게 말을 건 적이 없는 것처럼 미소를 띤 얼굴로 여전히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의 도톰한 붉은 입술이 다시 그림처럼 움직였다.
“내가 이리 굴면 나한테 정이 떨어지냐 물었어.”
“꼭 그렇다기보다는……. 자꾸 이렇게 무섭게 굴고, 친구도 못 사귀게 하시면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싶은 거죠. 사람 관계가 그렇잖아요. 소유하는 게 아니니까. 제가 전하의 물건은 아니잖아요. 붙잡는다고 잡아지나요. 사람이.”
한참 말이 없던 황녀가 입을 열었다.
“치워.”
“예? 뭘 또.”
난 이번엔 반대쪽으로 재빠르게 얼굴을 돌렸다.
제복을 입고 있는 다른 남자가 검집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무슨 말만 하면 사람을 죽이려고 해요?”
“미안. 내 기사들이 까다로워서 누군가 내게 불충하게 구는 걸 잘 못 봐. 제이드, 너도 나가 있어.”
황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제이드라 불린 기사가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연회장 밖을 향해 걸어갔다.
“저 지금 두 번이나 죽을 뻔한 거예요?”
“내가 황궁에 돌아가서 따끔하게 교육할게.”
황녀는 기사들이 실수라도 한 것처럼 말했지만 저들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저렇게 행동했다는 건, 교육을 저런 식으로 받았다는 뜻이었다.
황녀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라고.
“전하.”
“랏샤.”
“아니, 싫어요. 전하라고 할 거예요.”
황녀가 나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러자 황녀의 근처에 서 있던 여자와 남자들이 모두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그냥 놀러 온 다른 집안 귀족들인 줄 알았는데 다 수행 기사들이었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고 황녀에게 말했다.
“저랑 친구가 되고 싶으시면 이런 식으로 하시면 안 돼요. 저는 이렇게 강압적이고 무서운 사람 싫어해요. 정말, 정말로 싫어요. 억지로 뭔가를 하라고 시키고, 못 나가게 하고, 힘으로 억누르려고 하는 사람 싫어요. 진짜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뭐?”
“황녀 전하가 다음에도 이렇게 검을 들이대고, 사람을 협박하시면 전 황녀 전하를 친구는커녕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으로도 안 볼 거예요. 제르노아 제국의 1 황녀 전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내가 말을 하는 동안 황녀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먼저 일어나 볼게요. 전하, 불충을 용서하세요.”
다리를 떨고 있진 않나, 일어나서 움직이면 목이 썰리려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의외로 나를 붙잡은 건 황녀가 한 말이었다.
“그럼 너도 놀러 와.”
“네?”
“물건 팔러 오는 거 말고,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자리 때문에 억지로 오는 것 말고. 그냥 놀러 와. 기사도 시녀도 다 물러가라 할게.”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눈은 어쩐지 간절해 보였다.
“알았어요. 다음에 갈게요.”
“……정말이야?”
“네. 정말이요. 갈게요. 그러니까 그땐 겁주지 마세요.”
“그땐 랏샤라 부를 거야?”
“제 마음이 내키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 목숨을 종잇장처럼 여기는 사람 같았는데.
물론 그건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황녀가 인간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 부르는 게 뭐라고.
괜히 귀엽게 느껴져서 나는 황녀의 하얀 손을 잡았다.
“천천히 친해집시다. 황녀 전하.”
황녀의 얼굴에 평소처럼 자신만만한 미소가 다시 번졌다.
“손부터 잡자고?”
“아우, 좀!”
벌레라도 쫓듯이 손을 쳐 내자 뒤에 서 있는 시녀가 나를 노려봤지만 황녀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 그래서, 저 양모는 내게 선물로 줄 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녀는 다른 사람들 들으라는 듯이 연회장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염색 양모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고 있는 화려한 자수가 수놓인 노란색 양모였다.
굳이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두의 관심이 이리로 쏠렸다.
‘황녀의 시선을 끌고 있는 저 양모를 만든 이가 베르고의 공녀인가?’
‘저 양모는 뭐지?’
벽에 걸린 노란색 양모에는 하얀색 자수가 촘촘하게 수놓여 있었다.
멀리서 보면 레이스를 덧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한 땀 한 땀 직접 수를 놓은 섬세한 기술이었다.
황녀는 내 옆구리를 살짝 쿡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대답해야지.”
나 역시 황녀를 보며 웃었다.
이 사람이 내 양모를 홍보할 시간을 주고 있었다.
“전하께 드릴 것은 최상품으로 따로 준비해 뒀습니다.”
“그래? 언제 줄 건데?”
“제가 직접 가져다드릴게요. 시간 빼 주실 수 있죠?”
“그럼. 네가 온다면 그 정도 시간이야 빼지.”
“감사해요, 전하.”
“뭘. 저 아름다운 양모를 준다는데 내가 더 고맙지. 그럼, 난 진짜 피곤해서 이만 가 볼게.”
내 손을 한 번 꼭 잡았다 놓은 황녀가 아차, 하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목걸이는 돌려줄 필요 없어.”
“아, 네…….”
씨익 웃은 황녀는 데려온 기사와 시녀들을 이끌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어우, 기 빨려. 방금 목숨 두 번 건졌네.
황녀가 나간 뒤, 아까 겁을 집어먹고 내 눈치를 살피던 이들이 조금씩 곁으로 다가왔다.
“저 양모가 정말로 베르고에서 제작한 건가요?”
“대체 어디서 만들었길래 저런 빛깔이 나오는 겁니까?”
“자수는 또 어떻고요. 정말 아름다워요. 고요한 눈보라를 보는 것 같아요.”
“붉은 양모의 빛깔은 태양을 꼭 닮았습니다.”
“저 붉은 양모가 티온 공자가 걸치고 왔던 건가 봅니다.”
“가격은 어떻게 되나요?”
“벽에 걸어 두니 정말 화사하고 예쁘네요!”
나는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답했다.
“제가 직접 판매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믿을 만한 상단과 계약하려 합니다. 그런데 저게 염색도 몇 번이나 공들여 하고, 자수도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직접 놓은 거라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만족하실 만큼의 양이 될지 어떨지…….”
귀족들의 눈이 번뜩였다. 가격이 얼마가 됐든 간에 손에 넣고 말겠다는 투지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중에선 꽤 나이가 있는 귀족들도 많았다.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요. 나는 에브라돈 후작이고, 여긴 내 부인입니다. 이이가 양모에 대해 묻고 싶다는군요.”
“반갑습니다. 에브라돈 후작가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드님께서 텐티덤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입학하셨다면서요?”
“어머. 그걸 어찌 아셨을까. 호호호! 아들이 책 읽는 걸 좋아해서요. 공녀님도 책을 좋아하시나요? 아, 양모 만드느라 바쁘셔서 책은 못 읽으시려나. 아무리 장사가 하고 싶으셔도, 귀족은 배움이 중요하지 않나요?”
백발이 성성한 귀부인의 얼굴에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안쓰러운 빛마저 스쳤다.
평생을 귀족으로 살았을 테니, 그 시선으로 봤을 때 베르고가 귀족답지 않은 짓만 골라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