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응? 뭐가?”
고개를 갸웃거린 공작은 박자에 맞춰 다음 동작을 이어 가려 했지만 난 이미 굳어 버린 몸을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자꾸 동작을 틀려서요. 하,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다른 때 저런 말을 들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쳤을지도 모르지만 요 며칠 꿈처럼 행복했던 탓에 공작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불안한 마음에 습관처럼 목걸이를 쥐려고 했지만 로또가 담긴 로켓을 황녀가 끌러 버린 탓에 지금 차고 있지 않았다.
“솔레아? 괜찮니?”
“네. 저 이제 그만 쉴게요. 하하. 발바닥이 아프네요.”
어색하게 웃으며 연회장 구석으로 걸어가는 내 곁으로 아기 토끼가 다가왔다.
“공녀님!”
적어도 이전의 솔레아를 모르는 사라를 보니 마음이 풀어져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사라! 가 아니고 나사니엘 영애! 미안해요. 편지를 몇 번 주고받는 동안 내적 친밀감이 바짝 올랐네요.”
“헤헤, 사라라고 불러 주세요. 오늘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늦게 도착해 죄송해요……. 오빠가 자꾸 안 간다고 해서…….”
“빌이요? 왜지?”
그레이 보러 오라고 하면 맨발로도 검 챙겨서 뛰어올 양반인데.
목을 쳐들고 주변을 둘러보자 큰 키의 연한 갈색 머리 남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연회장 입구에 서 있었다.
“빌 왜 저래요?”
사라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더니 두 손을 입으로 가져다 대고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래도 높이가 맞지 않자 몸을 좀 더 낮춰 달라는 듯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내가 몸을 낮추자 그제야 사라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공녀님이랑 제가 편지를 몇 번이나 주고받았는데……. 약속을 안 지키셨다고……. 저번엔 그레이 공자님이랑 공녀님 두 분이서 말도 안 하고 놀러 갔다 오셨다고…….”
귀에서 웅얼거리는 사라의 앳된 목소리는 종달새처럼 귀여웠지만 내용은 하찮았다.
“아니, 뭐 그런 걸로 삐지고 그런대요. 빌!”
큰 소리로 부르며 이리 오라고 하자 빌은 시무룩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조금 내민 채 성큼성큼 걸어왔다.
“공녀님……. 너무하십니다. 약속하신 지 벌써 몇 주나 지났어요.”
“미안해요. 빌. 너무 바빴어요. 큰오빠도 오고 하니까 정신이 없어서.”
“거봐, 오빠! 내가 뭐라고 했어! 공녀님 바쁘시다고 했잖아! 공녀님이 바깥일 하느라 바쁘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애같이 왜 그래, 정말!”
사라가 옹골차게 쥔 주먹으로 빌의 드넓은 팔뚝을 콩 하고 때렸다.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 같아 나는 살짝 미소 짓곤 빌을 마저 달랬다.
“이번엔 정말 빨리 약속 잡을게요. 아니면 지금 그레이 불러서 우리 다 같이 놀러 가는 날을 정할까요?”
“정말요?”
“네. 그러니까 그 아랫입술 좀 집어넣어요. 나사니엘 백작가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그러고 계시면 쓰나.”
약속을 잡겠다는 말에 빌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막, 크게 서운한 건 아니었습니다. 약속을 잊으셨나 해서……. 물론 제가 큰 도움을 드린 건 없지만요. 그래도…….”
“알았어요,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요.”
그레이를 찾으려 몸을 돌렸지만 한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어디 갔지? 또 어디 구석에 서 있나?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둘러보자 영애들 무리의 한가운데에 있는 그레이의 적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영애들이 왜 그레이를 둘러싸고 있지? 또 헛소리하면서 그레이를 괴롭히고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전투태세에 돌입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레이를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투지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들리는 영애들의 대화 내용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아이작 슐로든과의 결투에서 손끝 하나 안 다치셨다면서요!”
“공자님, 잘하셨어요! 그자가 어디 보통 무뢰한이었나요! 매번 예의 없이 구는 통에 다들 쉬쉬하며 피했답니다.”
“저 사실 그때 속이 시원했어요! 그 자리에 저도 있었는데 기억 못 하시겠죠?”
“공자님. 저는 멜리아 멀린입니다. 멀린 백작가를 아시나요?”
“검을 그리 잘 쓰신다면서요. 제 꿈은 기사가 되는 건데 제게도 가르쳐 주세요.”
적잖이 당황했는지 그레이의 두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저는……. 어, 네, 검은 어렸을 때부터 연습해서. 네, 아, 멀린 백작가, 들어 봤습니다. 교육은 아직 제가 부족한 점이 많아서……. 솔레아!”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그레이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날뛰던 두 눈이 나를 향해 곱게 휘어졌다.
가만히 서 있을 땐 긴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 때문에 사나워 보였는데 웃으니 세상 잘생긴 미남이었다.
여태 대놓고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놈들 때문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가 여기엔 그런 자들이 없으니 비교적 편하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야, 너 인기 좋다?”
히죽거리며 팔을 툭 치자 그레이는 난처한 듯 마른세수를 하며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갑자기 왜들 저러는지 모르겠어.”
“네가 아이작 슐로든하고 싸워서 이겨서 그런가 보지.”
“뺨 때린 건 넌데 말이야.”
“……어, 그러게. 왜 나한텐 아무도 말을 안 걸지?”
주변을 둘러봤지만 눈이 마주친 영애들은 대부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곤 내 시선을 피했다.
“왜지? 왜 나만 이렇게 동떨어져 있지?”
“너 또 나 몰래 어디서 쌈박질하고 다닌 거 아냐?”
“웃기지 마. 검 들고 싸운 건 넌데 왜 너는 인기 폭발이고 나는 이래.”
“내가 잘생겨서 그런가 보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네 방엔 거울도 없냐.”
“지는.”
그레이는 잘생겼지만, 왜인지 모르게 내 입으로 칭찬해 주긴 싫었다.
누가 봐도 친남매마냥 상대를 흉보며 남 몰래 그레이와 서로 한 대씩 치고받던 나는 뒤늦게 멀찍이 선 빌의 간절한 눈과 마주쳤다.
“아, 참. 그레이. 놀러 가자.”
“우리? 둘이? 어디로? 언제? 지금?”
그레이의 회색 눈동자가 신이 나서 반짝거렸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아……. 뭐, 누구?”
“저기 저쪽에서 너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는 네 친구랑, 귀여운 아기 토끼랑.”
“무슨 소리야?”
내 머리를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툭 친 그레이는 몸을 돌려 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빌이 환하게 웃으며 그레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빌이랑?”
“또 사라랑.”
“왜 넷이서 놀아?”
“내, 내가 사라랑 친해지고 싶은데 사라가 나랑 단둘이 있는 게 좀 긴장된대서.”
“그럼 나 빼고 셋이 놀아. 빌 쟤 나 볼 때마다 대련하자고 검 들이댄다고.”
“내가 대련의 대 자도 못 꺼내게 할게. 그리고, 어…….”
놀자고 하면 단박에 따라나설 줄 알았는데 어지간히도 대련이 싫은지 그레이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초조해진 나는 그레이의 옷소매를 살포시 붙잡은 채 조곤조곤 덧붙였다.
“나도 오빠 있는데 사라만 오빠 데리고 나오면 좀 그렇잖아.”
시들하던 그레이의 얼굴이 움찔 떨렸다.
그의 광대가 미세하게 점점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 위로 오빠가 셋이나 있는데 그중에 굳이 나한테 같이 가자고 말한 걸 보면, 너도 참. 솔레아. 자꾸 나만 찾지 말고 티온 형이나 헤이먼 형이랑도 좀 대화를 해 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티를 꼭 그렇게 내야겠냐. 알았어. 같이 가지, 뭐. 네가 내가 제일 편하다는데 같이 가 줘야지.”
“……오빠 새끼.”
“뭐라고?”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내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며 샐쭉 웃자 그레이는 내 양 볼을 한 손으로 잡아 찌부러뜨렸다가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웃긴. 못생긴 게.”
마침 디에르고 공작이 그레이를 부른 덕분에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 얼른 빌에게 걸어갔다.
“빌. 확답 받았어요. 다음 주에 우리 저택으로 와요. 만나서 같이 놀러 나가요. 그리고 그날은 절대, 절대로 대련 얘기 꺼내지 말아요.”
“예? 아……. 왜요?”
골든 레트리버 같은 빌의 커다란 눈이 아래로 축 처졌다.
“빌. 원하는 게 뭐예요. 우리 오빠 모가지 썰기예요, 아니면 우리 오빠랑 친해지기예요?”
“말을 왜 그렇게 험악하게 하세요, 공녀님. 무섭게…….”
주변에 사람이 많아 말을 재빠르게 와다다 쏟아 냈더니 빌은 한껏 당황해 버렸다.
빌은 여태 그레이와 다시 한번 검을 맞대고 대련해 보고 싶단 생각만 했지, 그와 친해진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남자들끼리 어, 친해져 가지고. 가끔 같이 말도 타고? 어……. 그리고, 그 뭐냐. 가끔 사냥도 가고. 그, 또 뭐 있지. 아무튼 놀러도 가고. 그러면 되지. 대련만 하는 기계도 아니고. 그러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저는 그냥 그레이가 검 휘두르는 걸 또 보고 싶고…….”
“집중의 박수를!”
“예?”
“아이고, 실수.”
정령들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제정신을 차린 나는 빌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빌! 우리 오빠랑 친해지고 싶은 건 맞죠?”
“네! 그건 확실합니다! 친해진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요! 그건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 친해지기부터 합시다! 그러니까 당분간 대련 얘기는 꺼내지 말기!”
“예!”
당차게 대답한 빌은 내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곤 다시 내 손을 움켜쥐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손 놓지. 나사니엘 영윤.”
소란스러운 연회장 안으로 냉기 서린 차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라샤펠 황녀가 창가 앞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절친한 벗의 손을 그리 꽉 잡으면 어떡하나. 우리 솔레아 놀라잖아.”
“제가 언제부터 전하의 절친한 벗이었습니까?”
“마음으로 가까운 사이라며?”
“저희가요?”
“내가 그렇게 하기로 했어.”
빌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놓았지만 사라는 내 곁에 꼭 붙어 서 있었다.
카라샤펠 황녀는 나와 머리 두 개는 차이 나는 작은 영애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사니엘 영애군요.”
“반, 반갑습니다. 황녀 전하. 저는 나사니엘 백작가의 사라 나사니엘입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사라, 너무 떨지 마세요. 황녀님이 처음 뵐 땐 엄청 무섭지만 자꾸 뵙다 보면 조금 무서워요.”
내 말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는지 사라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저런. 성년을 넘겼다는데 아직도 저리 겁이 많아서야.”
“황녀 전하. 사라 겁주지 마세요.”
“황녀를 앞에 두고 다른 영애를 챙기는 법이 어디 있나. 속상하게. 네가 그러면 내가 다른 영애들에게 조심하라고 한 보람이 없잖아.”
“다른 영애들에게 뭘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내 드레스를 붙잡고 있는 사라의 손을 떼어 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라. 오늘 와 줘서 너무 고마워요. 나중에 또 편지할게요. 황녀 전하와 얘기를 해야 해서요.”
“네, 네. 죄송해요. 제가 괜히 붙잡고 있어서.”
“아니에요. 우리 오빠들도 친절하니까 가서 얘기도 좀 하고, 다른 영애들이랑도 어울려 봐요. 황녀 전하가 무섭게 생기셨어도 사람을 죽이진 않으실 거예요.”
여전히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나 보다.
사라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다가 두 손을 덜덜 떨면서 빌에게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다른 영애들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전하?”
카라샤펠에게 가까이 다가가 묻자 그녀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베르고 영애는 마음이 약해서, 가문을 욕보이는 자가 있으면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린다고 했지. 틀린 말도 아니잖아?”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남의 입으로 들으니 이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