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옆구리에 공짜로 얻은 검을 찬 그레이와 나란히 시장을 걸었다.
“사과 먹을래, 솔레아?”
“응.”
“아저씨. 이거 두 개만 줘요. 닦아서 주면 더 좋고.”
그레이에게서 번쩍번쩍한 금화를 받은 과일 가게 사장은 허허 웃으며 상자에 가득히 쌓인 빨간 사과 중 가장 동그랗게 생긴 것 두 개를 골랐다.
그러곤 티 하나 없이 하얀 천에 사과를 빡빡 닦은 뒤 우리에게 하나씩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공자님!”
“내가 공자인 걸 알아?”
“아이고, 머리색만 봐도 알지요. 공녀님과 같이 나오셨군요. 남매가 사이가 좋으시니 보는 저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사장의 입 발린 소리에 그레이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우리가 딱 봐도 사이좋은 남매 같아 보여?”
“아, 그럼요! 우리 애들도 공자님과 공녀님처럼 사이가 좋으면 더 바랄 게 없죠!”
빨간 사과를 손에 쥔 그레이의 입꼬리가 주체 못 하고 계속 올라갔다.
“그만 웃어, 그레이.”
내 핀잔에도 그레이는 주머니에서 금화를 한 움큼 꺼내 사장의 손바닥 위에 척 올려 줬다.
“아, 아니! 이미 넘칠 만큼 큰돈을 받았습니다, 공자님!”
“사양 말고 받아요. 애들 잘 키우시고. 우리처럼. 사이좋게. 우애 넘치게. ……남매인가 보지?”
마침 가게 안쪽에서 코흘리개 여자애와 남자애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압빠! 오빠가 또 내 과자 훔쳐 먹어! 꺄아아아!”
분통이 터졌는지 여자애가 발을 구르며 울음을 터뜨리자 어쩔 줄 몰라 하던 사장이 일단 아이를 안아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제 아버지가 곤란해하는 게 보이지도 않는지 사장의 바지를 붙잡은 남자애가 시뻘게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열심히 말했다.
제 나름대론 꽤나 억울한 듯했다.
“아니야아! 랠리가 먼저 내 거 먹었어! 자기 거 있는데도 내 거 먹었다고!”
“랠리 거야! 다 랠리 거야! 아빠도 내 거야! 과자도 내 거야! 다 랠리 거야! 랠리 거야아아악!”
“랠리! 아빠가 자꾸 욕심부리면 안 된댔지!”
아빠 품에 안겨서도 발을 동동 구르며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이 우는 아이 때문에 사장은 우리에게 뭐라 말도 못 꺼내는 중이었다.
이때다 싶었는지 그레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랠리. 오빠랑 사이좋게 지내라, 우리처럼.”
굳이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 그레이가 싱긋 웃으면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사장은 연거푸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고 그 이후론 내딛는 걸음마다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베어 문 사과를 몇 번 씹어 먹기도 전에 꽃밭을 발견한 벌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자님, 공녀님! 우애 좋은 남매십니다!”
“좋아! 주스가 얼마지! 한 잔씩 부탁해!”
“건강해지신 공녀님과 공자님의 나들이라니! 이렇게 의좋은 남매는 본 적이 없습니다!”
“고마워! 자네 가게가 어디야! 내가 다 사지!”
“제르노아 제국에서 제일가는 우애입니다! 함께 놀러 나오시다니 제가 다 눈물이 왈칵 흐르네요!”
“정육점이야? 좋았어! 돼지 한 마리 베르고 공작가로 보내 놔!”
장난기 심한 정령들까지 신이 났는지 내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다가 그레이의 어깨 위에 앉았다.
그러곤 운율이라도 맞추듯 함께 소리쳤다.
‘멋진 오빠세요, 공자님!’
‘두 분만큼 사이좋은 남매는 다신 없을 겁니다!’
‘제국의 자랑!’
‘좋은 남매의 표본!’
‘임시 주인의 오빠는 좋은 오빠!’
‘나도 오빠 갖고 싶어!’
‘주인한테 만들어 달라 그래!’
‘임시 주인! 오빠 만들어 줘!’
내가 어딜 가서 정령 오빠를 데려오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혼이 빠질 것 같았다.
어느새 내 목에는 꽃으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한 손엔 닭꼬치, 나머지 한 손엔 주스를 든 채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사람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들이밀었다.
“그레이. 사람들이 너무 몰렸잖아.”
“그래도 처음으로 너랑 시장에 왔는데 시끌벅적하고 재밌잖아.”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지 그레이는 보기 드문 부드러운 표정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점점 더 인파가 몰려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레이의 얼굴에서도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때, 그레이가 주스를 들고 있던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말발굽 같은 소리가 박자를 맞추듯 땅을 쿵쿵쿵 울리며 가까워졌다.
자세히 들어 보니 말발굽 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다만 땅에 발을 딛는 박자가 정확히 맞아떨어져 말이 뛰어오는 것처럼 무게감 있게 들렸을 뿐.
흰 옷을 입은 베르고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인파들 사이를 뚫고 길을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리 지어 몰려 있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가운데 길이 뻥 뚫렸다.
기사들이 만들어 놓은 길의 끝에서는 우리가 타고 온 마차가 얌전히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너 기사단 데리고 왔어?”
깜짝 놀라 그레이에게 묻자 어느새 머리에 쓴 화관을 민망한 듯 어루만지며 그가 대답했다.
“너 다치면 어떡해. 그래서 그냥 데리고 나왔지. 다들 선뜻 따라가겠다 하더라고.”
그레이의 대답을 들었는지 기사들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아유, 우리 아가씨 나들이 두 번만 갔다간 군대 불러야겠네요.”
“아가씨! 얼른 마차로 가 주세요! 사람들 막느라 등이 터지겠어요!”
기사들이 막고 있는데도 시장의 사람들은 기사들의 틈 사이로 물건들을 들이밀고 있었다.
“직접 짠 손수건이에요!”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 맛 좀 보세요! 공녀님! 최고급 치즈예요! 멋진 공자님과 나눠 드세요!”
“수제 잼이에요! 공녀님! 너무 건강하시고 오빠를 너무 좋아하시는 공녀님!”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레아, 우리 수제 잼 사 갈까?”
“너 방금 ‘오빠를 너무 좋아하시는 공녀님’이라고 해서 그러는 거지.”
그레이가 회색 눈을 곱게 접으며 머리를 기울여 내 어깨에 기댔다.
키가 커서 몸을 거의 한쪽으로 접은 모양새였다.
“듣기 좋잖아. 오빠를 너무 좋아하시는 공녀님이라니.”
지갑을 열기 위해 아첨하는 말인 게 뻔한데도 그레이가 티 나게 좋아하는 걸 보니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졌다.
“……넌 뭐, 그런 말에 일일이 반응해.”
“좋아서 그러지.”
기사들이 만들어 준 길 사이로 나란히 걸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동생이 오빠 좋아하는 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그레이는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씩 웃으며 두 손으로 내 두 귀를 막았다.
“왜 그래?”
내 뒤에 선 그레이는 여전히 귀를 막은 채로 뒤따라 걸으며 일부러 다 들리게 소리쳤다.
“내 동생 귀 빨개진 거 아무도 보지 마!”
“아! 좀! 그레이! 하지 마!”
“오빠 좋아하는 솔레아 귀 빨개진 거 아무도 보면 안 돼!”
“손 떼라고!”
양옆에 줄지어 선 기사들이 그레이와 내가 실랑이하는 걸 보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겨우 마차에 다다르자 그레이는 그때서야 내 귀에서 두 손을 떼 냈다.
“세상에, 오빠를 너무 좋아하는 동생의 귀가 아직도 빨갛잖아.”
“네가 귀를 터뜨릴 것처럼 잡아서 그렇잖아!”
“오빠가 동생이 좋아서 귀 막아 주는 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나를 놀리는 건지 아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그레이가 쑥스러운 척 고개를 반대쪽으로 슬쩍 돌렸다.
“놀리지 말라고! 좀! 놀리지 말라면 놀리지 마!”
주먹을 쥐어 그레이의 팔뚝과 어깨, 등짝을 퍽퍽 때리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 오빠를 너무 좋아하는 동생이 오빠를 때리는 특별한 일이네!”
“좀! 하지 마! 너 진짜 왜 그래! 갈수록 심해져!”
“나도 갈수록 솔레아 너무 좋은데! 동생 좋아하는 오빠가 어디 있지! 여기 있지!”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내게 퍽퍽 얻어맞는 와중에도 그레이는 계속 낄낄거리며 웃었다.
하인이 마차의 문을 열어 주자 그레이는 자신을 때리던 내 손을 잡고 그대로 등을 밀어 안에 태워 버렸다.
아주 자연스러워서 언제 마차에 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나를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마차에 따라 올라탄 그레이는 마차 문이 닫히자 그림같이 웃으며 씩씩거리는 내게 말했다.
“알았어. 이제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로는 안 놀릴게. 특별한 일도 아닌데, 그치? 내가 심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날 보며 그레이는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마부 쪽으로 나 있는 작은 창을 열더니 내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마부에게 명령했다.
“어디 가는 거야?”
“비밀.”
한참을 달린 후 마차에서 내리자 넓고 고요한 평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미리 챙겨 놨는지 마차 안에서 커다란 숄을 꺼내 온 그레이가 내 어깨 위에 숄을 둘러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
나만 혼자 평원에 남겨 두고 그레이는 마차 뒤를 줄줄이 따라온 기사들을 향해 뛰어갔다.
뭘 하려는 거지.
잠시 후 그레이가 커다란 갈색 말 한 마리를 몰며 다가왔다.
“……말은 왜?”
“말 한 번도 안 타 봤잖아, 너.”
“나, 나 말 탈 줄 몰라.”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말을 실제로 보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말 얼굴이 내 머리보다 위에 있었고, 몸집이 워낙 커서 다리에 한 번 치이기만 해도 갈비뼈가 나갈 것 같았다.
“괜찮아, 천천히 손 내밀어 봐. 얘 이름은 스테파니야.”
내 손을 잡은 그레이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스테파니의 긴 얼굴 위에 올려놓았다.
커다란 눈동자가 멀뚱멀뚱 나를 바라봤다.
“……안녕, 스테파니.”
차가운 손바닥에 부드러운 스테파니의 털이 닿았다.
나도 모르게 몸을 굳히자 그레이가 진정하라는 듯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스테파니. 얘 내 동생이야. 알지?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말이랑 대화가 통할 리가 없는데도 그레이는 차분히 말을 걸었고, 스테파니는 마치 그레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하게 굳은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잠깐 그렇게 그레이의 큰 손과 스테파니의 부드러운 얼굴 사이에 손을 가둬 두고 있었다.
“자, 이제 타 볼까.”
“내가 어떻게 타!”
땅을 디딘 발에 힘을 주며 나름대로 안 가려고 버텼지만 그레이는 막무가내였다.
“스테파니도 너 안 싫대. 이리 와.”
붙잡고 있던 내 손을 잡아당긴 그레이는 스테파니의 옆에 서서 내 옆구리를 잡았다.
“여기 등자에 발 하나 올리고, 어, 그렇지. 고삐 잡고. 스테파니, 가만히 있어. 자, 이제 올린다. 하나, 둘!”
“꺅!”
순식간에 몸이 번쩍 들렸다.
본능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말고삐를 꽉 잡자 스테파니가 뒷걸음질 쳤다.
“얘, 얘 움직여!”
“가만히 있어. 괜찮아. 고삐 너무 당기지 말고.”
두 팔로 나를 들어 올리고 있는 상태임에도 그레이는 안정적으로 말했다.
“솔레아, 괜찮을 거야. 내가 잡고 있을게.”
“어으으…….”
생전 처음으로 말 위에 올라 안장에 겨우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그레이가 곧바로 내 뒤에 올라탔다.
스테파니가 푸르릉 입술을 떨며 신경질적으로 투레질했다.
“얘 화난 거 아냐? 정원 초과돼서?”
“넌 우리 스테파니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냐. 얘가 얼마나 힘이 세고 잘 달리는데. 그치, 스테파니?”
그 순간 거짓말처럼 스테파니가 투레질을 멈추고 자랑이라도 하듯 앞발로 땅을 긁어 댔다.
달려 볼 테면 얼마든지 달려 보라는 것 같았다.
“레아, 긴장 풀고 앞에 봐. 허리 펴고. 손에 힘 풀어.”
움츠러든 내 어깨를 다시 한번 다독여 준 그레이는 고삐를 잡은 내 손 옆으로 오른손을 가져다 댔다.
그가 고삐를 잡고 있다는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긴장해 바짝 힘이 들어갔던 손에 힘이 풀렸다.
천천히 그레이의 가슴에 기대고 앞을 바라봤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지평선 너머로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와 저 먼 파란 하늘 위에 조금 이르게 뜬 하얀 달.
“달릴게.”
말을 마친 그레이가 왼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오른손으로 고삐를 고쳐 쥐었다. 그와 동시에 스테파니가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우, 우와……. 와!”
전혀 춥지 않았다.
등을 기대고 있는 그레이의 가슴은 따듯했고, 그의 팔은 절대 나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바람 사이를 달리는 또 하나의 바람이 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