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유리 진열장에 한쪽 팔을 걸친 그레이가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아니, 사실 음산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너 눈 좋다며. 그런데 갑자기 안경을 왜 사.”
“책 읽을 때 필요할 거 같아서. 나도 필요해, 안경.”
책을 2m 밖에서 볼 것도 아닌데 눈도 좋은 애가 안경을 왜 사냐고.
그레이의 회색 눈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주인이 냉큼 끼어들었다.
“공자님께서도 안경을 구매하시려고요, 그러면 이쪽의…….”
“아니. 솔레아가 고를 것이다.”
“내가?”
“응. 네가.”
눈을 접은 그가 웃음기를 함빡 머금은 시선으로 날 곧게 바라봤다.
“어, 응. 그래. 음…….”
그레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진열장 안의 안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너는 인상이 좀 스산하니까 테가 동그란 안경을 써 볼까?”
“그래. 네가 골라 줘.”
나는 렌즈에 금색의 얇은 테가 동그랗게 둘러진 안경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숱 많은 짙은 적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 그레이는 자신만만한 낯으로 곧바로 안경을 받아 들고 제 얼굴에 썼다.
날카로운 눈매가 안경알 뒤로 한 꺼풀 가려지자 묘하게 금욕적인 분위기가 철철 흘러넘쳤다.
“어우, 안 되겠다. 벗어, 벗어. 안 돼. 큰일 나.”
두 손을 들어 안경을 벗기려 들자 그레이가 안경을 붙잡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왜!”
“너 지금 얼굴만 보면 청소년 관람 불가야! 너 아주 큰일 나게 생겼어! 길거리를 걸어만 다녀도 풍기 문란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방금 전엔 네가 나보고 인상이 스산하니까 이게 잘 어울릴 거라며!”
“나도 그럴 줄 알았지!”
하여간 미친 이목구비. 도를 지나치게 날뛰네.
“빨리 벗어!”
결국 후원에서 장난칠 때처럼 그레이의 팔뚝을 철썩철썩 소리가 나게 때려 버렸다.
그레이는 소리 내어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꾹 눌러 뒤로 밀어 냈다.
“지금 그레이가 너무 잘생겨서 레아가 이러는구나.”
“잘생긴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안 잘생겼다곤 안 하는 거 봐. 그레이도 솔레아 너무 좋아!”
“이, 미친놈이!”
몇 분 전의 서늘한 분위기는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그레이는 평소처럼 웃고 장난치며 내 옆구리를 잡아 몸을 들어 올렸다.
“우리 레아가 다 커서 오빠 안경도 사 주네!”
“누가 보면 한 열 살 차이 나는 줄 알겠네. 내려놔라.”
“레아가 매일 침대에만 누워 있어서 그레이는 너무 슬펐는걸!”
들고 있는 가방을 휘둘러 그레이의 정수리를 내려찍자 그가 곧장 나를 내려놓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야……. 너는 그렇다고 머리를 후려치냐. 그 안에 돈이 아니라 돌 든 거 아니냐?”
“사장님. 저 안경까지 계산할게요. 방금 험하게 장난쳐서 흠집이 났을지도 모르니까요.”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서서 구경하던 안경점 주인은 내 말에 파드득 놀라 대답했다.
“아, 아! 예, 안경. 네, 두 개. 예.”
값을 치르고 나온 뒤 다시 마차에 올라타려는 그레이의 팔뚝을 잡았다.
“왜?”
“안경은 얼결에 산 거고 진짜 필요한 거 사러 가야지. 검 사러 가자.”
“검? 내 검?”
회색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였다.
“뭘 그렇게 놀라. 오늘 너랑 놀러 나왔잖아. 네 것도 사야지. 마차 타고 다니면 구경 제대로 못 하니까 걸어서 가자.”
“정말? 진짜로 내 거 사 주는 거야?”
“아, 왜 이래. 진짜.”
내 옆에 바짝 따라붙은 그레이가 상기된 얼굴로 몇 번이나 되물었다.
“왜 검 사 주는 거야? 검 사 줄 생각을 어떻게 했어? 검? 검으로 장사해야 돼서 시험해 보는 거 아니고 진짜 나한테 필요한 것 같아서 사 주는 거야? 시장 조사 그런 거 아니고 진짜 그냥 사 줘? 왜, ……왜?”
“왜 그래, 진짜! 누가 보면 생전 처음 뭐 사 준 줄 알…….”
“처음인데.”
“……그러네.”
그레이는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었는지 내내 벙싯벙싯 웃으며 걸어갔다.
나보다 앞서가다가도 내가 너무 뒤처지면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왔다가, 마음이 급하다는 듯 다시 빨리 가기를 반복하면서 정신없이 걸었다.
“아는 대장간 있어? 아니면 무기를 파는 상점에 가야 하나?”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던 중 가게 앞까지 나와 있는 노파와 눈이 마주쳤다.
노파는 가만히 나를 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교 DNA 때문에 무심코 나도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노파는 그사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는지 가게 문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대충 봐도 연식이 꽤 돼 보이는 가게였다. 간판에 도끼와 검이 그려진 걸로 봐선 무기를 파는 곳 같기는 한데…….
나는 앞서 걸어가고 있던 그레이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레이. 저기 들어가 볼래?”
“어디? 저기? ……나한테 돈 쓰기가 그렇게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원래 좀 허름한 데에 좋은 물건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마음에 드는 거 없으면 구경만 하고 나오면 되지.”
내 말에 수긍한 그레이와 함께 노파의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마자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를 감쌌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뜨개질을 하고 있던 노파가 주름이 진 눈을 겨우 뜨곤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검을 사러 왔는데요. 여기 제 오빠가 쓸 검이요.”
노파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사장님. 지금 검 살 수 있어요? 여기 있는 물건들 중에 고르면 돼요?”
그레이가 목소리를 높여 묻자 노파는 아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다시 뜨개질에 몰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몸 전체를 앞뒤로 흔드는 건지도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미약한 몸짓이었다.
결국 그레이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솔레아, 그냥 가자.”
안내도 제대로 해 주지 않는 노파에게 그레이는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계세요.”
그가 내 팔을 잡은 채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노파가 손에 쥐고 있던 뜨개바늘로 벽에 걸린 검 한 자루를 가리켰다.
“네? 저거요?”
짧은 신호를 놓칠세라 내가 얼른 대답하며 가까이 다가갔지만 노파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결국 내가 직접 벽에 걸린 검을 빼내자 그제야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온 노파가 내게서 검을 가져가 그레이에게 건넸다.
그러곤 입을 벌려 천천히 말했다.
“……착한 오빠구나. 앞으로 동생 잃어버리면 안 된다.”
영문 모를 소리에 그레이의 이맛살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노파는 어떻게든 그레이의 손을 잡아 검을 쥐여 주었다.
그레이에게서 돌아선 노파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너는 좋은 걸 가지고 있으니까 이번엔 오빠한테 양보하자. 알았지?”
노파는 내 손을 잡아 손등을 툭툭 두어 번 두드리곤 옆구리에 달려 있는 작은 사이즈의 마력 파리채 근처에 내 손을 내려 두었다.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응?”
그때였다.
갑자기 가게 안쪽의 문이 열리며 갈색 머리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아이고! 손님 오셨구나! 엄마! 안에 들어가서 쉬시라니까. 그리고 손님 오시면 알려 달라 했잖아요, 내가 못 살아! 아유, 죄송해요. 언제 오셨어요? 물건은 보셨어요?”
멍하던 정신이 넉살 좋게 말을 걸어오는 여자 덕분에 돌아왔다.
정령들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주인, 주인!’
‘저 할머니 우리가 보이나 봐!’
‘주인! 할머니랑 자꾸 눈 마주쳐!’
정령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노파를 보자 그녀는 언제 일어섰냐는 듯 다시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중이었다.
노파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맞추곤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윙크했다.
……뭐야, 저 할머니? 진짜 뭐가 보이나?
“우리 엄마가 요새 좀 오락가락하셔서요. 죄송해요. 놀라셨죠?”
“아닙니다. 정겹고 좋았는데요, 뭐.”
그레이가 씩 웃으며 검을 내밀었다.
“이 검을 건네주시더라고요.”
노파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건 아주 좋은 검이야! 아무나 못 써! 용 뼈로 만든 건데!”
“아이고, 우리 엄마 또 이러네! 용이 어디 있어요!”
“용이 왜 없어! 있지! 있다니까! 내가 봤어!”
“엄마! 손님들 계신데 왜 그래!”
사장처럼 보이는 여자가 그레이에게 사과하며 검을 다시 받아 들려고 하자 노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뺏지 마! 저 오빠 거야! 동생 손 잡고 다니는데 얼마나 기특해! 요즘 세상에 그런 오빠가 어디 있어! 저 무섭게 생긴 오빠한테 줘!”
“이분은 손님이시라니까!”
노파의 불같은 음성이 이번엔 나를 향했다.
“왜 이렇게 말랐어! 밥을 안 먹고 다니는 거야?! 그래 가지고 어느 세월에 용 타고 다닐래!”
“네?”
용이 무슨 자가용도 아니고 어떻게 용을 타고 다녀요.
아까의 그 기묘한 느낌은 내 착각이었나 보다. 그냥 노망난 할머니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곤 몸을 틀어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저희가 살게요.”
“아이고……. 죄송해요. 이렇게 강매하는 일은 여태 한 번도 없었는데. 그건 그냥 가져가세요.”
사장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 검이 오래된 거긴 해도 날도 안 빠졌고 잘 들어요. 그동안 팔려고 해도 엄마가 자꾸 숨기시는 바람에 못 팔았는데, 오늘은 진짜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값 치를게요!”
그레이가 급하게 제 주머니를 뒤지길래 나도 얼른 가방을 열었다.
“저희 돈 있어요!”
“아닙니다! 베, 베르고가의 자제분들 맞으시죠? ……누추한 곳에 와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인데 저희 어머니한테 이상한 소리까지 듣게 해 드려서 너무 죄송해요. 그 검은 그냥 드릴게요.”
사장은 정말 미안했는지 계속 두 손을 모으며 허리를 숙였다.
계속 돈을 받지 않겠다며 거절하는 통에 결국 그냥 가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안에서 사장과 노파가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진짜 왜 그래!”
“이보슈, 사장. 아까 그 언니 봤어? 반짝반짝 빛이 나던데.”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귀족들한테 반말하면 어떻게 해!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랬어!”
“아니야! 진짜 반짝반짝 작은 별들이 날아다녔어! 내가 봤어!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도 다 알아! 할머니도 예전엔 용을 봤거든!”
“아우, 엄마! 좀! 가만히 계세요!”
기가 빨린 듯 그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그만 가자, 솔레아.”
발을 떼려던 그때 가게 문이 다시 열리고 노파가 나왔다.
그녀는 내 손을 잡더니 구깃구깃 구겨진 작은 종이 뭉텅이를 쥐여 주었다.
“가면서 사탕 먹어. 오빠한테만 선물 줘서 미안하다, 아가.”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할머니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따님이 걱정하세요.”
“아니야. 저 사장은 자꾸 소리만 지르잖아.”
투덜거리면서도 노파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이와 눈이 마주친 난 그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솔레아. 이 공짜 검으로 퉁치려는 건 아니겠지? 나 맛있는 거 사 줘.”
“알았어. 뭐 먹을 거야?”
앞으로 걷던 중 손에 든 종이 뭉치를 무심코 펼쳤다.
찢어진 지도 조각인 듯했고, 가장자리엔 작은 글씨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아무스.”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나를 내려다보며 묻는 그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종이를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