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언상불일치 티온은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잘 다녀와서 다행이야.”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티온은 묵묵히 다시 허리를 편 후 공작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벙찐 채 그가 올라간 계단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레이.”
“왜?”
“저 사람 왜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네가 아가씨니까 그렇지. 혹시 티온 형한테도 레아라고 불리고 싶었어? 그럼 내가 가서 말하고 올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하곤 티온에게 달려가려는 그레이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게 아니라! 너는 장난스럽게 아가씨, 아가씨, 하고 불렀는데 저 사람은……. 아, 뭔가 이상하잖아.”
벽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고.
그레이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며 싱긋 웃었다.
“형이 숫기가 없어서 그래.”
“두 번만 더 숫기 없었다간 사람 죽이겠네.”
“사람 죽이고 온 사람한테 무슨 그런 말을 하니, 너는.”
그건 그러네.
내 꿀꿀한 기분을 털어 주고 싶었는지 그레이는 내 두 어깨를 잡아 몸을 앞으로 밀었다.
“자, 놀러 갑시다. 숫기 없는 오빠 빼고, 싹수없는 오빠도 빼고, 제일 친한 오빠랑 둘이서 놀러 갑시다∼”
그레이가 떠민 대로 계단 위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묘하게 기분이 꿀꿀했다.
물론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생각도 안 했지만 티온이 나를 보고 저렇게까지 인상을 찌푸릴 이유가 있나?
혹시 솔레아랑 사이가 안 좋았던 건가.
방으로 올라가 앤에게 티온에 대해 물어봤지만 그녀 역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티온 도련님이랑 아가씨요? 글쎄요, 원래도 말이 많진 않으셨지만 그래도 아가씨에겐 항상 친절하셨는데요.”
친절? 가족 사이에 친절이라는 말을 하나. 생판 남도 아닌데.
꺼림칙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작에게 외출하고 오겠다고 말하러 간 그레이를 기다리며 정원을 거닐다가 아직 해산하지 않은 티온의 사병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그들은 조금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다가 한 박자 늦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사일린이라고 합니다.”
“맬다입니다.”
“론입니다.”
머리를 까딱 숙인 그들은 내가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대로 나를 지나가려는 듯했다.
“물어볼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늘 내게 우호적이었던 저택 내의 기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시큰둥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적대감이 분명하게 들어차 있었다.
“전쟁터에서 티온은 어땠나요? 집 얘길 하던가요?”
자신을 사일린이라고 소개한 짙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워낙 말씀이 없으신 분이라.”
“네, 알겠습니다.”
말하는 꼴을 보아 하니 뭔가 있었어도 내게 얘기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 맬다가 입을 열었다.
“전쟁터에서의 대장님은 집에서와는 확연히 다르셨죠, 당연히.”
나는 고개를 틀어 맬다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가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둘째 도련님은 영 샌님이시고, 셋째 도련님은 아가씨를 지켜야 한다며 집에 남으셨으니 혼자서 군대를 이끄셔야 했잖아요?”
론이 맬다의 어깨를 툭 치며 말렸지만 맬다는 오히려 말리는 론의 손을 쳐 내곤 계속해서 말했다.
“대단하신 아가씨께선 모르셨겠지만, 아. 계속 누워 계시느라 더더욱 모르셨겠지만요. 저희는 다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터를 구르다 왔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여기랑은 다르죠.”
“왜 말을 그따위로 하는 거지?”
날카로워진 내 목소리에도 맬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위대하신 차기 공작님께서 누워 계시는 동안, 저희는 나라를 지켰잖습니까. 그리고 대장님은 뭐, 계속 저렇게 밖으로 나도시겠죠. 전쟁이 끝나자마자 아가씨께서 이렇게 멀쩡해지셨으니까.”
“내 질문을 똑바로 이해 못 했나 봐. 난 ‘왜’ 나한테 말을 그따위로 하냐 물었어. 네 말대로라면 난 차기 공작인데, 무슨 배짱이야?”
맬다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누구는 근 1년 가까이를 전쟁터에서 개죽 같은 밥 먹으면서 새우잠 자고, 가끔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수하도 못 알아보고, 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칼 휘두르면서 싸우다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짜증 날 만한 거 아닙니까? 대장님이 전쟁터에서 적군이랑 아군 구별도 못 하실 정도로 힘들어한 걸 아시기나 합니까?”
사일린이 맬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해, 맬다.”
그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랫사람의 실수를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죠. 차기 공작님.”
사일린의 말끝에선 미미한 비웃음마저 느껴졌다.
더 이상 그들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가 묻는다고 똑바로 답할 놈들 같지도 않았고.
나는 담담히 그들에게 말했다.
“정말 티온을 위한다면 그 주둥아리를 닥치는 게 좋겠어. 내가 공작이 된 후에 티온 모가지라도 치면 어쩌려고.”
“이……!”
맬다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론이 필사적으로 그의 몸을 막아 세웠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이제 막 돌아와서. 그, 건강해지셔서 다행입니다.”
나는 그대로 몸을 틀어 정문으로 향했다.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나왔는지 진한 남색 코트를 걸친 그레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나갔다면서 어디 있었어? 쓰러진 줄 알았잖아.”
힐긋 발끝을 내려다보니 그레이의 신발에 흙이 묻어 있었다.
“나 찾았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빨리 마차에 타. 시간 없어. 시장 문 닫기 전에 잠깐 구경이라도 하고 와야지. 야, 나 나오다가 헤이먼 만나서 자랑했어. 너랑 놀러 나간다고.”
아마도 내가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오는 동안 엇갈린 모양이었다.
신발에 흙이 잔뜩 묻을 정도로 찾아다닌 주제에 그레이는 내게 면박 한마디 하지 않았다.
헤이먼을 약 올린 게 어지간히 신났는지 히죽거리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레이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는 쉴 새 없이 내게 떠들었다.
“어디부터 갈까? 우리 같이 시장에 가는 거 처음이잖아. 아, 한 달만 있으면 축젠데. 그날 나올 걸 그랬나. 아냐, 그때 또 나오면 되지. 너 좋아하는 서점 갈까? ……나랑 있을 때 아니면 네가 언제 또 그런 야한 책을 직접 사겠냐. 아니면 간식 먹으러 갈래? 우리 주방장만 못하지만 엄청 맛있는 샌드위치 파는 곳 있거든. 솔레아? 솔? 레? 아? 듣고 있냐?”
“안경…….”
“뭐?”
“안경점부터 가자.”
“너 눈 안 좋아? 내 잘생긴 얼굴 안 보여? 이거 뭐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린 그레이가 내 눈앞에서 짤짤 흔들었다.
“아, 보여! 마차에서 싸우고 싶어?”
그레이의 가운뎃손가락을 잡아 뒤로 꺾자 그가 반대쪽 손으로 내 손목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우리 동생 어디 아픈가 했지.”
생글생글 웃으며 얼굴을 들이민 그레이는 또 내 머리통을 붙잡고 이마 윗부분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레이는 솔레아 아프면 슬픔!”
“……솔레아는 그레이가 좀 아팠으면 좋겠음…….”
“힝! 그레이 화남!”
전혀 화난 것 같지 않은 얼굴로 그레이는 마부와 소통하는 작은 창을 열고 말했다.
“코린 안경점으로 가 줘.”
“예, 도련님.”
얼마 가지 않아 안경점에 도착하자 그레이가 내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며 안경점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인지 청소 중이던 주인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나와 그레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 어! 그.”
“네, 베르고 남매입니다.”
그레이가 태연하게 싱긋 웃으며 인사하자 주인은 빗자루를 놓쳤다가 냉큼 다시 주워 들었다.
“잠,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한 몸짓으로 주인이 가게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자 그레이는 유리 진열장에 한쪽 팔꿈치를 올려 비스듬히 기대선 후 내게 물었다.
“그레이는 눈 좋은데. 누구 안경 사려고? 아버지? 아니면 또 라트엘?”
“또 라트엘? 내가 라트엘 시계 사 준 거 알고 있었어?”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우리 아가씨 얘긴 다 알지. 라트엘이 아버지한테 자랑하고, 아버지는 우리한테 자랑하고. 어우, 아주 그냥 질투 나서 그레이 속 타 죽을 뻔했어.”
“질투는.”
픽 웃으며 그레이에게서 몸을 돌려 진열장 속 안경들을 유심히 보다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리고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 거리감 느껴지잖아.”
평소 같으면 분명히 ‘그레이 감동해써!’라든지, ‘그레이 너무 좋아!’ 같은 말을 퍼부었을 놈이 조용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레이는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앞으로 흘러내린 적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회색 눈동자가 지그시 나를 응시하며 곱게 접혔다.
“알았어, 솔레아.”
“어……. 응.”
잠깐의 침묵 후 큰 몸을 재빠르게 움직여 내게 다가온 그레이가 내 얼굴을 붙잡고 이마에 다시 뽀뽀해 댔다.
“움뽜쫙!”
“이상한 소리 내면서 뽀뽀하지 마! 미친놈아!”
“그럼 소리 안 내면서 할게!”
“저리 가라고!”
가슴을 퍽퍽 쳐 내자 그레이가 소리 내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진짜 누구 안경을 사려고 그러는 거야? 우리 솔레아가?”
“……내 생각엔 티온이 눈이 안 좋은 거 같아.”
“설마 너 못 알아봤다고 돌려서 비꼬는 거야?”
“아냐, 그게 아니라 진짜로 눈이 안 좋은 거 같아서 그래. 내 감이지만.”
앤에게 부탁해서 서가의 온갖 책들을 방으로 가져오도록 했을 때, 그중 베르고 일가에 대한 책도 있었다.
디에르고 공작이 참전한 전투와 그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문을 읽다가 우연히 그 사이에 있는 가족들의 오래된 초상화를 보게 되었다.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티온.
세 사람이 서 있는 그림 속에서 지금보다 더 마르고 전투적인 눈빛이었던 티온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게 단순히 길이 남겨질 초상화를 위해 인상이 조금 온순해 보이려고 안경을 쓴 거라면 내 추측이 틀린 거겠지만…….
나를 가까이에서 보고도 ‘아가씨?’ 하며 묻는 것도 이상했고, 맬다가 한 말들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눈이 안 좋아서 수하를 못 알아보고, 전쟁터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적군이랑 아군을 잘 구분하지 못하니까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매번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간 거고.
그레이 말대로 티온이 숫기 없는 성격이라면 어렸을 때 안경을 쓰다가 어떤 이유로 잃어버렸겠지.
잃어버렸고, 차마 다시 사 달란 말을 못 했을 것이다.
잠시 후, 안에서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정갈히 빗질한 주인이 멀끔해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어떤 분이 쓰실 건가요?”
“아, 제 첫째 오빠가 쓸 건데 눈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일단 너무 도수가 높은 안경은 말고 적당한 걸로요. 나중에 안 맞으면 교환하러 올게요.”
“예, 예. 공녀님이시라면 신원도 확실하시고, 제가 잊을 리도 없으니 교환됩니다.”
큰 손님이 와서 기뻤는지 주인은 가격이 비싼 안경들을 이것저것 추천해 댔다.
“이걸로 할게요.”
들고 다니던 작은 가방에서 돈을 꺼내는 순간 내내 조용하던 그레이가 나를 불렀다.
“솔레아.”
“응?”
“나도 사 줘.”
“……뭘?”
“안경. 나도 사 달라고.”
눈도 입도 웃고 있는데 이상하게 싸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