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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59/192)

59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베르고 일가는 짧은 티타임을 가지며 신문에 실린 기사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형이 이제야 오는군.”

“솔레아 망토 선물 타이밍 맞추다 보니까 늦은 거잖아, 이 눈치도 없는 분홍 머리 형님아.”

“그레이. 애비 앞에서 무슨 말버릇이니.”

“아니, 아버지! 헤이먼이 치사하게 점심 식사 때마다 솔레아랑 같이 먹겠다고 데리고 가서 오후까지 같이 있잖아요. 약속한 지 3주나 지났는데 솔레아는 나랑 나들이 한 번을 안 갔어!”

“솔레아가 너랑 나가기 싫은가 보지.”

비웃는 헤이먼의 말에 그레이가 손을 아래로 내려 조용히 검집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입꼬리를 늘려 웃은 솔레아는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검집을 잡고 있는 그레이의 손을 떼 냈다. 그러곤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친 오빠야. 같이 놀러 안 갔다고 형을 담그려고 하니.”

“네가 맨날 쟤랑만 붙어 있고, 나랑은 바쁘다면서 안 나가잖아. 약속을 왜 안 지켜. 너 그럼 앞으로 점심도 나랑 먹어.”

“왜 그래, 진짜. 유치하게. 오전 운동은 너랑 하잖아!”

“유치? 유우우치? 내가 진짜 한번 유치하게 해 봐?”

“크흠!”

디에르고 공작의 헛기침 소리에 속닥거리며 옥신각신 싸우던 소리가 멎었다.

두 사람이 조용해진 후에야 공작이 입을 열었다.

“티온이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 귀환 파티를 열어야겠구나.”

공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 망토가 솔레아 네가 만들어 보낸 거라고?”

“네, 아버지.”

공작이 손을 뻗어 솔레아의 손을 꾹 움켜잡았다.

“그런데 잠은 좀 자면서 일하지 그러니.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아하하……. 네, 그럴게요.”

충분히 걱정할 만한 몰골이었다. 솔레아의 눈 주위가 퀭하니 어두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분일초가 아까워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매일같이 공부하고 일하고 있었다.

새벽 어스름이 밝아 오자마자 일어난 솔레아는 아침 식사 전까지 앤이 가져다준 신문들을 죄다 읽었다.

매일 판매량을 경신하고 있는 통롤러 얘기가 실리지 않은 신문이 없었고, 오늘 아침 신문엔 티온의 붉은 양모 망토에 대한 반응도 실려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오전 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돈이 옆에서 통롤러 판매량과 매출에 대해 보고했고, 헤이먼과 점심을 먹은 후에는 그의 몸 컨디션이 괜찮은지, 이달론이 뭔가 또 이상한 일을 시키진 않았는지 체크했다.

오후엔 양모 염색 공장에 방문해 생산 라인을 점검하고 자수 직공들을 만나 판매 루트 계획을 세우고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꽉 채우고 나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구분도 못 할 정도로 지친 몸 상태로 아버지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면 저녁 운동 시간이었지만 요즘은 운동하는 대신 저택 내부를 날아다니는 이달론의 검은 벌레들을 때려잡곤 했다.

‘주인! 대단해! 마력 몽둥이 짱이야!’

‘멋있어!’

늦은 밤까지 마력 빠따를 휘두르다가 방으로 돌아와 겨우 씻은 후 일기를 확인하고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었다.

그런 나날이었다.

피곤하던 날들을 회상하는 솔레아에게 공작이 말을 걸어왔다.

“잠을 잘 못 자는 거니?”

디에르고 공작의 다정한 손길이 솔레아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손에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떤 솔레아는 이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아버지. 티온의 파티는 엄청 성대하게 열었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지만 특별한 이유라도 있니?”

솔레아는 자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대답했다.

“양모를 홍보해야 해요.”

“파티에서?”

“아직 양모를 유통할 상단을 잡지 못했어요. 신문에 기사가 나갔으니 발 빠른 이들은 이 자수 양모가 어디 물건인지 찾고 있을 테고 비밀로 한 적이 없으니 그게 베르고의 물건인 걸 곧 알게 되겠죠.”

공작의 안색이 잠깐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상단에 양모 유통을 맡기려 한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런데 조금만 조사하면 베르고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왜 굳이 상단에 맡기려는 거냐.”

솔레아의 얼굴 위로 미소가 은근하게 떠올랐다.

“베르고의 생산력은 믿지 못해도, 유통 상단이 이름난 곳이면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마치 백화점에 입점한 브랜드는 처음 들어 본 곳이라도 테스트해 보는 것처럼.

자수 양모의 주 고객층인 귀족들을 위한 결정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덮어 두면 모른 척 구매해 주겠지.

화려한 자수가 수놓인 질 좋은 양모를 걸치는 건 누가 봐도 재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니까.

그러다 자수 양모가 유행으로 완전히 자리 잡고 나면 양모를 제작하는 곳이 베르고라고 드러내고 광고해도 괜찮아.

그땐, 누구도 우릴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어떻게든 해낼게요.”

“아니, 그럼 나랑은 언제 놀러 갈 건데.”

“다음에 가자. 여유가 좀 생기면.”

“솔레아 밉다.”

그레이가 앙큼하게 입술을 삐죽였지만 날카로운 인상 탓에 먹이를 앞에 두고 장난치는 맹수처럼 보일 뿐이었다.

괜히 그레이의 얼굴에 놀란 하녀가 그릇을 하나 깨 먹는 것으로 그날의 티타임은 끝나 버렸다.

북부 국경 지대에서부터 내려오는 티온의 군대가 마치 가을을 데려오는 듯 점점 날이 쌀쌀해졌다.

“빨간색 양모 이쪽으로 들고 오세요! 아, 그 자리는 아니에요! 자수가 놓인 테이블보 어디 있지?”

파티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솔레아의 몸 상태가 걱정됐는지 그레이가 졸졸 따라다녔다.

“야! 네가 직접 안 해도 되잖아!”

“사람들 몰려올 텐데 눈에 잘 띄도록 제일 좋은 자리에 물건들 딱딱 맞춰서 전시하고 싶단 말이야. 네가 보기엔 어때? 괜찮아?”

“어, 예뻐. 그런데 솔레아. 파티는 3일 뒤야. 벌써부터 이렇게 안 해도 되잖아. 너 좀 쉬라니까.”

“티온은? 오늘 점심쯤에 도착하는 거야?”

“하…… 내 말은 듣지도 않네. 응. 아마 그럴 거야. 너 그럼 실내복 입고 형한테 인사할 거야?”

솔레아는 입고 있는 품 넓은 편안한 드레스를 내려다보다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뭐, 어때. 별로야?”

“……별로다, 멍청아. 쉬라고 해도 말을 들어 먹지도 않고. 눈 밑은 시커메져선. 너 운동 안 했으면 벌써 쓰러졌어.”

“당연하지. 다 네 덕이야.”

들뜬 솔레아의 말투에 그레이의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었다.

“……아니, 뭐. 그거는, 네가 노력을 했으니까……. 난 그냥, 도와만 준 거고. 오늘 컨디션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나랑 별 보러…….”

“아! 아저씨! 그거 그쪽 말고 이쪽으로요!”

솔레아가 다시 인부들에게 지시하며 뛰쳐나가자 혼자 남은 그레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안 듣네. 저런 걸 동생이라고. 하. ……야! 그러다 넘어진다고!”

후다닥 뛰어가던 솔레아가 휙 돌아봤다.

“오늘 티온 맞이하고, 오후에 나가자, 그레이! 우리 둘이!”

짜증스럽게 굳어 있던 그레이의 얼굴이 그제야 확 펴졌다.

“야! 진짜야! 너 약속 지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레이는 제 방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나가자고 하면 뭐 어쩌자는 거야. 갈 곳이 어디 있다고. 하, 참 내. 재회의 언덕은 벌써 가 봤고, 오늘은 시장도 일찍 닫을 텐데. 아, 어딜 가야 돼. 진짜 사람 곤란하게 하네. 옷은 뭘 입으라고. 하여간 아주 지 맘대로야.”

투덜거리면서도 그레이의 얼굴에선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 * *

국법상 황궁에 먼저 들러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티온은 쉬지도 않고 말을 달려 베르고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나는 저택의 입구에 서서 멀찍이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구먼.

그래도 명색이 전쟁에서 공을 쌓은 첫째 오빠의 귀환이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서 기다리던 중 옆의 앤에게 물었다.

“앤. 셋 중에서 티온이 제일 인기가 좋은가 봐?”

“……예. 피 끓는 청춘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시죠.”

“그럼 피 안 끓는 사람들한테는?”

“아하하. 하하. 첫째 공자님은 워낙 과묵하시고, 인상도…….”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않고서 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저래. 티온 인상이 나빠 봐야 뭐, 그레이만 하겠어.

게다가 디에르고 공작의 젊은 시절 초상화를 보니 그 역시 한 성깔 했을 거 같은 관상이었다.

나는 속으로 픽 웃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문에 실린 컬러 사진들은 이틀이 지나니 모두 흑백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붉은 망토의 착샷을 확인한 후 만족스럽게 신문을 덮었기 때문에 지금은 티온의 생김새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워낙 바빴어야지. 요즘은 아까 먹은 식사 메뉴도 기억이 안 난다고.

그리고 설마, 아무리 무섭대도 전성기 디에르고 공작보다 무섭게 생겼겠어.

무섭게 생긴 얼굴은 이제 익숙하다. 거울만 봐도 솔레아 얼굴 얼마나 찐하게 생겼는데.

조금은 안일한 마음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윽고 말발굽 소리가 드넓은 저택 밖에서 들려왔다.

흑마를 탄 남자가 무리의 맨 앞에서 기사단 행렬을 이끌며 차츰차츰 저택에 가까워져 왔다.

‘……잘못 생각했다.’

어두운 갈색 피부에 은발이라기엔 잿빛에 더 가까운 짧은 머리카락.

온갖 흉터가 가득한 얼굴과 일그러진 은색 갑옷 위로 바람에 휘날리는 새빨간 핏빛의 망토. 거기에 화려하게 수놓인 금색 자수가 위압감을 더했다.

‘……사람들이 지른 게 정말 환호성이었을까? 머, 멋있긴 한데, 말이 안 나올 정도의 압박감이잖아.’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선 티온의 기사단 행렬이 넓은 정원을 가득 채웠다.

디에르고 공작은 환한 미소로 티온을 맞았다.

“왔구나, 티온. 고생 많았다.”

“……예, 아버지.”

흑마에서 내린 티온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작에게 절했다.

“일어나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티온이 긴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오다 말고 멈춰 섰다.

핏방울이 맺힌 것 같은 적색 눈동자가 저택 입구에 서 있는 내게로 향했다.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서부터 눈 밑으로 이어지는 긴 흉터가 그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좀 다른 이유로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아니야. 일단 그래도 오빠니까 반갑다고 해야지.

인상이 무섭지, 인성이 별로인 건 아니니까.

생긴 걸로 사람 판단하면 안 돼. 차분하게 웃자.

긴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내 소중한 광고 모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티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야. 왜 웃는 얼굴에 정색을 해?

저택 입구 계단을 걸어 올라온 티온은 아버지와 포옹을 하고, 헤이먼과 그레이와도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그러곤 또다시 얼굴을 찡그린 채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 나와 머리 두 개 정도는 키 차이가 났다.

몸도 어찌나 큰지 티온 뒤에 숨으면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일 것 같았다.

티온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대로 지나쳤다.

“티온.”

내 목소리를 들은 티온이 다시 뒤돌았다.

짙은 눈썹이 한껏 구겨져 있었다. 그의 입술이 열리자 흉터가 조금씩 일그러지며 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아가씨?”

“어?”

어, 예. 내가 아가씨인데.

저기요. 언어와 인상을 일치시켜 주세요.

언상불일치가 너무 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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