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92)

58화

열린 창문도 없고, 지금 이 공간은 마력으로 차단되어 있는데 대체 어디서 벌레가 나타난 거지?

밤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창가로 비쳐 들어오는 어스름한 달빛과 주황빛 램프 불로는 작은 벌레의 위치를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정령들까지 난리였다.

‘징그러워!’

‘이상한 소리!’

‘더러워! 싫어!’

‘꺄아악!’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정령들 때문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비명 사이로 무언가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솔레아가 몸을 뒤로 돌리자 돈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돈!”

그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윙, 하는 검은 벌레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미친, 좀 조용히 하고 불! 불 좀 켜 봐!”

‘하지만 징그러워!’

“썅, 사람부터 살려야…….”

“솔레아.”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헤이먼이 잔잔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솔레아는 손을 뻗은 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등골이 싸늘해지는 기분에 저절로 몸이 오그라들었다.

마치 바로 뒤에 이달론이 서 있는 것처럼 께름칙하고 서늘한 감각이 뒷덜미를 휘감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 헤이먼의 것이었다.

어쩐지 서늘하면서도 다정히 온기가 서려 있던.

“레아, ……이제 나를 안 믿는 거야? 왜……?”

솔레아는 천천히 뒤돌았다.

돈의 몸에서 전에 복도에서 맡았던 그 악취가 서서히 풍기기 시작했다.

“헤이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말 들어. 감정에 휩쓸리지 마.”

헤이먼의 커다란 녹색 눈동자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혔다가 금세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제 네가 날 안 믿잖아. 내가, 내가…… 이런 괴물 같은 놈이라 너도 나를 더 이상 못 믿는 거잖아.”

한번 흐른 눈물은 그치질 않고 계속 아래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낙루였다.

“너 믿어.”

짧은 대답을 한 후 솔레아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러니까 살리려고 이렇게 애를 쓰지.”

“뭐?”

헤이먼이 되묻기 무섭게 솔레아는 입술을 열어 작게 중얼거렸다.

마법의 주문 같진 않았다. 마력의 파동 역시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들이 발끝으로 모조리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명하게 헤이먼을 괴롭혔다.

순식간에 힘이 빠지고 천장의 무늬들이 그대로 뒤엉켜 아래로 무너지는 것 같은 괴상한 감각이었다.

마치 마법사 이달론이 제게 마력을 강제로 집어넣을 때와 비슷했다.

이윽고 헤이먼 역시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불안하게 빛나며 헤이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이 사라지고, 주변은 조용해졌지만 벌레 소리는 여전했다.

기절한 헤이먼의 곁으로 다가간 솔레아는 눈치를 살피다 그의 뺨을 아까보다 조금 더 세게 후려쳤다.

짝!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지만 헤이먼은 미동도 없었다. 애꿎은 뺨만 부어올랐다.

“야! 내가 잠깐 기절할 만큼만 마력 빼 놓으랬잖아!”

‘기절시켰는데 왜 그래!’

“헤이먼은 혼자서는 마력 재생이 안 돼서 이달론 불러야 된단 말이야. 적당히 뺏어야지!”

‘그래도 이 분홍 머리가 눈을 이상하게 떴잖아!’

“얘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냐. 잠깐 눈이 돌아갔나 보지.”

‘하지만 진짜 눈이 돌아간 거랑, 관용어구로 눈이 돌아간 거랑은 다른데. 이 분홍 머리는 진짜로 눈이 돌아갔던데.’

“나도 알아. 그래도……. 방금은 감정 조절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았어.”

가만히 헤이먼을 내려다보던 솔레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입을 열었다.

“얘 그동안 다쳤을 때 다른 의술사한테 치료는 받았을 거 아냐. 그건 무슨 원리야?”

‘몸 안에 마력을 넣는 게 아니라, 몸을 마력으로 둘러싸서 기력만 보충하는 거야.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분홍 머리처럼 마력이 없어도!’

‘그래. 하지만 주인처럼 마력 자체를 안 받아들이는 몸한테는 못 해.’

“그럼 그렇게 해 줘. 이달론이 정기적으로 집에 찾아오는 날까진 아직 한참 남았고, 그 전에 부르면 괜히 의심만 살 테니까.”

‘우우우. 분홍 머리 싫은데.’

“나 지금 바르고 곱고 예쁘게 부탁했잖아, 얘들아.”

솔레아의 목소리가 말과는 달리 음산하게 퍼졌다.

무섭다며 정령들이 중얼거리자 솔레아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말했다.

“빠르게 정리되면 내 방 가서 같이 일기장 읽자.”

정령들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알았어, 주인!’

‘좋아! 일기장 좋아!’

“그래. 그리고 이제 불 좀 환하게 켜 봐. 공간 차단 확실하게 하고.”

‘왜? 불 왜 켜야 돼?’

‘왜, 왜?’

“벌레 새끼 잡아야지.”

‘불! 불 켜래!’

‘불 켜자!’

‘주인이 벌레 잡는대! 그럼 우리가 파리채 줄게!’

정령들이 힘을 모아 허공에서 마력으로 빚은 커다란 파리채를 만들어 냈다.

어쩐지 파리채라기보다는 야구 배트에 가까운 모양과 두께였다.

은근히 묵직한 무게감에 솔레아는 팔 근육과 어깨 근육을 한번 푼 뒤에 그것을 집어 들었다.

“얘들아, 공간 차단 확실히 했어?”

“응!”

확실히 공간을 차단했는지 정령들은 제 모습을 보이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불을 켜 환해진 거실의 정경과 정령들의 천연 스파클링 트윙클 반짝임 덕분에 시커먼 벌레들은 더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두 손으로 마력 파리채를 쥔 솔레아가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야구 배트를 쥔 양 있는 힘껏 파리채를 휘둘렀다.

‘끽!’

이상한 소리와 함께 벌레 한 마리를 잡았다.

검은 벌레는 마력 빠따에 얻어터지자마자 공중에서 분해되듯 사라졌다.

“이거 뭐 하는 벌레인지 알아?”

“마력 빨아먹는 벌레!”

“마력 빨아먹는 벌레가 왜 여기 있어? 허윽! 이거 설마 헤이먼이 부른 거야? 으억차!”

기합과 함께 마력 빠따를 공중에서 몇 번 더 휘두른 뒤 땀을 닦으며 묻자 정령들이 딴소리를 해 댔다.

“주인! 많이 강해졌구나! 이제 결혼해도 되겠어!”

“만점짜리 신부야!”

솔레아의 미간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무슨 5060세대 같은 소릴 하고 있어.”

“5060? 나이가 오천육십 살이라는 건가? 우리 아직 그렇게 나이 많지 않은데…….”

“우리 늙어 보이나 봐…….”

오천 살 정도의 꼰대라고 말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대충 의미는 맞아서 솔레아는 입을 다물고 벌레들을 잡는 데 집중했다.

그러던 중 정령 하나가 벌레의 날개를 잡은 채 파르르 떨며 다가왔다.

“주인, 쥬, 쥬잉! 주임! 이거, 잡았, 내가 잡았! 잡아줘! 아아악! 퍼덕거려!”

“지도 퍼덕거리면서.”

솔레아는 픽 웃으며 퍽 소리가 나도록 배트를 가차 없이 휘둘렀다.

‘끽!’

벌레가 거의 죽어 갔을 무렵 코를 찡하게 하는 악취도 거의 사라져 갔다. 솔레아는 정령들에게 다시 질문했다.

“헤이먼이 부른 벌레들이야?”

“에이. 이런 걸 분홍 머리가 어떻게 불러.”

“그럼? 얘네가 왜 갑자기 온 건데?”

“이달론의 벌레들이야.”

“……이달론의 벌레들이 왜 와?”

마력 빠따로 바닥을 짚은 채 짝다리로 서 있던 솔레아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물었다.

“빨리 대답해. 이달론의 벌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정령들은 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 그사이에 솔레아는 거친 숨을 천천히 내쉬며 숨을 골랐다.

마력 빠따에 묻은 검은 안개를 옷소매로 대충 슥슥 닦고는 다시 지팡이마냥 바닥에 짚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령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임시 주인. 일기장에 사채, 어쩌구 적혀 있었는데 혹시 예전에 직접 사채업을 했던 거야?”

이 해맑은 놈을 빠따로 칠 수도 없고.

솔레아가 이마를 짚은 채 다시 물었다.

“이달론의 벌레가 왜 오냐고 지금 세 번째 질문했다. 우리 정령 친구들.”

정령들이 포르르 날아 돈의 몸 위에 앉았다.

그러곤 작은 마력을 모아 그의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얘 마력이 뺏기 좋으니까. 이름이 두 개잖아. 주인, 너처럼.”

“……뭐?”

“이달론의 벌레들은 이름이 두 개인 자들의 마력을 모을 수 있고, 여기엔 이름이 두 개인 사람이 셋이나 있잖아.”

솔레아는 멍하니 거실을 둘러봤다.

노예였던 돈.

실험실에서 살던 헤이먼.

그리고 나.

저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니까 이 벌레들이, 돈의 마력만 뺏으러 온 건 아니라는 거네.”

솔레아의 말에 정령들이 제각기 대답을 꺼냈다.

“지금은 그렇고, 나중엔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주인은 빈 몸이라 빼내 갈 마력이 없어!”

“그래도 빈 몸이니까 써먹을 곳이 많아서 몸째로 데려가려고 온 거 아닐까?”

“무서워!”

“주인! 우리가 뭐라 그랬어! 분홍 머리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어차피 죽을 테니까 우리만 잘 살자고 했잖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벌레 한 마리가 윙― 하며 솔레아의 코앞으로 날아왔다.

솔레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력 빠따를 휘둘러 벌레를 쳐 죽였다.

죽은 벌레가 퍼뜨린 검은 안개가 걷힌 뒤 드러난 솔레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잠잠했다.

“……얘들아. 내가 뭐라고 그랬어. 분홍 머리건, 이 검은 눈이건 내가 다 살린다고 했지.”

“……응, 그랬지.”

“맞아……. 주인이 그랬지.”

정령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헤이먼의 몸을 빛나는 마력으로 감쌌다.

환하게 빛나는 마력은 헤이먼의 몸 위를 껍데기마냥 감싸다가 투명하게 변해 사라졌다.

돈의 몸 위로도 비슷한 마법이 훑고 지나갔다.

“근데 두 사람 어떻게 옮기지?”

“우리가 옮길까?”

“그래, 그럼. 대충 사람 걷는 것처럼 보이게 옮겨 줘. 부탁해.”

그렇게 돈과 헤이먼은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같은 방향의 손과 발이 동시에 앞으로 나가며, 계단에서 넘어질 뻔도 했지만 솔레아가 뒤에서 잡고 밀며 어찌어찌 방 안으로 둘을 집어넣었다.

다음 날 일어난 헤이먼과 돈은 지난밤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돈은 쓰러지기 전 헤이먼이 자신에게 화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고, 헤이먼 역시 돈의 정체를 알아차린 후 말싸움을 하다가 왜인지 알 수 없는 강한 분노에 이성이 잠식된 것까지는 기억했다.

“둘이 풀어.”

“……돈이랑 화해하라는 말이야? 난 그건 싫…….”

“안 그럼 앞으로 호수고 뭐고 나들이 가는 일은 다신 없어. 너랑 밥도 안 먹어.”

“……돈은 지금 방에 있나?”

어젯밤 마력을 대부분 써 버려 비척비척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헤이먼은 그저 이달론이 올 때가 되어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돈의 방으로 찾아갔다.

둘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화를 마치고 나온 헤이먼은 생각보다 덤덤한 표정이었다.

“화해했어.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어떤 눈?”

헤이먼은 어쩐지 쓰라린 뺨을 매만지며 답했다.

“화났잖아, 너.”

“네가 쓸데없이 고집부리니까 화내지.”

“이제 안 그런다니까.”

풀 죽은 목소리로 답한 헤이먼은 지친 몸을 이끌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헤이먼은 이상하게 생긴 물건을 솔레아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타종 시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 한 번 왔다 갔다 하는 게 1초 정도니까 혼자 운동할 땐 이거 써. 그 노…….”

“노?”

“노……력하는 돈의 시간을 뺏지 말라고.”

웃음을 터뜨린 솔레아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거 뭔가 익숙한데?”

가만히 보다 보니 분명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이런 걸 뭐라고 부르더라?

긴 막대를 옆으로 당겼다 놓으니 딱, 딱 소리와 함께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였다.

“고마워. 잘 쓸게.”

박자에 딱딱 맞춰 움직이니 헷갈리진 않겠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초등학교 음악 시간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이거 메트로놈 아니야?”

“메, 뭐?”

“메트로놈! 인마! 오빠, 이 자식아! 이 발명왕 자식! 어유, 이런 걸 만들었어. 으이구! 예뻐 죽겠네!”

솔레아는 메어쩌구를 한 손에 들고 펄쩍펄쩍 뛰더니 헤이먼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쓰다듬었다.

“이거 마력 들어간 거야?”

“아니…… 마력이 없어서 그냥 타종 시계와 같은 원리로 만들었어.”

“그럼 사람 몇 명 쓰면 이런 거 만드는 건 금방이겠네?”

“그렇……겠지. 왜 그래?”

“이거 음악가들한테 팔자. 예술 지원 사업인 것처럼 해서 이미지 쇄신도 하고.”

“뭐?”

솔레아는 머릿속으로 염색 공장의 일정과 메트로놈의 개발 시기, 홍보 방식, 타깃으로 삼을 고객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솔레아는 신난 발걸음으로 제 방으로 걸어갔다.

“레아, 그런데 그건 뭐야?”

“뭐가?”

“허리에 매달린 작은 은색 막대 말이야. 그런 장신구가 있었던가?”

솔레아는 빙긋 웃으며 산뜻하게 답했다.

“파리채야.”

“파, 응?”

동생은 오늘따라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 댔다.

몇 주 뒤, 티온 폰 베르고 공자의 귀환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시민들이 주로 보는 저렴한 신문은 흑백으로 인쇄되었지만 대형 신문사의 신문은 달랐다.

마력으로 코팅된 신문 속에서 티온이 걸치고 있는 짙은 붉은색 망토 위의 화려한 금사가 선명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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