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난리가 난 통에 저녁 식사 후 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짬이 났다.
운동을 하기 위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작은 거실로 내려온 솔레아는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보고 흠칫 놀랐다.
“뭐 해?”
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혼자 운동하시니까 제가 숫자 세 드리려고요.”
“됐어, 누가 보면 어떡해. 괜찮으니까 올라가.”
“그럼 옆에만 있으면 안 될까요?”
솔레아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개수를 세 주는 것도 아니고, 초를 세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옆에 있으려고 해?”
솔레아는 가볍게 질문한 것이지만, 돈에겐 꽤나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왜 옆에 있으려고 해?’
그 말이 돈의 가슴에 쿡 날아와 박혔다.
돈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히 선 채로 소처럼 커다란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왜 아가씨의 옆에 있고 싶을까.
아가씨는 이제 혼자서도 운동 잘하시고, 나 같은 건 필요 없으실 텐데.
그레이 도련님이 운동 시간에 아가씨의 곁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는데.
생각에 잠긴 돈이 한참 말이 없자 솔레아는 됐다며 손을 휘휘 젓고는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라 하인들 대부분 별채로 갔을 거야. 아버지나 오빠들도 피곤해서 잠들었거나 각자 방에서 시간 보내고 있겠지. ……옆에 있어도 되지만 말은 하면 안 돼.”
돈은 그제야 입꼬리를 수줍게 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을 마주 보고 선 솔레아가 두 팔을 앞으로 내밀고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솔레아가 스쿼트를 하자 옆에서 배시시 웃고 있던 돈이 손가락을 접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나 참.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니까.”
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숫자 세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참견하기 좋아하는 정령들이 또 떠들기 시작했다.
‘주인! 쟤 주인 좋아하는 것 같아!’
‘쟤 심장이 간질간질하게 통통 뛰어!’
‘주인은 만점짜리 신랑인 우리 주인이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그리고 사람은 원래 심장이 뛴단다. 이 정령들아.
대답하고 싶었지만 돈이 옆에 있는 탓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다만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헤이먼과 그레이, 솔레아.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매들의 공통점은 인상이 더럽다는 것이었다.
정령들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시 주인 또 화났어…….’
‘우리 주인도 좋은데.’
‘우리 주인 진짜 만점짜리인데.’
“잠만 퍼 자는 놈 뭐가 좋다고.”
얼떨결에 대답하자 흠칫 놀란 돈이 울상을 지으며 솔레아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자, 잠을 줄일까요?”
“응? 아니야. 나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느라 너 잠도 제대로 못 자잖아. 아, 그리고 말 걸지 마. 숫자 헷갈린단 말이야.”
돈은 짧은 머리를 살짝 매만지곤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제 한 개만 더 하시면 스물이에요.”
“역시 옆에서 숫자 세 주니까 편하긴 하네.”
“저, 아가씨……. 왜 많은 사람들 중에 저한테 일을 맡기셨어요?”
“어?”
스쿼트 20개를 한 후 가만히 서 있는 솔레아에게 다가온 돈이 두 손을 모아 꼼지락거리며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람을 고용하실 수도 있었는데 저를, ……저한테 시키신 이유가 있으신지…….”
“네가 편하니까 그렇지.”
주황빛 램프 불빛에 비친 돈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편, 편하세요? 그럼 기댈 만큼은, ……그러니까, 이, 일을 맡길 정도로는 제가 편하신 거예요?”
뉘앙스가 이상하긴 했지만 솔레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돈에게 맡기면 일거수일투족을 다 관리할 수 있으니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을 덜 수 있고, 항상 움츠리고 다니던 탓에 얼굴을 아는 사람도 적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설마 노예가 외국인 마법사로 변장할 거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할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아닐 거라 믿는 틈을 노린 꼼수였다.
그러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편하다기보단 일을 맡기기에 적당했다, 가 알맞았다.
하지만 돈은 솔레아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만 보고도 만족한 듯 열없이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열심히 할게요.”
“……그래.”
“역시 그 노예가 맞구나.”
작은 거실의 입구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헤이먼이 팔짱을 낀 채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돈. 맞지?”
당황한 돈이 고개를 저었지만 헤이먼은 픽 웃으며 그를 무시했다.
“네가 진짜 외국인이었으면 방금 내가 한 말도 못 알아들었어야지.”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헤이먼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뭐라 작게 주문을 외웠다.
‘공간을 차단했어!’
‘여기서 나는 소리는 이제 바깥에 안 들려!’
‘우리도 아까 할걸!’
‘공간 마력을 가진 애는 하녀 방에 가서 같이 책 읽고 있는데!’
‘아! 나도 읽으러 갈걸! 어제 중요한 데서 끊겼는데!’
‘근데 저 분홍 머리는 마력도 얼마 없는 게 낭비하네!’
‘어떡할까, 주인! 머리를 때려서 기억을 잃게 할까?!’
당황한 나머지 좋은 생각이라며 솔레아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정령들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힘 조절 못 하면 머리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어!’
“하지 마!”
마법을 건 후 돈에게 다시 한 걸음씩 다가가던 헤이먼이 신경질적으로 솔레아를 바라봤다.
“내가 돈한테 말 거는 것도 싫어? ……내가 네 오빤데. 나도 네 오빤데.”
말을 하다 말고 헤이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레이는 알고 있는 거지?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아는 사람이 적은 게 나을 거라 생각했어. 돈이 사라지면 그레이가 바로 알아차릴 테니까 그레이한테는 처음부터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내가 못 미더웠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솔레아는 말을 더 이으려 했지만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는 헤이먼의 분홍색 눈동자 탓에 저절로 입이 막혔다.
마법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헤이먼의 투명한 분홍색 눈동자가 솔레아를 향했을 뿐.
“……내가 마력이 부족해서 통나무인지 통롤러인지 하는 걸 몇백 개씩 못 만드니까, 다른 마법사를 고용한 거지? 베르고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게 알려지면 매출에 영향이 있을까 봐 허수아비가 필요했던 거고.”
솔레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생각이 있으니 그리했겠지. 그래, ……그런 건 괜찮아. 왜 하필 돈을 이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괜찮아. 네가 뭐라 설명하든, 나도 이해할 수 있는데. 네가 비밀이라고 하면 나도 지킬 수 있는데…….”
커다란 분홍색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처럼 일렁거렸다.
“날 아낀다며. 지켜 주겠다며. 근데 왜 나는 안 믿어.”
“헤이먼.”
헤이먼의 이름을 단단하게 불렀지만 그는 시선을 피했다.
아래로 얼굴을 푹 숙인 탓에 풍성한 분홍색 머리칼과 동그란 이마, 높은 콧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강한데, 나는 약하니까, 내가 널 지켜 줄 만큼의 마력이 없어서 그래?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의…… 제자라서 꺼림칙했어?”
“그런 거 아니야! 헤이먼, 나 봐 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솔레아가 헤이먼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
붕어처럼 입술을 삐죽 내민 헤이먼의 두 눈에 투명한 물방울이 보석처럼 맺혀 있었다.
“왜 나한테 비밀 만들어……. 나도 가족인데.”
“으이구, 울보야. 이게 뭐라고 울어. 너 밤에 안 자고 울면 홍콩 할매가 잡아간다.”
그게 무슨 할머니인지는 모르겠지만 헤이먼은 양 뺨을 밀가루 치대듯 조물딱거리다 말고 꼭 안아 주는 솔레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허리를 숙인 채 솔레아가 다독여 주는 대로 얌전히 안겨 있으니 서러운 마음이 약간 가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뜨자 돈과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란 돈이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러곤 헤이먼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봤다.
헤이먼은 솔레아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굽었던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쳤다.
이젠 솔레아를 품에 안은 채로 헤이먼이 말했다.
“너한테 뜻이 있으니 이런 거짓말을 꾸몄겠지. ……그런데 노예랑 야밤에 함께 있었던 이유는 좀 들어야겠는데.”
“듣고 싶으면 놔. 네 가슴에 낑겨 죽겠다.”
품 안에서 짜증스레 말하는 솔레아를 놓기 직전까지 헤이먼은 돈을 노려봤다.
감히.
단 두 글자로 설명이 충분한 눈빛이었다.
“전 노예가 아닙니다.”
솔레아가 헤이먼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돈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 왔으니 노예지. 그게 아니면 너 같은 놈이 네 발로 직접 이 집에 일하러 왔다는 거야? 착각이 심하군.”
화가 난 솔레아가 쏘아붙이기 전, 돈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레이 도련님이 자유인 보증서를 써 주셨고, 노예 문서도 직접 찢어 주셨습니다. 처음엔 노예로 왔지만, 지금 아가씨 옆에 남아 있는 건 제 의지입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군다고 네 과거가 다 사라지나?”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자는 게 이 집안의 신념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 건방진!”
불같은 목소리로 말한 헤이먼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솔레아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
솔레아의 외침에 둘 다 입을 다물긴 했지만 서로를 향한 적대적인 눈빛은 그대로였다.
어느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헤이먼. 돈은 이제 노예가 아니야. 방금 한 말은 심했잖아.”
가만히 솔레아를 내려다보던 헤이먼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넌 저딴 놈 없이도 충분히 잘할 수 있어. 쟨 필요 없으니 돌려보내. 어디로든.”
“예, 저 없이도 아가씨는 성공하시겠죠. 그 옆에 있고 싶은 건 제 욕심이겠지만 어쨌든 제가 필요하다 하신 건 아가씨십니다.”
“너한테 한 말 아니니 입 닥치지 그래?”
“아가씨가 지금 누굴 위해서 밤낮없이 공부하며 일하시는지 아시는 분이…….”
“입 닥치라고 했어.”
헤이먼의 손바닥 위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만하라고 외치려던 찰나, 헤이먼의 눈동자 색이 녹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솔레아는 너와 달라. 그리고 당연히 나와도 다르지. 그런데도 감히……. 주제도 모르고.”
“헤이먼!”
헤이먼은 평소처럼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다. 그는 그대로 손바닥에 있던 마력을 모아 돈에게 날렸다.
불에 탄 진흙 같은 냄새와 함께 강력한 파동이 작은 거실을 휩쓸고 지나갔다.
솔레아는 돈의 앞을 가로막고 헤이먼의 마력을 모두 받아 냈다.
“레아!”
잠깐 휘청거리긴 했지만 솔레아는 돈의 부축을 받고 똑바로 섰다.
그러곤 분노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헤이먼의 앞으로 가 그의 뺨을 휘갈겼다.
“뭐 하는 거야!”
아프지도 않은 약한 따귀였다.
하지만 헤이먼은 제 왼쪽 뺨에 손을 올리고 믿기 힘들다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녹빛이 어린 헤이먼의 눈동자 가득 솔레아의 화가 난 얼굴이 담겼다.
“정신 차려. 출신 따위로 사람 깔보지 말고. 너 눈 색깔이나 똑바로 해.”
헤이먼은 저도 모르게 뺨을 쥐고 있던 왼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 이건 나도 모르게……. 나는, 솔레아. 이건 내가 그 사람의…….”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네 방으로 올라가. 나중에 얘기해.”
눈을 가리고 있는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솔레아의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헤이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틀어 뒤돌았다.
힘없는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다 문득 멈췄다.
헤이먼은 무언가에 홀린 표정으로 솔레아를 돌아봤다.
그의 아랫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왜, 왜 내 마법이 안 통했어?”
“그거야 난 원래 마력이 안 통하니까 당연히…….”
“나는 믿었잖아. 나는 믿어서, 내 마력은 항상 다 받아들였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다 튕겨 내? 나한테 실망해서 그래? 그래서 나도 이젠 너한테 남들하고 똑같은 사람이야?”
헤이먼은 떨리는 손끝으로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돈을 가리켰다.
“이젠 내가 쟤보다 못해?”
그의 눈이 다시 완연한 녹색으로 물들었다. 말아 쥔 주먹과 앙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려 왔다.
그때, 어디선가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벌레가 날아들었다.